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신성력이 돌아왔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힐데가르트가 눈을 크게 떴다.
“닷새 정도 되었습니다. 신전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신 분이나, 순례 중이셨던 형제님께 신성력이 발현되었지요.”
로우 사제는 직접 이렇게 알릴 수 있는 게 기쁘다는 듯 뿌듯하면서도 벅찬 표정이었다.
“확인할 수 있는 곳이 이곳뿐이라 모두 수도로 모이고 있지요.”
“닷새라면…… 공녀님께서 성검을 되찾아 왔을 때네요?”
노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말마따나 우연의 일치일 리 없다.
이베르타에서 단테를 검 속에 봉인하고 부활을 저지하자, 바통을 넘겨받듯 신성력이 돌아오다니.
“힘을 되찾으신 분 중에는 예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가지게 되신 분도 계십니다. 환자나 노인을 돌보며 지내셨는데 기적처럼 힘이 돌아와서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잘됐네요. 다행이에요.”
“…….”
“정말이에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요.”
힐데가르트는 로우 사제의 묘한 시선을 넘기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오르녹스 교단이 같은 실수를 범하지는 않겠죠. 신성력으로 다친 자들을 구원하는 기적이 다시 돌아왔다면, 가장 득을 보는 이들은 황실의 눈과 손이 닿지 못하는 빈민이 아니겠어요?”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우 사제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교단이 아카락시아 가문에 면목 없을 일을 했다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공녀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용서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요.”
“과거의 일은 과거에 묻어두죠. 하지만 기뻐하시기엔 일러요.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 오르녹스 신께서 계속 지켜보실 테니까요.”
“물론입니다. 앞으로도 성직자로서 본분을 다해야지요.”
한때 오르녹스 교단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한들 그 자리에서 영원히 머물 리 만무하다. 곪은 것을 깨끗이 도려내면 새 살이 돋게 마련이므로.
한결 부드러운 시선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곧 신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미네 대사제님.”
“오셨군요, 공녀님.”
사람이 신수가 훤해졌다는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이었나 보다.
먼젓번에는 근심이 가득했던 미네 대사제는 신성력이 돌아온 이들이 늘어난 덕인지 한결 밝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대사제보다도 눈에 가득 들어오는 건, 그의 등 뒤에 있는 드넓은 강림의 샘이었다.
“강림의 샘에서 탁한 빛이 모두 사라졌군요.”
불순물을 걸러낸 것처럼 확연한 푸른빛을 되찾은 샘물은 아름다웠다.
“이것도 닷새 전에 일어난 일인가요?”
“그렇습니다. 너무 오래 걸렸지만 오르녹스 신께서 저희의 지난 과오를 조금이나마 용서해 주신 게 아닐지.”
미네 대사제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이 늙은이는 감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두 성검을 찾아주신 공녀님 덕분입니다.”
“기이한 운명이든 재미있는 우연이든 누군가는 종지부를 찍어야지요.”
미네 사제는 요전에 고통스러워 보였던 표정과 달리 훨씬 더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사람은 저 하나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힐데가르트는 기분 좋은 고요함 속에서 자애로운 미소를 띤 성모상을 바라보았다.
“그럼 봉납 의식을 시작하지요. 로우, 부탁하네.”
“예. 그럼 공녀님, 이쪽으로 오시지요.”
힐데가르트는 신전에서 옷을 빌려 입은 뒤 뒤 봉납 의식에 참여했다.
강림의 샘은 ‘샘’치고는 상당히 넓었다.
장정 대여섯이 동시에 헤엄칠 수 있는 크기였는데 그만큼 샘물의 깊이는 얕은 편이었다.
한때 성검이 놓여 있던, 양손을 가슴께까지 들고 있는 성모상은 그곳의 정중앙에 있었다.
로우 사제가 기도문을 외우며 샘물에 신성력을 불어넣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미네와 눈빛을 교환한 뒤, 신발을 벗고 강림의 샘으로 들어섰다.
‘신기한 기분이네.’
차가웠던 샘물도 익숙해지니 그렇게 발이 시리지는 않았다.
기도문 끝날 무렵 힐데가르트는 성검을 성모상의 양손에 올려놓고 뒤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고맙구나. 이젠 괜찮을 거야.
아무것도 없는 발밑에서 뽀그르르, 자그마한 수포가 연달아 올라왔다.
-너의 마지막 근심이었던 그 아이 또한 나의 인도 아래에 있단다.
이변을 눈치챈 로우 사제의 기도문 읊는 소리가 잠시 작아졌다.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는 최선을 다해서 행복해지렴.
머릿속으로 울리는 목소리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했다.
자그마한 빛의 입자와 깃털이 눈앞에서 흩날리는 환상 속에서 힐데가르트는 성모상의 눈이 흑진주처럼 빛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방금…….”
한낮의 환상은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오르녹스 신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나, 성검을 받아 든 성모상에서 은은한 금빛이 샘물 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옅은 금빛과 샘물의 푸른빛과 한 대 어우러지자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탁 트이는 것처럼 시원했다.
“……봉납 의식은 끝났습니다.”
전설이나 다름없던 신의 인도가 이렇게 코앞에서 펼쳐진 건 처음이었다.
힐데가르트는 물론, 의식을 함께하던 두 사제와 노바는 모두 정신을 빼앗긴 사람처럼 한참 동안 성모상을 바라보았다.
봉납 의식을 마친 힐데가르트는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 보면 신언(神言)을 직접 들은 건 태어나서 처음인데.’
신에게 직접 대리자로서 인정받은 성녀만이 완벽한 형태로 신언(神言)을 전해 듣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번 일은 이례 중에서도 이례였다.
힐데가르트는 조금 놀란 수준이었으나 평생을 오르녹스 신교에 몸담았던 미네 대사제나 로우 사제는 눈물을 참지 못할 정도였다.
‘마지막 근심이었던 그 아이는 나의 인도 아래에 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무언가 잡힐 듯 말 듯한데…….
힐데가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옷매무시를 점검한 뒤 밖으로 나왔다.
미네 대사제와 로우 사제가 그녀를 배웅하며 노바와 함께 나란히 걸었다.
“성검의 봉납 소식은 내일 신문에 발표될 겁니다. 혹시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지요. 신전에서…….”
“대사제님, 미네 대사제님!”
그때였다. 사제 하나가 요란한 뜀박질 소리와 함께 그들 쪽으로 달려왔다.
“제롬. 손님이 계시는 데 이 무슨 소란입니까.”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 꼭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그마한 남자 사제가 삐뚤어진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신성력을 확인하러 온 여자아이 중에 엄청난 인재가 섞여 있습니다. 보통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런 소란을 벌이다니. 조금 이따가…….”
“성녀의 재목이 분명합니다!”
제롬이 양 주먹을 꽉 쥔 채 소리쳤다.
평소라면 경솔한 말이라며 혼을 냈을 미네 대사제였으나, 그와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잃어버렸던 퍼즐 하나가 소리를 내며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모호했던 부분이 명쾌하게 들어맞았다.
[교만한 자들은 들어라. 너희는 새로운 성녀가 태어나기 전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리라.]
미네 대사제와 힐데가르트가 시선을 교환했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진지한 얼굴로 제롬을 재촉했다.
“어디에 있죠, 그 아이?”
“당장 안내하게. 바로 확인해 보는 게 좋겠군.”
“이쪽입니다!”
제롬이 안내한 별실에는 나이가 지긋한 노파와 여섯 살 난 소녀가 공놀이하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소녀를 보는 순간, 힐데가르트는 얼어붙었다.
분명 저와 이목구비가 달랐으나, 높게 틀어 묶은 은발과 금빛이 섞인 푸른 눈이 미하일의 어릴 적과 똑같았다.
힐데가르트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인지를.
“……신이시여.”
로우 사제가 성호를 긋고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사이 미네 대사제가 보호자에게 다가갔다.
“실례지만 아이의 보호자 되십니까?”
“예, 예에.”
보호자는 이 상황에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눈치였다.
“저는 위가트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는 율이라고 합니다.”
원장인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신전을 방문한 이유는 간단했다.
고아원 아이 중 하나가 개에게 물려서 팔을 못 쓰게 될 정도로 심하게 다쳤는데, 이 아이의 힘으로 씻은 듯이 나았기에 신성력을 의심하며 찾았다는 이야기였다.
“잠시…… 제롬, 복음의 서를 가지고 오게.”
“네, 넵!”
사라진 제롬은 얼마 후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동안 낯선 사람을 경계하듯 원장의 치마폭에 숨어버린 소녀는 다람쥐처럼 힐끔거리며 다른 이들을 바라보다가, 힐데가르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씩 웃었다.
“아이야. 이것은 우리의 마지막 성녀께서 남기고 가신 복음의 서란다.”
로우는 소녀를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무릎을 꿇었다.
“네가 가진 힘이 우리가 찾던 것이라면 여기에 적힌 문자를 모두 읽을 수 있을 텐데. 어떠냐. 읽을 수 있느냐?”
“……남한테 부탁하려면 부탁합니다, 라고 하는 거랬어요.”
로우 사제는 물론 지켜보던 힐데가르트 또한 아이의 당돌함에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그럼 부탁합니다. 한번 읽어줄래요?”
“좋아요. 어렵지도 않은데 뭘.”
아이는 사람들이 저를 헤치려 드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배짱 좋게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책장을 마구 넘겼다.
아이가 어찌나 세게 책장을 넘겼는지, 복음의 서가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지 아는 하급 사제 제롬만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오늘을 나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어제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리>.”
아이의 유창한 발음에 미네 대사제는 연신 오르녹스 신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훔쳤다.
로우 사제 또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원장님. 이 오빠 이상해요. 읽어 달라고 해서 읽은 건데 얼굴이 찌그러져요!”
“그런 말을 하면 못써, 힐데.”
“힐데?”
익숙한 이름에 노바가 먼저 반응했다.
힐데가르트는 순식간에 제게로 시선이 몰리는 걸 느끼고, 소녀와 눈을 맞추며 주저앉았다.
“꼬마야. 너 이름이 뭐니?”
“저요?”
아이는 복음의 서를 마치 제 것처럼 껴안은 채 말했다.
“힐데가르트요. 저희 엄마가 고아원에 저를 놓고 갔을 때, 편지에 써서 남긴 유일한 흔적이 이름이래요.”
“…….”
“예쁜 이름이죠?”
힐데가르트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은 아이를 보며 소리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오르녹스 교단은 용서받은 모양이네요.”
커다란 힐데가르트는 미네 대사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작은 힐데가르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워, 힐데. 우리 악수할까?”
“악수요? 좋아요! 그런데 예쁜 언니는 누구세요?”
“나? 나는…….”
어떻게 소개 해야 할까.
힐데가르트는 잠시 고민한 끝에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오늘부터 네 후견인이라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