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미하일은 깜빡 잠들어 있었다.
평소라면 새벽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그였건만.
아카락시아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묵어서인지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깰 듯 말 듯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던 그의 코앞으로 무언가 희끄무레한 형체가 다가왔다.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뜬 미하일이 눈앞의 상대를 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힐데?”
잠든 제 앞까지 다가온 상대는 다름 아닌 조그마한 힐데가르트였다.
열두 살, 제 허리까지 오는 키의 아주 조그마했던 여동생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깼네? 헤헤. 안 깨우려 했는데.”
힐데의 목소리는 옥구슬이 굴러가듯 낭랑했고, 어딘지 모르게 오래도록 귀에 남는 아련함이 있었다.
“안 깨우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밤새 널 기다렸는데…….”
그렇게 대답한 것도 잠시.
‘어라?’
힐데는 왜 어려진 거지?
뒤늦게서야 미하일은 한참 전에 자란 힐데가르트가 다시 어린 모습으로 제 앞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코앞까지 다가온 힐데가르트는 까치발을 들더니 소파에 판쯤 걸쳐서 누워 있던 미하일의 이마에 쪽, 쪽 하고 두 번 뽀뽀했다.
“자. 이걸로 끝!”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쑥스럽다는 듯 양손을 등 뒤로 감췄다.
“레디스 먼저 해줬지만, 대신 오빠는 두 번 해줬다? 삐지지 마?”
“……힐데?”
“그리고 예전에 우리 집이 너무 싫다고 했던 거…… 취소야. 미안. 이제는 하나도 안 싫어.”
“…….”
생각해 보면, 힐데가르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카락시아 가문이 정말 싫다며 화난 새처럼 땍땍거렸던 여동생의 어린 시절.
지금은 그런 적이 있었냐며 능청스레 넘겨버리던 힐데가르트의 아주 어릴 적 모습이었다.
“인사를 했으니까 난 갈게.”
“힐데, 잠깐만.”
왠지 모르게 이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에 미하일이 그녀를 불러세우려 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니?”
그러나 힐데가르트는 대답 대신 유유히 저에게서 멀어지더니 히죽 웃었다.
“오빠. 내가 비밀 하나 알려줄까?”
언제부턴가 철없이 웃던 여동생이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졌지만, 어느 쪽이든 미하일에게는 소중한 여동생이었다.
마지막까지 지켜주고 싶고 가장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은…… 행복한 시간만을 보내기를 바라는 사람.
“우린 곧 다시 만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고 사라진 아이는 답답한 곳을 벗어나 소풍을 가는 날 모자를 쓴 것처럼 신이 나 보였다.
“그러니까 다음에 다시 만나요.”
그래서 미하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는지 모르겠다.
미하일은 졸음이 달아난 눈으로 소파에서 몸을 뗐다.
천장에 펼쳐진 다이아몬드 패턴은 이곳이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아닌 이베르타 공작가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꿈……?”
뺨 이곳저곳을 만져보았지만 차갑기만 할 뿐. 방에는 사람이 들렀다 간 흔적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게…… 꿈이었다고?”
하필 이럴 때?
‘설마 힐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그런 생각이 들자 불안함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미하일이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꽉 묶으며 밖으로 나서려던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등도 켜지 않은 방으로 레디스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형. 깨어 있었어?”
“레디스?”
“다행이다. 저기, 어…… 그…… 내가 방금, 좀 이상한…… 꿈을 꾼 거 같은데.”
레디스의 낯빛이 평소보다 어두웠다.
미하일은 직감적으로 그가 저와 같은 꿈을 꾸었다는 걸 간파했다.
“혹시 너도 꿈에서 힐데가 나왔어?”
“뭐?”
“어릴 적 모습으로?”
“형도 같은 꿈을 꾼 거야?”
말문이 턱 막힌 두 사람이 서로를 빤히 보았다. 미하일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안 되겠다. 이거 저택에서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당장 가봐야겠어. 힐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말을 내어달라고 할게. 잠깐만 기다려.”
고개를 끄덕인 레디스가 곧장 문고리를 쥔 순간이었다. 누군가 쿵쿵 소리가 나도록 문을 두드렸다. 노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다급하고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실례합니다!”
“라비엣 공작?”
놀란 얼굴로 레디스가 문을 열자, 두꺼운 겉옷만 걸친 라비엣이 앞섬을 여민 채 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두 분 모두 같이 계셨군요? 잘 됐어요.”
“혹시 힐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네?”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한 것도 잠시. 라비엣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공녀님이라면 방금 막 무사히 돌아오셨는걸요. 로비에 계세요.”
“로비에요?!”
“네. 어서 내려가 보세요.”
미하일은 그만 체면도 잊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아래층으로 향했다. 레디스도 다를 건 없었다.
둘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나선으로 된 계단을 쿵쾅대며 내려갔다.
“힐데!”
“어? 안 자고 있었네?”
라비엣의 말이 옳았다.
로비에는 이제 막 도착했는지, 뺨에 묻은 흙을 떼어내는 힐데가르트가 있었다. 노바와 이야기하던 걸 멈춘 그녀가 두 사람이 서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채 웃었다.
“금방 온다고 그랬지? 나 다녀왔…….”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레디스와 미하일이 그녀를 와락 껴안자, 힐데가르트는 하던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으악?!”
“너! 진짜…… 왜 이렇게 사람을 걱정시키냐!”
“사람 살려, 숨 막히잖아!”
평소라면 레디스를 말렸을 미하일이었으나 이번에는 그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지켜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여동생이었지만, 항상 위험하거나 힘들 때마다 제 뒤로 숨지 않던 아이였다.
힐데가르트는 답답하다며 레디스의 어깨를 팍팍 내려쳤지만 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휴, 어느새 어깨가 이렇게 산만하게 컸지? 둘 다 나보다 작았으면서…….”
“웃기시네. 너보다 작았던 적은 형이랑 내 인생을 통틀어도 한 번도 없거든?”
“아니거든? 있었거든? 그런 게 있거든?”
시시껄렁한 이유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미하일의 움푹 팬 미간을 한결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약속 지킨다고 했잖아.”
힐데가르트는 조심스레 두 사람을 살폈다.
그러나 맞은편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키스케는 네가 감당해야 할 걱정이라는 듯 묘한 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두 손을 다 들어버린 힐데가르트는 산만하게 큰 두 오빠를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이젠 아무 데도 안 가. 다 끝났으니 안심해.”
그 말을 듣자마자 더욱 끌어안은 미하일 때문에 힐데가르트가 아닌 새벽에 비명을 지른 건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 * *
키스케는 카라딘과 함께 수도로 돌아갔다.
앞서 압송되었던 로렌조와 함께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고 이는 큰 화제가 되었다. 황족이 재판 대상이 되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카라딘과 함께 수도로 압송된 사람 중에는 신문이나 대중을 상대로 밝힐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플람이었다.
플람의 신체는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단테의 영향으로 늙지 않는 몸을 유지하고 있던 그였으나, 몸을 내어준 마성신의 분신이 사라지자 노화가 급속도로 찾아왔다.
뿐만 아니라 시간 축에 손을 댄 마법의 영향이 컸다.
시력과 마력을 모두 잃고 노화가 찾아오기 시작한 그는 옥중에서 자신의 모습이 끔찍하게 변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로브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채 결코 얼굴을 들지 않았다.
영원히 어둠 속에 기거할 것 같은 흑마법사는 그대로 황궁의 가장 깊은 삼중 감옥에 갇혔다.
힐데가르트는 막시밀리언을 통해 그 소식을 들었고 간단한 답장을 보냈다. 결코 죽을 때까지 내보내서는 안 된다는 짤막한 소견이었다.
그러자 또 한 번 답장이 날아왔다. 날을 잡아 함께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말이었다.
마칠 일을 모두 끝내면 그렇게 하자고 답장의 답장을 보낸 다음 날.
힐데가르트는 오랜만에 아카락시아 저택에서 푹 잔 뒤, 이동 게이트를 통해 수도로 올라왔다.
“미안해, 노바. 이런 건 호위까진 필요 없는데.”
“무슨 소리세요.”
수도로 올라오기 무섭게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노바가 손을 내저었다.
“오히려 폐하께서 현명한 판단을 내리신 거라 생각합니다. 더는 성검이 도난당해서는 안 될 테니까요.”
“이젠 그럴 걱정 없으니 괜찮아.”
“그래도요. 만일의 사태는 대비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습니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가 보낸 황실 마차에 올랐다.
“카라딘 황자가 성소에 침입하지만 않았으면 끝났을 일인데 말이죠.”
“간단한 일인데 참 오래 걸렸지?”
미네 사제에게서 강림의 샘에 성검을 완전히 봉납할 준비가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도 괜찮아. 이제 봉납하면 아무도 성검에 손을 댈 수 없을 테니까.”
얼마 후 마차가 신전에 도착했다.
노바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그녀 쪽으로 로우 사제가 빠르게 다가왔다.
“공녀님.”
“로우 사제님, 오랜만이네요. 습격당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어요.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예. 처치가 빨랐던 덕분에 무사합니다. 불편한 곳도 없고요.”
“그거 다행이네요. 그런데…….”
힐데가르트는 오늘따라 사람이 많아 보이는 신전을 의아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신도가 늘어난 건가요?”
“평소보다 사람이 많지요?”
로우 사제는 그녀의 심중을 짐작한 듯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부터 사제 중에 신성력이 생기거나 돌아온 이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