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왔는데.”
문턱을 넘기 전까지만 해도 키스케가 생각한 광경은 이게 아니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플람을 놓친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까 봐 잠시 화제를 돌릴 생각이었다. 그랬건만…….
“키스케 전하를 뵙습니다.”
라비엣이 먼저 그를 향해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얼굴을 매일 보는 상황에서도 깍듯한 라비엣 때문에 반대로 이어지는 카유크의 인사는 퍽 불량하게 느껴졌다.
“오브론의 카유크가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뵙지요? 설마 여기에 전하께서 계실 줄은 몰랐지만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오랜만에 보는군, 카유크 공자.”
“반갑다는 말씀이시죠?”
“……여전하군.”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제 앞을 가리는 카유크를 쭉 밀어내며 말했다.
“이상한 오해 하지 마. 이 바보가 멋대로 달라붙은 것뿐이니까.”
“바보라니? 오피니움 최연소 건축가이자 오브론 대공가에서도 세 손가락으로 꼽히는 수재인 내가?”
“공자가 왔다는 걸 알려주려 했는데 여기 와 있으니,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동요를 감추는 키스케를 보며 카유크가 히죽거렸다.
당장에라도 저와 힐데가르트를 떨어뜨려 놓고 싶어 하는 저 얼굴이 재미있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살짝 곯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전하의 소식은 저도 신문이나 사람들을 통해 잘 듣고 있었습니다. 키스케 전하께서도 여전하시던데요?”
“……무슨 의미지?”
“전하께서 힐데의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신 일로 사교계가 후끈합니다.”
뭐 때문에 후끈하다고?
아니, 그보다 오랜만에 만났으면서 왜 이렇게 친근하게 굴어?
힐데가르트는 다시 제 곁으로 다가와서 치대는 카유크를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앞으론 아카락시아 공작가에 줄을 대야 하는 게 아니냐며 소문이 강으로 흐르고 있던데요?”
“……그런 건 공자가 함부로 이야기할 만한 게 아닌 것 같은데.”
힐데가르트를 차기 황태자비로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소리였다.
한 박자 늦게 그 뜻을 파악한 힐데가르트가 언성을 높였다.
“카유크!”
“왜 소리치는데?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좋은 소문 물어다 준 거잖아. 네 몸값이 그렇게 높다니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힐데가르트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손날로 목을 치는 시늉을 했다. 적당히 하라는 신호였다.
“너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다시 목검으로 두들겨 맞고 싶은 건 아니지?”
“……잊고 살고 있었는데, 남의 흑역사 들춰내지 마.”
카유크의 뺨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힐데가르트를 별 볼 일 없는 공녀라고 생각하며 첫 만남부터 재어보았던 건 그가 철없던 열다섯일 때의 일이다.
하여간 진지한 키스케와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카유크는 성격이 정반대였다.
‘예전에도 그러더니 왜 또 공기가 미묘한 건데?’
힐데가르트는 눈을 가늘게 흘겨 뜨는 카유크를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밀린 회포를 푸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 * *
오피니움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카유크가 이베르타까지 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아쿠아 알타의 피해 재건 때문이었다.
카유크는 여전히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지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무거웠던 이베르타 저택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저녁 만찬을 함께하는 내내, 카유크는 라비엣과 옥신각신 다투고 힐데가르트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았으나 식사가 끝나 갈 때쯤에는 수해 피해 복구는 저에게 맡기라며 가슴을 탕탕 쳤다.
덕분에 힐데가르트는 평소보다 많이 웃었다.
디저트를 먹는 동안에는 한술 더 떠, 라비엣이 힐데가르트의 활약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떠드느라 한 옥타브씩 목소리를 높였다.
재미있는 저녁 식사였으나, 한편으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식당을 나서서 방으로 돌아가는 힐데가르트의 옆자리에 키스케가 따라붙었다.
“피곤하지?”
“……그렇게 티 났어?”
“네 얼굴에 쓰여 있어.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프고 시끄럽다는 거.”
“그러는 넌 카유크가 무슨 말만 해도 일단 못마땅하게 듣는 거 같던데. 아니야?”
“내가 언제 그랬어?”
키스케가 어깨를 으쓱였다.
“카유크 공자에겐 싫은 소리 한마디 안 했는걸.”
“마음에 안 든다고 얼굴에 쓰여 있었는데?”
“내 얼굴이 스케치북도 아니고 써 놓을 공간이 어디 있겠어?”
시치미를 뚝 뗀 키스케는 간격을 두고 한결 조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만약 정말로 마음에 안 들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했을걸.”
“…….”
“……농담이야.”
힐데가르트가 그의 팔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키스케는 뻔뻔하게도 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농담이라니까.”
“거짓말하지 마. 진심이 섞여 있는 거 다 알아.”
“카유크 공자가 네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었으면 진심이었을 거야. 다행이지?”
“……잘생겼다고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다.”
키스케는 뜻밖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힐데가르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생겼다고?”
“…….”
“힐데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은 건 처음인 거 같은데.”
“내 제자가 칭찬에 확인이 필요한 타입이었나?”
힐데가르트는 황당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내가 마법의 거울이야?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왕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역할?”
“괜찮네. 만약 그런 거울이 있다면 네 이상형인 얼굴이 누구인지 찾아달라고 할 거야.”
“이상형은 또 왜?”
그녀를 바라보는 키스케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무래도 넌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걸 잊어버린 거 같아서.”
“……안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내게도, 카유크 공자에게도 똑같은 말투로 이야기하잖아.”
“…….”
“조금 초조해지네. 이래서야 갈 길이 먼 것 같은데.”
여유롭고 당당하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지만 그건 항상 저보다 힐데가르트가 더 많이 갖춘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바짝 얼굴을 들이댄 키스케의 속눈썹이 아주 잘 보였다.
“얼굴로 꼬시면 넘어오나?”
“넘어가긴 무슨…….”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가산점이라도 달라는 듯 그녀의 방문을 대신 열어주는 키스케가 살짝 귀여웠다.
그 직후, 아무도 없어야 할 방에서 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즐거우십니까? 다들 절 빼고 만찬까지 드시며 즐겁고 행복하게 지내시는 겁니까?”
“으악?!”
놀란 힐데가르트가 무심코 비명을 질렀다.
“소, 솔로몬!”
소파에 기댄 채 늘어져 있던 그가 드디어 오신 거냐며 투덜거렸다.
“진짜 부럽습니다. 저는 며칠 동안 퀴퀴한 먼지와 싸웠는데. 다들 저한텐 같이 식사하자고 물어보지도 않고…… 흑흑흑.”
“아니, 그건…… 고서 해독 때문에 바쁘다며. 식사하자고 말할 때마다 거절하길래…….”
“그래도 그건 그거, 이건 이겁니다!”
저만 쏙 빠지게 된 상황이 억울하단 소리였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꽤 섭섭한 상황이긴 했다.
힐데가르트는 우는 아이에게 딸랑이 한 번 더 흔들어준다는 심정으로 그를 달랬다.
“알겠어, 다음엔 꼭 부를게. 점심은 먹었어? 고서 해독은 급한 일…… 이 아닌 건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이 우선이지! 밥부터 먹고 해야지! 식당에 아직 사람 있을 거야. 같이 가줄까?”
“괜찮습니다. 어차피 전 곰팡이 핀 빵이나 먹으면서 하루 스물여섯 시간 소처럼 일하는 게 운명이니까요.”
솔로몬이 우는 시늉을 하자 힐데가르트는 대답하기가 곤란해졌다.
“뭐…… 농담은 이쯤하고요.”
키스케가 파격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마탑주를 바라보았다. 농담이었다고?
“공녀님, 시간 괜찮으시죠? 고서 해독이 끝났습니다.”
“고서 해독?”
“아, 키스케. 그게 말이지…….”
힐데가르트가 애매하게 말끝을 흐릴 때였다.
솔로몬은 제법 제 업적이 뿌듯하다는 듯, 가슴을 쭉 편 채 말을 이었다.
“성검에 관한 문헌에서 힌트가 될만한 걸 얻었는데. 아무래도 흑마법의 원리를 생각하면 맞아떨어지는 가설이 이거 하나뿐인 것 같아서요.”
“성검?”
“음? 괜찮으시면 황태자 전하께서도 함께 들으시겠습니까?”
힐데가르트는 잠시 난처해졌다.
성검과 ‘진짜 공녀’의 행방에 관해선 키스케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는데.
하지만 이 상황에서 저 혼자 들을 이야기니 돌아가라며 키스케를 쫓아낼 수도 없었다.
결국, 솔로몬과 키스케가 사이좋게 그녀의 방 소파에 눌러앉았다.
“그럼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솔로몬은 미리 준비해 온 고서의 필사본 몇 장을 내밀었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 위에는 솔로몬이 이리저리 밑줄을 친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진짜 힐데가르트 공녀의 영혼은 성검에 갇혀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