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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47)화 (147/166)

144화

일대의 마력을 제 주변에 두른 힐데가르트는 흡사 폭풍의 눈이나 마찬가지였다.

솔로몬은 그런 그녀를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떨림 없이 단단한 어깨 너머로 동그란 마력 구체가 짙은 푸른빛을 띤 채, 서서히 허공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파삭!

힐데가르트가 지니고 있던 탈리스만이 부서지며 마력으로 변했다.

그러자 동그란 구체는 좀 전보다 훨씬 더 맑고 푸른빛을 띠었다.

“공녀님! 그 이상 마력을 모으면 위험합니다!”

솔로몬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게 한 인간이 다룰 수 있는 마력인가?

‘대체 어떻게 할 생각이지?’

이미 저수조의 무너진 부분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새기 시작했다.

시간이라도 돌리지 않는 한 손상된 벽면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솔로몬의 만류에도 힐데가르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녀가 허공으로 솟아오른 마력구를 향해 팔을 뻗은 뒤, 마지막으로 자신의 마력을 주입했다.

그러자 푸른빛을 띠던 마력구는 하얗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눈을 부릅뜬 솔로몬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쳤다.

“무모합니다, 공녀님! 저만한 양의 물을 한 번에 얼리는 건……!!”

하지만 솔로몬이 만류하기도 전에 마력구가 힐데가르트의 손을 떠나 하늘로 솟구쳤다.

동시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방금까지 초가을 폭우가 퍼붓던 일대에 한겨울 한파가 몰아닥치듯 어마어마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바람.

숨을 삼킨 솔로몬이 양팔을 들어 제 눈앞을 가로막자, 불꽃놀이가 터지듯 섬광이 일대를 뒤덮었다.

“…….”

솔로몬이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십수 초가 지난 뒤였다.

조금 전 마법이 어찌나 강력했는지, 그의 로브 끝자락에 살얼음이 껴 있었다.

힐데가르트의 눈동자는 다시 본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좀 전보다 훨씬 더 창백해진 안색이었으나, 탑 위에서 저수조를 내려다보는 표정에 뚜렷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곁으로 다가간 솔로몬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일대는 새하얀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많던 담수가 모조리 꽝꽝 얼어붙었고, 넘칠 것 같았던 물보라의 표면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사과드립니다, 공녀님.”

“사과? 왜?”

“공녀님께서 초대 마탑주라고 밝히셨을 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가씨인 줄 알았습니다.”

“뭐라구?”

어이없는 고해였다.

힐데가르트가 뾰로통한 얼굴로 투덜댔다.

“그런 생각을 했으면 차라리 끝까지 숨길 것이지.”

“이 광경을 보고 있으니 제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던 건지 알겠습니다.”

힐데가르트를 바라보는 솔로몬의 눈빛이 사뭇 진지했다.

“현존하는 마법사와는 차원이 다르시군요. 마탑주인 제가 이름도 못 내밀겠는데요?”

“마탑주가 그렇게 패기 없는 소릴 하면…….”

힐데가르트는 밀려오는 현기증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벽을 짚고 서자 부랴부랴 솔로몬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곰팡이 핀 오렌지 같은데.”

“비유를 해도 참 예쁘게도 한다…….”

힐데가르트는 천천히 벽에 등을 기댄 채 심호흡을 했다.

‘무리했어.’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력을 쓴 여파였다.

빙글빙글 돌던 시야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자, 그녀는 저수조 외벽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놓쳤나?’

저수조를 부순 카라딘은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진 상태였다.

‘하필 코앞에서 놓쳐버리다니.’

그녀가 주먹으로 애꿎은 벽을 쿵 쳤다.

그때, 누군가가 정신없이 나선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두 분 다 괜찮으십니까?!”

베르톨트였다. 계단을 오르느라 새빨갛게 얼굴이 달아오른 그가 흥분에 찬 채 말했다.

“바깥 좀 보십시오! 방금 엄청난 냉기가 몰아쳤는데……!”

“놀라지 말아요. 제가 한 거니까.”

“예? 공녀님 혼자서 말입니까? 저걸 전부 다 얼리셨다고요?!”

베르톨트의 목소리가 뒤집혔다.

“넋 놓고 있을 시간 없어요. 얼음이 다 녹기 전에 외벽에 모래주머니라도 쌓아놓아야 해요. 그래야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거라면 걱정 말아요.”

솔로몬이 쏙 끼어들며 말했다.

“조금 전에 이베르타 저택 쪽으로 연락을 넣었으니까요.”

“뭐? 언제?”

“오자마자? 하얀 까마귀를 만들어서 날려 보냈거든요.”

전서를 주고받는 마력 새라면 보통 비둘기나 매로 만드는 게 정상인데 까마귀라니.

황당하지만 민첩함 하나는 뛰어났다.

‘심장 부근이 너무 아파.’

힐데가르트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세게 뛰는 걸 의식하곤, 손바닥으로 가슴께를 꾹 눌렀다.

마력이 빠져나간 몸은 마치 근육이 빠지고 뼈만 남은 것처럼 후들후들 떨렸다.

힐데가르트는 솔로몬의 부축을 받으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지상의 초소 근처에는 여전히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람들이 언제 올까? 오래 걸리지 않아야 할 텐데…….”

그때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이베르타 가문의 마차가 보였다.

한데 마차에서 내린 이들은 기사가 아닌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베르! 큰일이야.”

“알베른 집사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거기에 리오나까지…….”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이베르타 공작가의 집사, 알베른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호, 혹시 라비엣 아가씨가 이쪽으로 오시지 않았습니까?”

“무슨 일이에요?”

“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정원부터 별채까지 전부 찾아보았는데 흔적도 없이!”

예상치 못한 말에 세 사람 모두 깜짝 놀랐다.

특히 라비엣과 학술원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던 베르톨트는 더럭 화를 냈다.

“피오나,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날씨에 기사도 없이 혼자서 나가실 분이 아니잖아! 저택에 안 계신다는 게 말이 돼?”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저도 미칠 것 같다는 피오나의 한탄이었다.

집사가 잠든 라비엣을 확인하려고 침실을 찾아간 게 한 시간 전이었다.

하지만 라비엣은 침실에도, 욕실에도 없었고 마치 하늘로 증발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몸에 걸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이.

“그럴 린 없지만…… 수해 때문에 너무 걱정돼서 몰래 외출하신 건가 했는데, 문지기도 다른 기사들도 아무도 본 적이 없대요.”

피오나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베르톨트와 마찬가지로 라비엣과 함께 학술원을 다닌 피오나였다.

그녀는 라비엣이 이렇게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경거망동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떡하죠? 설마 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예전처럼 납…… 납치라도 당하신 건…….”

“무슨 불길한 소리야!”

“지금으로선 그럴 확률이 높군요. 아쿠아 알타 때문에 저택에 있는 기사 대부분이 피난을 돕고 있지 않습니까.”

화를 내는 베르톨트와 달리, 솔로몬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곧 자정입니다. 경비가 가장 느슨해진 틈을 타서 손을 쓴 게 분명해요.”

“그럼 지금이라도 당장 기사들에게 수색 명령을 내려야……!”

“잠깐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데.”

일동이 우왕좌왕하던 때였다.

단호한 목소리로 끼어든 힐데가르트가 자연스레 대화의 주도권을 잡았다.

“왜 하필 이럴 때 라비엣 양이 납치당한 거지?”

“네?”

“오늘 밤 경비가 느슨해지는 걸 아는 사람은 이베르타 공작저에 있는 사람들뿐이잖아.”

그녀가 동의를 구하듯 주변 사람과 시선을 교환했다.

“만약 납치를 당한 거라면 누가 목적을 가지고 벌인 일 아니겠어?”

“그렇지요. 아가씨께선 이베르타의 하나뿐인 후계자시니…….”

“라비엣 양은 아직 작위 계승식을 치르지 않았잖아? 가주 인장 반지도 받지 못한 상태고.”

이베르타 사람들이라면 쉽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이야기를, 힐데가르트는 냉정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그녀가 사라졌을 때 가장 득을 보는 사람이 누구지?”

잠시 침묵이 일었다.

어렵사리 말문을 연 건 베르톨트였다.

“……로렌조 공의 소행이라는 말씀이십니까?”

“…….”

힐데가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가늠해 보더니 말했다.

“아무나 지도 좀 가져다줄래?”

* * *

“살려주세요! 거기 아무도 없어요?”

흡사 비명처럼 들리는 외침이 새카만 우물 안에서 메아리쳤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그러나 라비엣의 목소리는 바깥으로 퍼지지 못했다. 저를 납치한 자가 우물 뚜껑을 닫아버린 탓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바깥에서 번개까지 내리치고 있었다.

라비엣의 손가락 끄트머리가 축축한 우물 벽 안을 긁어대듯 허우적거렸다.

“으윽…….”

가까스로 튀어나온 벽돌 모퉁이를 움켜쥔 것도 잠시.

축축한 이끼가 낀 탓에 그녀의 손은 금방 미끄러졌다.

“허욱, 우…….”

무거운 드레스를 벗었음에도 몸은 당장에라도 캄캄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끅…….”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발버둥 쳤으나, 누군가가 구해줄 거라는 희망은 다 쓴 양초처럼 서서히 닳아지고 있었다.

‘죽기 싫어.’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물 위를 떠다니는 시체로…… 끔찍한 꼴로 발견되는 걸까?

‘싫어…… 그런 건 싫어! 무서워!’

라비엣은 자꾸만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을 뱉으며 소리쳤다.

“알베른! 안시! 베르톨트! 피오나!”

깊고 어두운 우물은 흡사 캄캄한 터널과 다를 게 없었다.

라비엣은 울음을 터뜨리며 허우적거렸다.

“숙부님! 살려주세요!”

누구라도 좋았다. 저를 납치한 사람이라도 상관없으니, 라비엣은 제발 저 우물 뚜껑을 누군가가 열어주기를 간절하게 빌었다.

그러나 희망은 찾아오지 않았다.

점차 차가워지는 손발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몸이 꼬르륵, 수면 밑으로 가라앉아가던 순간.

“라비엣!”

기적처럼 우물 뚜껑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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