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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60)화 (160/166)

157화

이것은 꿈인가 생시인가?

그러나 판단이나 기억을 반추하기도 전에 감각이 먼저 빠르게 정보를 받아들인다.

이끼 한 점 없는 깨끗한 아치형 창문과 페디먼트 조각의 매끄러움을.

황금으로 만든 분수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별빛을 주워 담을 만큼 높은 곳에서 만물을 내려보는 천공탑의 장엄함을 몰라볼 수 없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와 연결된 마력의 실을 다시금 확인했다.

마력의 실은 단단히 제 몸을 묶어 둔 채였다.

‘마력의 실은…… 아직도 연결되어 있어. 환각 마법에 빠진 건 아니야.’

여전히 빛을 잃지 않은 황금빛 마력의 실이 그녀를 안심시켰다.

동시에 더 큰 의문이 들었다.

분명 마력의 코어가 있어야 할 공간인데 왜 이런 광경이 펼쳐져 있는 걸까?

그때 풀을 밟고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드시나요, 스승님.”

“플람.”

동요조차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는 오히려 소름을 불렀다.

“스승님이 사랑하셨던 아카락시아 공작가입니다. ……저보다도, 목숨보다도 아끼셨던 그곳이지요.”

환각 마법은 마법을 건 사람의 상상력과 구체화 능력에 따라 재현의 범위가 천차만별이다.

‘이렇게 완벽한 구사는 불가능해.’

한마디로 이건…… 정말 80년 전 아카락시아일 확률이 높았다.

“너…… 설마 시간 축을 건드린 거야?”

플람은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서서 저 저 아래쪽으로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아카락시아 공작저를 가리켰다.

“기쁘시지요? 이 광경을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셨을 텐데.”

“제정신으로 그런 거니?”

마법에는 절대 침범할 수 없는 두 가지 영역의 절대 축이 있다.

바로 시간 축과 공간 축이다.

공간 축은 순간 이동 마법이라도 발명되었다지만, 시간 축은 아직도 미지수가 많았다.

기껏해야 앞날을 불확실하게 예언하는 게 고작일 정도니.

“왜 이런 짓을 했어? 나를 살리는 것 말고도 다른 목적이 있었니?”

힐데가르트는 그의 눈을 확인했다.

플람의 노란 눈은 붉은 기가 조금도 없었다.

“시간을 건드린 마법사는 마법이 끝나는 순간 마력과 수명을 대가로 지불한다!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이 마법이 끝나면 넌…….”

“그럼 마법이 끝나지 않으면 그만인 게 아닐까요?”

“뭐?”

플람이 그녀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그러고는 힐데가르트의 오른손을 잡은 뒤 왼손으로는 허리를 감았다.

춤을 추는 연인처럼 스승을 끌어안은 그가 속삭였다.

“스승님이 제 손을 잡고 놓지 않으신다면…… 제가 이 마법을 깰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네 마력은 무한정하지 않아. 언젠가는 마력이 바닥나서 끝날 거야.”

“과연 그럴까요?”

플람의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묻어나왔다.

“이젠 저조차도 제 마력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단테와 연결된 뒤부터는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거든요.”

“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제 와서 무엇을 바라고 이러는 거야.

힐데가르트가 강하게 팔을 뿌리치려 하자 플람은 손에 힘을 주었다.

“처음에는 스승님을 되살리기만 하면 그걸로 만족할 생각이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오래된 선물 상자 안에서 썩어버린 사탕처럼 달콤하고 역했다.

“단테의 힘을 최대한 빌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스승님께 들킨다면 저를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려고 하실 테니까요. 그런데…….”

천천히 마음에 욕심이 자랐다.

제물로 쓰기 적합한 아카락시아의 막내 공녀를 데려와 술식을 쓰는 내내, 잃어버린 스승을 투영했다.

그리고 소망했다. 딱 한 번만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직접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당신도 나도 살아 있다고, 난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이 세상에 남아 있다고,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힐데가르트를 살리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동안, 서러운 마음에 원망도 했다.

스승이 죽은 뒤에도 그의 마음에는 여전히 사랑이 남아 있었다.

애정은 불덩이처럼 커져서 심장을 살라 먹고 플람을 집어삼켰다.

매일 갈증에 시달린 채 사막을 떠도는 사람처럼, 옛 시절을 모래알처럼 헤아리며 주저앉았다.

대체 왜 당신은 그 사랑 한 모금을 내게 내려주지 않으셨는지.

그러나 원망은 과거의 회초리를 맞아 사라지고, 죄책감이 그의 멱살을 잡아 하루에도 수십 번씩 숨을 막히게 했다.

플람에게는 원망을 품을 자격이 없다.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했습니다.”

상처를 사랑으로 지지고 태울 권리만이 남아 있을 뿐.

“아직 이 세상에 스승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는 걸…… 아셨으면 했어요.”

분명 재회를 기뻐할 스승이었다.

그녀는 다정한 사람이니까, 얼버무리고 모른 척한다면 곁에서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야말로 그녀의 사랑을 양분 삼아 다시 한번 살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재회는 최악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처음으로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마법으로 사람을 죽였는데, 이상하리만치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희망이나 다름없는 재회가 엉망이 되었다.

남은 것은 부정하고 싶은 파국뿐이었다.

“스승님이 제게 물으셨지요. 너에게 최선을 다했는데 그것으론 모자라느냐고. 부족하냐고.”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플람은 그가 박박 긁어모아 바치는 사랑이 저에게 얼마나 숨 막히게 다가오는지를 모르는 게 분명했다.

“부족합니다. 언제나 부족했습니다. 가족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고 스승님의 무엇도 아닌데 어떻게 족하겠습니까!”

“그만해. 플람. 더는 말하지 마.”

플람은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서 사랑받는 삶에 익숙해진 스승을 바라보았다.

“스승님도 그러셨지 않습니까. 레온하르트 공작에게 언제나 쓸모있는 동생이 되어서 사랑받으시려 했잖아요.”

“플람!”

“선망과 명예는 모두 레온하르트 공작의 몫으로, 영광과 위상은 가문의 몫으로!”

파아악!

힐데가르트의 손끝에서 화염이 쏟아졌다.

방어막을 펼친 플람이 숨을 삼키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정곡이었나요?”

필시 그랬겠지.

오직 나만이 이 사람을 바로 보고 있었으니까.

그가 여전히 변하지 않은 힐데가르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린 것도 잠시.

플람은 다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했다.

“부족한 마음을 스스로 채워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요, 스승님.”

“돌아가자니? 어디로?”

“저와 함께 다른 우주로 가는 겁니다.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그 순간 플람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발끝에서 뻗어져 나온 검은 마력이 희미한 실선처럼 번지며 바닥에 마력진을 그렸다.

‘이거였구나.’

힐데가르트에게 아연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순간 이동 마법과 묘하게 달랐던 감각.

시간과 공간을 접어 만든 이동 게이트 마법과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플람은 거대한 차원 게이트를 연 것이다.

“처음에는 스승님만 살릴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기뻐하지 않으실 게 눈에 선했죠.”

그녀가 두 축을 완전히 뛰어넘어 8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그래서 그다음에는 레온하르트 공작을 되살릴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제정신이니?”

“네. 꼭 그렇게 반응하실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녀가 결코 등 돌릴 수 없는 존재를 되살리려 했다.

장미를 돋보이게 만드는 한해살이 종이꽃을 수십, 수백 명 되살리고 만들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그것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플람은 힐데가르트가 이 순간을 절대 거부하지 못하기를, 과거를 연민하고 그리워하기를 바랐다.

아카락시아 가문을 짓밟으려 든 단테를 내버려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힐데가르트가 다시 태어난 이 세상에 환멸을 느끼길 바랐다.

다시 얻은 두 번째 생이, 과거와 현재가 완전히 유리된 시간 축이기를 바랐다.

그렇게 해야만 당신은 겨우 못 이긴 척 내 손을 잡을 테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제발, 제 손을 잡으세요.”

이를 사리문 플람이 그녀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

그녀의 차가운 표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플람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래. 이젠 인정해야겠구나.”

마침내 힐데가르트의 입이 떨어졌다.

“나는 그동안 네가 변한 건지, 아니면 내가 너를 잘못 가르친 게 아닌지 이리저리 생각해 봤어.”

하지만 답은 분명했다.

“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거구나.”

오직 그녀에게 사랑받기 위해 마법에 몰두했던 플람은 그 잔혹한 순수성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손 치워. 그리고 당장 곤죽이 되도록 때려눕히기 전에 마법을 풀어라.”

그녀는 손을 잡지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플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요? 왜 고집을 피우십니까!”

플람이 한 발자국 내디딘 순간, 힐데가르트의 손에서 만들어진 얼음 송곳이 지면을 호우처럼 강타했다.

플람은 그 모든 마법을 막아내며 악을 썼다.

“레온하르트 공작을 다시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후회를, 실수를 지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모든 걸 다시 시작할 기회……!!”

“지금 네 꼴을 봐라! 네가 사랑을 이유로 저지른 짓을 돌이켜 보란 말이다!”

꽈르르릉!

이번에는 푸른 뇌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플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힐데가르트가 살아오며 배운 사랑은 모두 레온하르트에게서 온 것이었다.

레온하르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입 밖으로 내어 표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언어로만 전해지던가?

말 못 하는 어머니가 열이 나는 아이의 땀을 밤새도록 닦아준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 자기만족인가?

“플람.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해주마.”

마침내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네게 연심을 품을 날은 세 번을 다시 태어나도 오지 않을 거야. 너는 다시 태어날 나를 기다린 게 아니라, 네 후회와 아집을 씻을 기회를 기다린 거다!”

“아니야!”

플람이 피를 토하는 사람처럼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공간이 일그러진다. 플람의 정신에 타격이 가고 있다는 의미였다.

노란색과 붉은색이 뒤섞인 눈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아니라고?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했다면, 만 년이 넘도록 너 혼자 가슴을 태웠어야지!”

네 사랑에 스스로 몸을 던져 익사했어야지.

후회 속에서 침몰했어야지.

네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더라도, 힐데가르트와 아카락시아 가문에는 손끝 하나 대지 못한 채.

“나에게 이렇게 큰 실망을 안겨준 뒤에 사랑이라고 얼버무리지 말았어야지!”

마침내 플람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를 완전히 잘라내기 위해 힐데가르트가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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