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응?”
“수해 규모를 키우는 일 말입니다.”
창문의 커튼을 친 로렌조가 한숨 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조카가 사라지면 제가 돌봐야 할 땅입니다. 수해 때문에 이재민이 발생하는 부담도 해마다 늘어나서…… 듣고 있으신 겁니까?”
그가 듣는 둥 마는 둥 딴짓하는 단테에게 말했다.
“우리의 계획이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
로렌조는 단테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수도 조사관 몇 명이 얼마 전부터 이베르타를 들쑤시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수상한 냄새를 맡고 몰려들 겁니다.”
“그런 말투는 조금 불쾌한걸.”
단테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꾸한 지 얼마나 됐을까.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앉아 있었던 소파의 팔걸이가 통째로 뜯어져 나갔다.
“이봐, 로렌조 이베르타. 개들이 냄새를 맡고 돌아다니는 게 내 탓은 아니잖아?”
단테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로렌조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수해의 규모를 키워서 목적을 이루고, 너는 조카가 수해를 수습하지 못하는 걸 빌미로 가주 자리를 빼앗는다.”
“…….”
“처음부터 그런 계획이었잖아?”
“하지만…….”
그가 성큼성큼 다가올수록, 로렌조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이제 와서 발뺌이라도 할 생각이야?”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어야지 그래야 네 목숨도 보전할 수 있을 테니까.”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단테가 힘껏 손을 치켜들었다.
거리낌 없이 뺨을 후려갈기려는 기세에 놀란 로렌조가 무심코 뒷걸음질 친 순간이었다.
“착각하면 안 되지. 네가 날 돕는 게 아니야. 내가 너에게 협력해 주는 거잖아?”
단테는 태도를 순식간에 바꾸며, 상대를 가지고 놀 듯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나 로렌조는 되레 그런 단테의 행동에 소름이 돋았다.
“난 네 조카가 살아 있어도 곤란할 게 하나도 없어. 하지만 넌 다를 텐데.”
“…….”
단테의 말은 사실이었다.
라비엣이 살아 있는 한 그는 결코 ‘이베르타 공작’이 될 수 없었다.
내내 라비엣에게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게 있으니 이제는 그것도 한계였다.
로렌조가 아무리 조카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 한들, 조카가 살아 있는 한 그는 언제고 정당한 작위 승계자가 아니었다.
그녀가 사라져야 가주 인장 반지는 온전히 제 품에 안길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널 갈기갈기 찢어서 늑대 밥으로 만들어도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야. 하지만 인간과는 달리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존재거든.”
“…….”
“그래서 네 역겨운 작위 승계에 어울려주고 있는 건데…… 이런 일은 올해가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본 단테는 코웃음을 쳤다.
“대단하신 성자 나셨군. 그래 봤자 위선자인 주제에.”
“…….”
로렌조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반박하는 것도, 약속을 깨는 것도 그에겐 불가능했다.
어느 쪽이든 이젠 너무 늦은 상황이라는 걸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가만히 주먹만 쥐고 있을 때였다.
똑똑.
“들어와.”
노크 소리에 대답한 건 로렌조가 아닌 단테였다.
“대화 나누시던 도중에 실례하겠습니다, 주인님.”
로렌조의 시종이 눈치를 살피며 등을 돌린 제 주인과 단테를 번갈아 보았다.
로렌조는 자신의 시종을 수족처럼 부리는 단테의 태도에 다시금 화가 치밀었으나, 침착하게 답했다.
“무슨 일이지?”
“그…… 별채의 손님께서 잠시 할 말이 있으시다고…….”
“……알겠다. 곧 가지.”
시종은 소리도 내지 않고 방을 나간 뒤 다시 문을 닫았다.
물 먹은 것처럼 축축한 침묵이 그들의 사방을 떠돌았다. 동시에 로렌조의 어깨가 묵직해졌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무거웠다.
그는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로렌조 공. 그대가 카라딘을 숨겨주고 있다는 게 뭐 대단한 약점이라도 쥔 거라고 착각하면 곤란해.”
“…….”
“약한 개새끼일수록 우위를 점하려고 세게 짖는다지만 나는 너와 같은 종족이 아니잖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촛불 하나 흔들리지 않는 방에서 단테의 그림자가 구불거렸다.
억지로 고개를 숙이게 된 로렌조는 그 그림자를 똑똑히 볼 수밖에 없었다.
“선을 넘어선 안 되지.”
“……시, 실례했습니다.”
그 섬뜩한 광경에, 결국 로렌조의 입에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사과가 튀어나왔다.
비로소 본인이 원하던 말이 나와서일까.
단테의 그림자는 다시 본래대로 돌아갔다.
“걱정하지 마. 나도 빨리 끝내고 싶은 일이야. 아쿠아 알타에 내가 개입하는 건 올해가 마지막이다.”
어깨를 무겁게 하던 위압감에서 벗어난 로렌조는 그제야 서늘한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단테는 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닥치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재미없는 꼴을 당할 거야.”
사람을 따라 하는 악마의 웃음이었다.
* * *
서걱!
솔로몬의 은은한 마력이 마력의 실을 끊어냈다.
그러자 감옥 안에 구금되어 있던 병사의 몸이 축 늘어졌다.
“정말 검은 독거미의 저주로군요. 직접 본 건 처음입니다.”
“황궁에서도 이 저주로 이용당한 사람이 있었어. 수배 중인 카라딘이 이베르타로 온 게 확실하네. ”
“……골치 아프게 됐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비엣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황이 심각한 건가요?”
“네에, 그게 참…… 이런 저주에 붙일 표현은 아니지만, 꽤 유용하달까. 들이는 마력에 비하면 꽤 효율이 좋은 마법이라서요.”
솔로몬이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얼마든지 비슷한 방식으로 검은 독거미의 저주에 걸린 병사가 방비 장치를 파괴하려 들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 저주를 막을 방법은 없는 걸까요?”
“방비 장치의 곁에 저주의 기운을 막아주는 성물을 놓아주면 될 테지만 현실적으론 불가능합니다. 성물을 모으는 데만 해도 시간이 걸릴 텐데…….”
사실상 불가능했다.
성물이 굴러다니는 돌조각도 아닌데 어떻게 이 빗길을 뚫고 구해올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수문을 방비하는 장치만 해도 최소 여섯이었다.
‘상대가 머리를 잘 썼군.’
그렇게 솔로몬조차도 혀를 차던 순간이었다.
“포기하긴 일러.”
힐데가르트의 낭랑한 목소리가 두 사람을 붙잡았다.
“막을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정말이세요?”
힐데가르트는 비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푸른 눈이 고요하게 빛났다.
“라비엣 양. 편지를 써 줄 테니 지금 당장 발이 빠른 기사를 아카락시아 영지로 보내세요. 아카락시아 영지의 이오타에게 제 이름을 대고 있는 대로 마석 아티팩트를 달라고 하세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성물이 없으면 임시로 쓸 수 있는 탈리스만(Talisman)이라도 만들어야지.”
솔로몬은 무심코 숨을 삼켰다.
“탈리스만이요?! 하지만 그걸 만드는 데 필요한 마석은 최상등품입니다. 그게 얼마짜린데요! 아니, 돈도 돈이지만 그런 걸 캐낼 시간이……!”
“내가 이동 게이트를 만든 사람이라는 걸 잊은 거야?”
힐데가르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제국에 있는 마석 광산의 절반이 내 거야. 내가 마석이 모자랄 것 같아?”
“그거 독점 아니에요?!”
“아, 방금 건 실수. 듣고 잊어버려.”
“농담할 때가 아니라고요! 아니, 농담이 아니면 더 심각한데?!”
솔로몬이 폴짝폴짝 뛰자, 라비엣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물었다.
“탈리스만? 그게 뭔가요?”
“간단히 말하면 마법 부적이에요. 아주 튼튼한 일회용 부적.”
힐데가르트는 점차 굵어지기 시작한 빗줄기를 곁눈질했다.
“하여간 공녀는 곧장 수도의 신전으로 가세요. 가서 로우라는 사제를 찾아 사정을 설명하시면, 아티팩트에 축복을 내려주실 겁니다. 그동안 저와 솔로몬이 다른 방비 장치에 결계를 걸어두겠어요. 시간 벌이 정도는 될 거예요.”
“저도 말입니까?”
“당연하지.”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솔로몬은 고서를 해독할 시간도 부족하다며 투덜거렸다.
“어쩔 수 없네요. 라비엣. 탈리스만은 곧장 힐데가르트 공녀님이 아니라, 저에게 전해주시겠습니까?”
“뭐?”
“아쿠아 알타는 최소 3일간 벌어질 텐데 매일 탈리스만을 하루하루 쓰고 버릴 순 없잖아요!”
솔로몬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최상등품 마석이 얼마나 비싼데요! 제가 개조할 겁니다! 듣기만 해도 아까워요! 내 돈이든, 남의 돈이든 돈은 소중한 겁니다!”
힐데가르트는 솔로몬이 의외로 재주가 좋은 수전노라고 생각했으나, 칭찬 대신 확인부터 했다.
“정말 개조할 수 있겠어?”
“맡겨두시죠. 가내수공업은 전문이라서요.”
솔로몬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자신 있는 티를 낸다면 믿어봐도 되겠지.
판단을 마친 힐데가르트가 라비엣 쪽으로 몸을 틀었다.
“알겠나요, 라비엣? 이건 시간 싸움이에요.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세지면 길이 끊길 수도 있어요.”
“할게요. 할 수 있어요.”
라비엣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괴롭다는 듯 거듭 말했다.
“뭐든, 제가 영지를 위해 움직일 수 있게 해주세요.”
“바로 그 자세예요.”
힐데가르트가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