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50)화 (150/166)

147화

“세상에, 세상에, 세상에! 두 분 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우아아아아! 아가씨!”

한바탕 소란을 떨며 달려오는 솔로몬. 거기에 베르톨트까지.

그중에는 전혀 예상 못 한 얼굴 하나가 더 있었다.

“어? 테리오 총괄?”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공녀님. 비를 너무 많이 맞으신 것 같습니다.”

코트 한쪽에 달린 엄지손톱만 한 수사관 배지가 오늘따라 눈에 더 잘 들어왔다.

대체 이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한 번에 몰려온 건지.

어안이 벙벙한 힐데가르트가 눈을 깜빡이는 사이, 주춤거리던 로렌조가 재빨리 달아나려 들었다.

“흐, 흐으이이익!”

“멈춰.”

그러나 헛된 시도였다.

키스케의 마력으로 만든 불꽃의 칼날이 로렌조를 중심으로 둥그런 새장처럼 지면에 내리꽂혔다.

“키, 키스케 황태자 전하…… 거기에 노바 경까지……?”

라비엣은 황태자뿐 아니라 그의 최측근까지 달려온 모습을 보고,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벙끗거렸다.

“대, 대체 여긴 어떻게…….”

노바는 대답 대신 놀라서 다리가 풀릴 뻔한 소녀를 부축했다.

‘끝났네.’

힐데가르트는 귀걸이가 박살 나자 지면에 웅크리는 카라딘을 내려다보았다.

넓은 등에는 두꺼운 빗줄기가 쉴 새 없이 꽂히고 있었다.

“힐데.”

그런 힐데가르트의 곁으로 키스케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곁에 오자 더운 열기가 훅 몰려들었다.

정신없이 달려온 건지, 키스케는 조금 숨이 찬 것 같았다.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코트를 벗어 힐데가르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힐데,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응.”

그제야 힐데가르트의 손에서도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뭉쳐놓았던 마력이 파스스 흩어졌다.

힐데가르트는 연신 시야를 가리는 빗물을 손바닥으로 훔쳤다.

그리고 좀 전에 느꼈던 익숙한 마력의 주인에게 말했다.

“마주칠 줄 알았어. 좀 더 늦게 와도 괜찮았는데.”

“다음엔 더 빨리 오란 뜻이지?”

육안으로는 큰 상처가 없었다. 농담을 건넬 정도의 여유가 있다는 것도 다행이었다.

키스케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뺨을 쓸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걱정했어?”

“당연한 소리 하지 마.”

“아하하.”

힐데가르트는 따끈한 코트를 매만지며 소리 내서 웃었다.

카라딘을 본 순간부터, 키스케와 마주치게 되리라는 예상은 했다.

한창 카라딘을 상대하던 중에도 빠르게 움직이는 키스케의 마력이 느껴졌기에 마음이 든든했다는 건 비밀이다.

“로렌조 이베르타 공.”

이베르타의 기사들과 함께 부랑자를 제압한 테리오 총괄이 다가왔다.

“수배 중인 범죄자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불법으로 사병 육성한 죄. 동시에 수도원을 이용한 인신매매와 라비엣 이베르타 살해 미수 혐의로 당신을 체포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수사관에게 붙들린 그가 몸부림치자, 키스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치미 뗄 것 없어, 로렌조 공. 그대가 부렸던 수하 중 한 명이 황실에서 심어둔 수사관이었으니까.”

“뭐라고?”

“그대를 구속할 증거와 증인은 이미 확보했다는 뜻이다.”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로렌조가 이를 갈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

“잠시 실례.”

힐데가르트는 반항하는 로렌조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테리오 총괄이 직접 그를 몸수색했다.

그러자 그의 품속에서 자그마한 주머니가 나왔다.

“안 돼, 그 반지는……!”

주머니 속을 열어보자, 작은 반지가 나왔다.

커다란 주홍색 토파즈. 안쪽에는 이베르타의 문양을 새긴 그 반지를 힐데가르트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가주 인장 반지는 정당한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죠.”

마침내 로렌조의 얼굴이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리고 끔찍한 절규와 동시에 커다란 노성이 터졌다.

“놔! 놔라! 이거 놔……!!”

소리의 근원지는 노바에게 붙잡힌 카라딘이었다.

카라딘은 몇 번이나 제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마법을 부리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귀걸이는 파괴당한 지 오래였다. 텅 빈 자리에서는 피가 날 뿐이었다.

그가 어찌나 세게 몸을 털며 반항했는지 바닥에 눕힌 채 제압해야 할 정도였다.

키스케는 그런 카라딘을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보지 마…… 날 그렇게 내려다보지 말라고!”

카라딘이 이를 갈며 외쳤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날 그렇게 내려다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 네가?!”

“카라딘.”

“어머니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건 너 때문이잖아!”

울분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도 항상 네 편이었잖아! 나한텐 한 번도 네게 하는 것처럼 관심을 준 적이 없었어!”

“할 말은 그뿐인가?”

“……뭐?”

저를 땅으로 처박는 손길을 뿌리치던 카라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황족의 신분으로 수배자가 되어, 이베르타 공작가의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마지막까지 할 말이라는 게 그것뿐이냐고 묻고 있다!”

“…….”

“어머니를 핑계 삼아 결국 네가 좋을 대로 행동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 했지.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하는 말이라는 게 고작…….”

“……시끄러워……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그딴 소리야!”

“전하, 떨어지십시오!”

카라딘이 온몸을 이리저리 흔들자, 그를 제압 중이던 노바의 얼굴이 굳어졌다.

“단테! 당장 나와서 이 쓰레기들을 죽여버려!”

카라딘이 앙칼진 목소리로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설마 단테가 이 근처에 있는 걸까?

“단테…… 단테! 단테에!!”

그러나 분노에 찬 카라딘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단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머잖아 카라딘의 입에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이 이어졌다.

귀걸이가 깨진 뒤부터 점차 이성을 잃기 시작한 카라딘이 흡사 악귀처럼 변하고 있었다.

푹 패인 눈두덩이는 이제 퍼런 빛을 넘어 시커멓게 물들고 있었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카라딘을, 키스케는 오랫동안 보고 있었다.

“키스케.”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야기가 제대로 통하는 상황이 아니야. 더는 대화를 계속해 봤자 소용없겠어.”

“……그래.”

카라딘은 마성신의 힘을 너무 많이 빌렸다.

그 여파가 밀려오는 광경을 굳이 키스케가 볼 필요는 없으리라.

그녀의 말에 키스케는 간신히 카라딘에게서 등을 돌렸다.

“라비엣 공작 대리.”

“네, 네!”

갑자기 이름이 불린 라비엣은 깜짝 놀랐다.

“죄인들을 수도로 압송하기 전까지 이베르타 공작저의 지하 감옥을 빌리고 싶은데 괜찮겠나?”

“아, 네! 물론입니다.”

베르톨트의 걱정 가득한 시선을 받고 있던 라비엣이 한바탕 젖어서 볼품없어진 드레스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황태자 전하의 뜻대로 하소서.”

비록 형편없는 몰골이라지만 빗줄기가 그녀의 몸에 밴 기품까지 씻어내지는 못했다.

“고맙군. 그럼 그대도 어서 돌아가 진찰을 받아보도록 하게.”

“황공합니다.”

용건을 끝낸 키스케는 힐데가르트에게 몸을 돌렸다.

“힐데, 돌아가자. 너도 무리했어. 이러다 감기 걸려.”

“그래. 그보다 잠시만.”

힐데가르트는 제 팔을 잡은 키스케를 잠시 떼어놓았다.

그러곤 느린 걸음으로 라비엣에게 다가갔다.

“라비엣.”

“네?”

“자요. 어서 받아요.”

힐데가르트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로렌조에게 압수한 가주 인장 반지였다.

“이제야 겨우 반지가 주인을 찾았네요.”

“…….”

라비엣은 떨리는 눈으로 가주 인장 반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결국 힐데가르트는 직접 라비엣의 팔을 잡고 반지를 쥐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큰일이었죠? 그래도…….”

더 이상 무서운 일은 없다고.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났다고.

비 온 끝에 무지개가 뜰 거라고.

해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던 힐데가르트였으나,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으…… 으으……!”

내내 팽팽히 담긴 고무줄처럼 긴장하고 있었던 라비엣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지더니, 제게 와락 안겼기 때문이다.

“라, 라비엣?”

“힐데 언니…… 으아앙! 엉엉!”

베르톨트는 깜짝 놀랐다.

차기 이베르타 공작이자, 장차 공작가를 이끌어가야 할 사람으로서 언제나 제 감정을 억누르던 라비엣이었다.

그랬던 그녀가 누군가에게 저토록 진솔하게 기대며 감정을 토해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허엉, 흐엉엉엉! 엉엉엉!”

“그래요, 많이 무서웠죠?”

“정말로, 죽는, 줄, 어엉…… 언니가 없었으면…… 허어엉! 엉엉!”

“그래요, 고생 많았어요. 그보다 언니라니…… 우리 동갑인데…….”

힐데가르트는 저를 끌어안고 펑펑 울기 시작한 라비엣을 토닥이며 달랬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라비엣의 목소리를 집어삼키던 번개는 언제 내리쳤냐는 듯 잠잠해졌다.

번개는 아쿠아 알타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 다시는 내리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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