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그대가 이걸 직접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솔로몬은 그가 내민 탈리스만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만든 건 맞지만 미흡한 실력입니다.”
“이걸 보고 미흡하다고 말할 마법사는 없을 거야.”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솔로몬이 개조한 탈리스만은 마석을 가느다란 사슬로 연결해서 혁대에 달 수 있는 고리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효력을 다한 상태라 푸르스름한 빛을 잃었으나, 그 힘이 온전했을 때는 흑마법을 거뜬히 막아내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 물건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십니까?”
“비슷한 걸 힐데에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말이야.”
“공녀님께요?”
“그래. 어떻게 만든 건지 자세히 알려줄 수 있나?”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솔로몬이 말끝을 흐렸다.
그는 회의실에서 내내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키스케를 슬그머니 살폈다.
“공녀님께서는 마력이 높은 만큼 마법 저항력도 무척 높으십니다. 일반인보다 훨씬 더 흑마법이 통할 상대가 아니니 굳이 탈리스만은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높긴 하지만 완벽히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 마력이 고갈되면 그만큼 저항력도 낮아지잖아?”
“그렇긴 합니다.”
솔로몬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힐데는 또다시 저주의 대상이 될 확률이 높아. 최소한의 보험은 들어두고 싶어.”
그녀를 노리는 상대가 다름 아닌 과거의 인연이라면.
그녀가 과거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다면, 몇 번이고 제 몸을 던져서라도 해야 할 일을 끝마칠 사람이다.
모닥불에 던져 넣는 장작처럼 기어이 제 몸을 잿더미로 만들고 나서야 끝날 수도 있다.
키스케는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매번 무리해서 마력 고갈 상황에 빠지곤 하거든.”
“공녀님이 걱정되십니까? 그렇게 강한 사람인데?”
“…….”
“심지어 어제 그렇게 매몰차게 구셨는데도요?”
솔로몬은 그만 상황도 잊고 흥미진진하게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키스케가 입을 다문 것도 잠시.
“반한 쪽이 지는 거라는 말이 있지?”
그는 효력을 잃은 탈리스만을 꼭 쥔 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난 아마 평생 힐데를 이기지 못할 거야.”
솔로몬의 눈에 비친 키스케의 쓴웃음은 그가 차갑게 분노할 때보다도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차갑고 이지적으로만 보였던 황태자는 속절없이 제 마음을 다독이느라 바빠 보였다.
때로는 정해진 승리자보다 링 위에서 필사적으로 한 점 따내기에 몰두한 선수를 응원해 주고 싶은 법이다.
솔로몬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탈리스만의 개조법은 어렵지 않으니 금방 익히실 수 있을 겁니다. 제 방에 도움이 될 만한 서적이 있으니 가져다드리지요.”
“그렇게 해주겠나? ……고마워.”
내내 굳어 있던 키스케의 표정은 그제야 조금 밝아졌다.
* * *
올해 아쿠아 알타의 피해자는 예년의 십 분의 일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물이 불어난 하천에 휘말린 이들이거나 기반이 약해진 건물에 깔린 사람들이었다.
바꿔 말하면 천 명을 채우기 위해서는 아직도 180명이나 되는 시신이나 제물이 필요했다. 위협이 완전히 가신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내가 단테라면 어떤 방법을 쓰려고 할까.’
몇 년 동안 찾았던 성검을 드디어 손에 넣었고, 부활이 목전이나 다름없는 지금이라면…….
머릿속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다.
“……이상하네. 머리가 안 굴러가.”
힐데가르트는 눈가를 쓸었다.
‘피곤한가?’
아직 비워낸 만큼의 마력이 다 차오르지 않은 상태이긴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이상으로 몸이 무겁고 축 처졌다.
‘조금 더 쉬어야 하나? 하지만 충분히 쉰 것 같은데…….’
소파에 천천히 누운 힐데가르트의 눈이 어질거렸다.
그녀는 어지러움을 가라앉히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몸이 부유하는 깃털처럼 붕 뜨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정신이 이베르타 공작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주변을 밝힌 횃불 말고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동굴이었다.
축축하고 서늘한 느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깊은 암흑 속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힐데가르트는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
“……플람?”
“스승님.”
부쩍 지친 기색이 역력한 제자가 눈앞에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잠시 냉정하게 상황을 되짚었다.
‘지금 이건…… 실체가 아니야?’
그녀는 투명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럼 영체(靈體) 상태?’
마치 영혼이 빠져나온 것처럼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광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쪽으로 갈 수 없어서 스승님을 이곳으로 불렀습니다.”
플람의 노란 눈이 반짝였다.
건조한 목소리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단테가 알아채지 못하게 스승님과 이야기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거든요.”
“플람. 내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네.”
그녀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내내 그녀의 추적을 피해서 도망쳐왔던 플람과 단테였다.
여태껏 꼭꼭 숨었으면서, 이런 때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를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혼란은 잠시였다.
그녀의 가슴속에는 만나면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말로 차 있었다.
힐데가르트가 그의 양팔을 잡았다.
“왜 그랬어?”
“…….”
“응? 플람. 왜 나를 되살린 거야. 내가 이런 방식으로 다시 살아나도 기뻐할 리 없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아닌 너는 알고 있잖아!”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투명한 손은 플람을 붙잡지 못한 채 허공을 통과했다.
무심코 그녀를 부축해 주려 했던 플람도 헛헛한 얼굴로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 이유를 몰라서 물으시는 걸까요?
얼마 후 플람이 입이 열렸다.
“아니면 다시 제 입으로 말씀드려야만 받아주실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여전히 스승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벌꿀처럼 노란 눈에서는 예전처럼 자글자글 끓는 애정 대신,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 진득한 집착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가득 고여 있었다.
“어떤 제자가 눈앞에서 스승님이 사라지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있습니까.”
“…….”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가 눈앞에서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제정신일 수 있습니까?”
플람은 흐느끼듯 웃었다. 동시에 속삭였다.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해서…….”
“그래서 마성신이 수해로 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여서 제물로 쓰려 하는 걸 보고만 있었어?”
그러나 사랑을 입에 담은 말은 이어질 수 없었다.
힐데가르트의 새파란 눈빛이 그를 관통하듯 바라보고 있었기에.
“단테가 막시밀리언의 손자에게 마력을 나누어주고, 조금씩 정신이 나가는 걸 보면서도.”
“…….”
“생판 모르는 사람처럼 막지 않았다는 거지?”
“……오염된 정신은 오르녹스 교단의 힘을 빌리면 시간이 지나 돌아올 겁니다.”
“그것까지 전부 계산하고 벌인 거구나.”
힐데가르트의 고운 눈썹이 일그러졌다.
형식적인 미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막스가 너를 붙잡더라도 죽이지 못할 테니까. 내가 너를 제자라고 생각해서 버리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구나?”
“…….”
“그렇다면 내가 할 말도 알고 있겠지?”
상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찰나의 순간을 힐데가르트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기어코 상대가 가장 듣고 싶어 하지 않을 이야기를 입에 담았다.
“나는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 적 없다.”
플람이 무심코 주먹을 쥐었다.
“이제 와서요?”
“그래. 내가 원하는 건 사자소생이 아니라, 이 몸의 주인. 진짜 힐데가르트의 영혼을 다시 되돌려 놓을 방법이야. 바닥까지 떨어진 너에게 내가 바라는 건 이제 그것 하나뿐이야.”
“……스승님. 제발…….”
“다시 돌려놓자. 모든 걸.”
과연 어디서부터 해야 하는 후회일까?
동정심으로 제자를 거둔 것?
레온 오빠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것?
플람을 마성신 토벌에 데려간 것?
그리 길지 않은 인생임에도 벌써 이만큼이나 많은 후회가 쌓인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왜 그런 말만 하시는 겁니까?”
“…….”
“진짜 힐데가르트의 영혼이요? 어차피 상관없는 목숨 아닙니까. 그런 것보다 스승님이 살아 있는 게 제겐 훨씬 더 중요합니다. 아카락시아 가문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 걸 정당화라고 하는 거란다, 플람.”
힐데가르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밀어냈다. 동시에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자 플람의 표정에 들불처럼 서러움이 일었다.
“……왜, 제게서 멀어지시는 겁니까?”
힐데가르트는 그의 서러움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더는 플람의 감정을 받아주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게 어떤 감정이든 간에.
“제가 스승님의 제자인 이상, 제 마음을 받아주실 날이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까?”
플람의 노란 눈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이제 저에겐 마음 한 조각 내주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요? 스승님도 저보다 더 소중한 건 없으시잖아요.”
“플람. 이 가여운 제자야.”
입술을 짓씹은 힐데가르트가 무심코 그의 뺨을 쓰다듬으려 했다.
“나는 레온 오빠에게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다정한 기억을 돌려주고 싶었어. 그래서 온 힘을 다해 너를 돌봤지. 직접 이룩한 천공탑까지 너에게 남겼는데.”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손은 허망하게 플람을 지나쳤다.
“너는 그런데도 부족하다며, 마지막 마음 한 방울까지 전부 달라고 내게 조르는구나.”
죽은 사람을 살려내서라도 기어코 제 마음을 채우려 하는 플람의 모습은 그녀의 실패이자 실수를 의미하기도 했다.
“네가 이렇게 욕심쟁이인 줄 알았다면 마법을 가르치지 않았을 텐데.”
“스승님!”
플람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네가 받지 못한 게 한이 되어 산 사람을 이용해서 죽은 사람까지 되살릴 정도라면, 네 마력을 전부 거두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그게 스승의 역할이니까.”
“제 목숨을 거두시겠다고요?”
처음으로 플람의 목소리에서 빈정거림이 묻어나왔다.
힐데가르트는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오만한 마법사의 일면이었다.
이어지는 플람의 말은 선언과 다를 게 없었다.
“스승님은 그러실 수 없을 겁니다.”
“단언하는구나. 뭘 믿고?”
“제가 스승님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 두었는지 아신다면 정말 기뻐하실 테니까요. 그러니까…….”
힐데가르트는 그에게서 한 걸음 멀어지기 위해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플람은 두 걸음을 더 다가왔다.
“곧 모든 준비가 끝납니다. 꼭 저를 사랑해 주세요, 스승님.”
그는 힐데가르트의 입술을 탐하려는 듯 제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땐 저에게 하신 슬픈 말은 모두 잊을 테니까요.”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힐데!”
“어, 야! 일어나봐! 괜찮은 거야?”
누군가가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