162화
아침부터 공문서를 확인하며 책상에 붙어 있었던 키스케가 몇 시간 만에 서류에서 눈을 뗐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바가 신전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노바. 이제 왔…… 힐데?”
“어째 저보다 공녀님을 더 반기시는 거 같은데요?”
힐데가르트의 곁에 선 노바는 입을 삐죽 내밀며 토를 달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서운하다는 말투와는 달리 밝고 활기찼다.
“저 섭섭합니다, 전하.”
“노바가 이해해 줘. 왜, 자식 키워도 다 소용없다는 말이 있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노바가 날 키웠다니 금시초문이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키스케가 힐데가르트를 향해 다가왔다.
“어쩐 일이야? 봉납 의식이 끝나면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그럴 생각이었는데, 예정이 좀 바뀌었어.”
이베르타에서의 사건이 모두 마무리된 이후, 수도로 돌아온 키스케는 힐데가르트보다 더 바빴다.
카라딘의 처분을 논하고 로렌조의 재판 때문에 매일같이 회의장에 나가 입씨름을 벌이느라 드문드문 식사를 거를 정도던가.
바쁜 티는 하나도 내지 않길래 괜찮은 줄 알았더니, 노바에게 전해 들은 것만 해도 진이 빠질 정도였다.
마침 하고 싶은 말도 있고, 노바의 권유도 있어서 방문한 건데 오길 잘했다 싶었다.
“잠깐 네 얼굴 좀 보고 싶어서 왔는데, 시간 괜찮아?”
“물론이지.”
사실 시간이 괜찮지 않다는 걸 아는 노바였지만, 그는 주군의 부드러운 눈을 보고 눈치껏 모르는 척해주었다.
비좁았던 키스케의 세계는 이제 제 발로 누군가를 반기며 밖으로 나갈 만큼 넓어졌다.
“다녀오세요, 두 분.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건 노바가 오랫동안 바라 마지않던 변화였고 동시에 키스케를 마음 깊이 아끼는 그의 행복이기도 했다.
* * *
키스케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후원이었다.
기나긴 회랑 한가운데에서 온실로 가는 길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와 산책로를 걸었다.
힐데가르트는 걷는 내내 기분이 좋아 보였다.
키스케는 그녀의 옆모습을 흘끗 보다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좋은 일이 있었나 보네?”
“응. 일단 걱정했던 봉납 의식도 무사히 끝났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설마 진짜 힐데가르트가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제 앞에 나타날 줄이야.
힐데가르트는 제 가슴에 손을 쿡쿡 찌르며 말했다.
“진짜 힐데가르트 말이야. 이 몸의 원래 주인이었던 아이. ……방금 그 아이가 새롭게 환생한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온 참이거든.”
“뭐?”
곁에서 걷던 키스케의 걸음이 돌을 밟은 것처럼 움찔, 하고 굳었다.
“……그게 정말이야?”
“놀랐지? 나도 그랬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힐데가르트는 잠시 고민하다가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맨 처음 신전을 방문했을 때 미네 대사제에게 들었던 이야기부터, 봉납 의식 중에 들었던 오르녹스 신의 목소리.
마지막으로 복음의 서를 읽을 수 있는 아이가 나타난 일까지.
제법 긴 이야기라 온실로 향하던 두 사람의 걸음이 후원을 절반쯤 돌았을 때야 이야기가 끝났다.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었다면 믿지 못했을 거야.”
키스케의 표정에는 그가 느끼는 얼떨떨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잘된 일이야. 오르녹스 교단의 마지막 성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었으니까. 햇수로만 따지면 오십 년은 될걸?”
“그렇지. 교단에게 잘된 일이지.”
“그렇겠지만 교단보다도 네게 가장 잘된 일이잖아.”
걸음을 멈춘 그가 넌지시 물었다.
“다른 누구보다도 네 마음이 가벼워졌을 테니까. 아니야?”
“……네 말이 맞아. 실은 마음이 꽤 가벼워졌어.”
하여튼 눈치 하나는 빠른 키스케였다.
뻥 뚫린 하늘은 마음을 털어놓기에 좋은 날씨였다.
힐데가르트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정원에서 차분히 입을 열었다.
“키스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의무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한 사람이야. 내가 쓸모있어야 가문에서 내 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해보는 게 얼마 만인지.
언제나 들어주는 쪽에 속했던 그녀가 제 마음을 풀어놓았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레온 오빠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착각했어. 누군가는 어리석다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고.”
그렇게 살았어도 괜찮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내가 노력하면 사랑해 주는 사람이, 가족이 곁에 있었으니까.
사랑을 노력으로 얻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몸에서 처음 눈 떴을 때, 난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엉망이 된 가문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걸.”
레온하르트는 알았겠지만 저는 몰랐던 사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지 않는 사람은 혼자가 되었을 때 견딜 수 없다.
키스케에게 해주었던 말들은 힐데가르트 자신이 남에게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러 너한테도 매몰차게 굴었어. 계속 네 마음을 알면서도 거리를 뒀지.”
한때의 감정이라고, 네가 아직 어리다고, 아카락시아 가문이 먼저라며 매번 구실을 들어 그의 진심을 마주 보는 걸 피해왔다.
“미안해. 그래서는 안 됐던 건데.”
힐데가르트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는 훌쩍 자라서 저를 내려다보는 키스케였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눈이었다.
누군가의 진심 어린 마음을 받으면 저 또한 진심으로 돌려주어야 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지금, 이 말이 그에게 늦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내가 어른스럽지 못했어.”
“글쎄. 따지고 보면 내가 너보다 두 살이 많은 거 알고 있어?”
키스케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과하지 마.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는 건 이제 안 그러겠다는 걸 돌려 말하는 의미잖아?”
“누구 제자 아니랄까 봐 똑똑하긴.”
“……지금은 어때?”
키스케는 제게 닿은 힐데가르트의 손에 뺨을 비빈 채 물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힐데?”
“…….”
“아직도 너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이곳에는 한 명도 없다고?”
키스케가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아니.”
힐데가르트는 차분히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지금도 마찬가지라면 이런 말을 네게 하진 않았겠지.”
만일 여전히 그렇게 생각했다면, 지금쯤 플람은 황궁의 지하감옥이 아닌 키스케의 자리에 서 있었을 터다.
사랑하지도 않는 상대의 손을 잡고, 오로지 과거에 안주하고 머물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마음을 죽이며 허상 속에서 살다가 마성신에게 몸과 마음을 먹혔겠지.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선택했다.
정신없는 난전 속에서 망설이지 않았다. 설령 이 몸을 진짜 공녀에게 돌려주지 못한다 해도 새롭게 태어난 이곳에서의 삶을 이어가기로.
“예전에 네게 그랬지?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땐 편히 잠들고 싶다고.”
“…….”
“지금은 그렇지 않아. 이제 난 할 일을 다 마쳤고, 앞으로의 삶을 생각할 때.”
힐데가르트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를 차분히 깔았다.
“네가 거기에 함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어지네?”
마음을 반으로 쪼개서 보여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누군가가 내 곁에 남아준다면, 그건 네가 좋다고.
이런 나를 이해하는 네가 플람과 비슷한 제자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고.
이 아이는 외로워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때가 있었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음을.
키스케의 곁에서는 언제나 제 마음을 숨길 필요도, 억지로 꾸며낼 필요도 없었다.
미하일이나 레디스에게도 감추어야 했던 것을 키스케 앞에서는 쏟아낼 수 있었다.
키스케는 플람과 분명 달랐다.
원하는 걸 내놓으라며 매달리지도, 현재의 제 모습에서 과거를 찾지도 않는다.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눈에 담은 힐데가르트의 마음이 말라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그녀의 마음을 샘솟게 해주었다.
마치 끝없이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우물처럼.
그런 키스케 덕분에 제가 바싹 마르지 않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데뷔탕트 때의 내기는 내가 졌어, 키스케.”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발돋움했다.
그러고는 그의 뺨에 살며시 입술을 맞췄다.
간격을 두고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의 뺨이 조금 발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키스케의 얼굴은 그녀보다 더욱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뺨에만 해줄 거야?”
“욕심쟁이!”
“다음부터는 내기 조건을 더 크게 걸어야겠네.”
꼭 내기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마음의 크기는 분명 제가 더 클 것이다. 키스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막 용기를 낸 그녀보다도 그가 더 힐데가르트를 사랑하기에.
“다음 내기는 뭘로 할까?”
그리고 기어이 이 사랑의 패자가 되어도 상관없었기에, 키스케는 행복하고 벅찬 마음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드넓은 우주는 그의 품에 한 아름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