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눈이 번쩍 떠졌다.
흐릿했던 눈앞의 상대가 점차 또렷하게 보였다.
부르는 목소리는 하나가 아닌 둘. 더없이 익숙한 이들의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미하일. ……레디스?”
“오빠라는 말은 왜 쏙 빼먹냐?”
레디스는 핀잔을 주면서도 안도했는지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미하일은 땀에 흠뻑 젖어 있는 여동생의 뺨을 톡 두드렸다.
“힐데. 악몽이라도 꾼 거야? 온몸이 식은 땀투성이야.”
“……아.”
“담요도 안 덮고 있으니까 그렇지.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냐.”
힐데가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소파에서 잠들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잠깐이었지만, 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영체 상태였다.
땀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난 건 그 영향이 분명했다.
힐데가르트는 나란히 눈높이를 맞춘 채 제 안색을 살피는 두 사람을 보았다.
“놀랐잖아. 두 사람 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어떻게 오긴. 당연히 이동 게이트로 왔지!”
레디스는 유달리 피곤해 보이는 동생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차분한 미하일과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소식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오길 잘한 거 같네. 힐데, 몸이 안 좋으면 오빠랑 같이 아카락시아 공작가로 돌아가자.”
“아니야. 몸은 괜찮아. 지금은 그럴 때도 아니고. ……그보다 편지를 보냈는데? 못 받은 거야?”
“그딴 걸 소식이라고 할 수 있냐?”
레디스의 목소리에는 불만이 빵빵하게 차 있었다.
“데뷔탕트가 끝나자마자 황궁에서 며칠 있다 온다더니, 어느 날 갑자기 이베르타로 가서 거기서 지낸다고 하질 않나. 신문을 보니 이베르타 공작령에선 수해도 모자라 로렌조 공이 실각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는데! 넌 편지로 남 일처럼 ‘대충 그렇게 됐고 신경 쓰지 마’ 같은 소리를 써놓고!”
레디스는 힐데가르트의 어깨를 손끝으로 쿡쿡 찔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기다리려 해도 한계라는 게 있단 말이다.”
“알겠어. 미안해, 됐지? 그치만 어쩔 수 없었어. 나 그동안 정말 바빴단 말이야.”
“레디스. 그만. 힐데를 콕콕 찌르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겠지?”
힐데가르트가 질색하며 레디스의 손을 쳐내려 하자, 미하일이 엄하게 타일렀다. 레디스는 별수 없이 손가락을 내렸다.
“좀 전에 라비엣 공작께 이야기는 들었어. 네 덕분에 수해를 피할 수 있었다고.”
“……화났어?”
힐데가르트가 슬그머니 미하일을 올려다보았다.
미하일의 표정은 복잡했다.
“아니. 화 안 났어. 대견하고 기특하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네.”
“신문…… 봤구나?”
“응.”
카라딘과 로렌조를 구속하는 과정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는 걸 신문에서 보았다.
설마설마했지만 조금 전 이베르타 공작에게 직접 그에 관한 감사 인사를 듣고 나니 미하일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힐데. 오빤 네가 하는 일을 하나하나 검열하고 위험하다고 막을 생각은 없어. 그래도 가끔은 우리가 걱정하고 있단 걸 알아주면 안 될까?”
레디스는 자칫 무거워질 것 같은 두 사람의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일부러 큰소리를 쳤다.
“그래! 여기서 아카락시아 공작저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소식 한 통 없어? 그런 일은 본가에도 도움을 요청했어야지. 섭섭하다!”
“……미안.”
“그래! 그렇게 미안해할 거면…… 엥?”
레디스는 무언가를 잘못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힐데가 사과를 한다고?
놀란 건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마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힐데가르트가 먼저 두 사람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찰랑이는 물처럼 넘칠 것 같은 감정이 눈물이 되어 쏟아질까 봐, 그녀는 얼굴을 감췄다.
‘……미하일 공작과 레디스. 당장 널 반갑게 찾아온 카유크 공자며 라비엣 공녀까지.’
‘나도, 노바도.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할 무수히 많은 사람이 너를 아끼고 함께할 거야.’
‘그런데도 그 모든 인연 중 단 한 명도 너를 매어둘 존재로는 부족했던 거야?’
어쩌면 키스케의 말이 맞았던 게 아닐까.
내 결정과 판단이 잘못되었던 게 아닐까?
플람을 없애기로 했다. 하지만 정말 이 육체로 진짜 힐데가르트가 돌아올 수 있을까? 내 힘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나?
무엇보다도…… 나는 진심으로 이들과 헤어지기를 바라고 있나?
“힐데?”
“힐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만약 그 모든 대답에 아니라고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이 죄책감과 함께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냥 잠깐만…… 이대로 있을래.”
힐데가르트는 두 사람을 끌어안은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동생의 그런 모습이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는지, 두 사람도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일 뿐이었다.
* * *
카유크는 미하일과 레디스를 보자마자 술부터 마시자는 말을 꺼내 힐데가르트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식사하지 않았다는 말에 간단한 음식을 들며 이야기가 오갔다.
“카유크, 너 소식이 너무 안 들리길래 계속 오피니움에서 지낼 작정인가 했지.”
“무슨 소리야! 사시사철 망치 소리만 들려오는 그런 도시에 내 인생을 처박아둘 순 없지. 그럼 인류적인 손해잖아.”
카유크는 제 턱이 얼마나 뾰족한지 보여주듯이 살살 쓰다듬었다.
“난 고독하고 아름다운 짐승이 될 거야. 킬리만자로를 헤매는 표범이랄까.”
“제발 사람부터 되세요, 카유크.”
라비엣은 질려버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하일의 시선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그보다 정말 큰 일을 겪으셨던데요, 라비엣 공녀.”
“형.”
“아, 미안합니다. 공작.”
뒤늦게 제 말실수를 깨달은 미하일이 한발 늦게 사과했다.
그러나 라비엣은 화를 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저도 아직 익숙하지 않거든요. 미하일 공작께서도 그런 적이 있으셨겠죠?”
따뜻한 분위기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중 가장 분위기가 좋아진 건, 라비엣이 비엔날레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두 분만 괜찮으시다면, 식사가 끝나고 이베르타가 미술품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다음 비엔날레에 낼 미술품은 그림이 아닌 조각을 내놓을 생각이거든요.”
“조각? ……설마 로즈마리안 성녀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미하일은 물론 듣고 있던 카유크조차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술품에 큰 관심이 없었던 레디스 조차도 모를 수가 없는 물건이다.
역사서에 실린 성녀상이 다음 비엔날레에 전시된다니. 감탄을 터뜨린 것도 잠시, 레디스는 여동생이 대화에 집중하기는커녕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걸 보고 그녀를 쿡 찔렀다.
“힐데, 왜 그래?”
“응?”
“어째 정신을 다른 데 두고 있나 봐, 너?”
“그런 거 아니야.”
하지만 레디스의 묘하게 날카로운 눈썰미는 적중한 상태였다.
식당에는 빈자리가 둘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미로 동굴로 사전 탐사를 나간 솔로몬, 그리고 키스케였다.
‘혹시 요전에 했던 말 때문에 아직도 기분이 상해 있는 걸까.’
반나절 전부터 방에 틀어박혀 있다는 키스케가 신경 쓰이는 그녀였다.
그럴 녀석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니겠지?’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키스케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식당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가려 했던 힐데가르트는 결국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 층 동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가운 대리석 위로 옅은 등불이 그려낸 그림자가 길게 뻗었다.
“공녀님?”
“안녕, 노바.”
“좋은 밤입니다. 어쩐 일이세요?”
키스케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노바가 상대를 확인하자 검에서 손을 뗐다.
“밤이 늦었는데 주무시지 않으십니까? 잠이 안 오시나요?”
“응. 좀 걷고 싶은 기분이라서.”
힐데가르트는 굳게 닫힌 문을 힐끔 바라보았다.
“키스케는 뭐 하고 있어? 자고 있으려나?”
“그럴 리가요.”
노바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이 시간에 잠드는 일은 드물다며, 슬그머니 목소리를 낮춘 그가 속삭였다.
“실은 말이죠. 어제부터 공녀님께 드리겠다면서…….”
그 순간이었다.
소름이 끼치는 마력의 파동이 저택 서쪽에서 퍼졌다.
노바에게 귀를 가까이 가져다 대고 있던 힐데가르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강렬한 마력이 한 번에 모이더니 물주머니가 터지듯 일제히 주변으로 뻗어나갔다.
우르르르릉!
잘못 들었을 리 없다.
동시에 땅에서 느껴지는 이 떨림을 그녀뿐만 아니라 노바 또한 느꼈다.
“어어어……?!”
“이건…….”
땅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산이 갈라지는 충격이었다.
저택 어딘가에서 와장창, 하고 창문이 박살 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동시에 벌컥, 키스케의 방문이 열렸다.
“노바, 지금 지진이…… 힐데?”
힐데가르트는 그의 손에 들린 낯선 물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탈리스만이 시계추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키……!”
힐데가르트가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였다. 키스케의 동공이 커졌다.
2층 복도의 유리창이 모두 깨지기 직전.
그가 재빨리 힐데가르트를 제 품으로 끌어당긴 채 몸을 비틀었다.
빠지직! 빠직!
챙그랑!
복도의 샹들리에게 떨어지며 귀를 찢는 소음이 허공을 갈랐다. 동시에 노바가 두 사람을 껴안으며 웅크려 앉았다.
지진이 멎은 건 그로부터 10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