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37)화 (137/166)

134화

“지금…… 날 협박하는 건가?”

“협상하는 거죠.”

고개를 치켜든 힐데가르트가 우아한 목소리로 단언했다.

“게이트 설치를 원한 건 랑케르트고 전 거기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한 것뿐입니다. 여기에 무슨 문제라도?”

협박이라니 당치도 않다는 소리였으나, 마우제네의 얼굴에 더더욱 어이없다는 표정이 번졌다.

“공녀가 이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인 줄은 몰랐군.”

“욕심이요?”

힐데가르트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러자 마우제네는 보란 듯이 그녀의 목걸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랑케르트의 보석 광산이 그렇게 탐났다면 일찍부터 요구하지 그랬나?”

“…….”

“서부의 가문들이 초조해질 이때까지 기다렸던 건가? 하지만 공녀, 너무 과한 요구는 협상을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법이야. 노골적인 보석 욕심…….”

“제 요구를 정말 표면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시네요. 이 사태의 본질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신 건가요?”

힐데가르트는 감정이 배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공작께선, 제가 단순히 보석을 원해서 이 대화에 응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아니라고 할 셈인가?”

“하.”

기어코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마른 웃음이 터졌다.

청아한 눈동자가 허공을 향한 것도 잠시.

그녀가 다시 마우제네를 쏘아보는 그 순간, 마우제네는 상대의 눈이 푸르게 타오르는 불꽃과 다름없음을 직감했다.

“뻔뻔한 얼굴로 시치미를 떼는 실력이 자매분만큼이나 뛰어나시군요.”

“입을 조심하게! 로바르네는……!”

“6년 전, 아카락시아 지주 상단을 무너뜨리기 위해 사람을 보냈던 일. 기억하십니까?”

노성을 내지르던 마우제네의 목구멍이 솜으로 쑤신 것처럼 콱 막혔다.

마우제네는 당장에라도 저를 집어삼킬 것 같은 시선을 피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가.”

“기억나지 않으시면 설명해 드리죠. 캄파넬 땅을 노리고. 레이븐이라는 남자를 시켜 베가 상단으로 브린힐드 상단을 압박했던 일 말입니다.”

“난, 모르는 일…….”

“랑케르트에 흑마법사가 드나든 전적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제가 마법사인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으신가요?”

마우제네의 혀가 석고처럼 굳었다.

실종된 아버지와 여동생이 흑마법사를 끌어들여서 저주를 행한 사건은, 그녀로서는 잊고 싶은 기억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일을 힐데가르트가 들추어내고 있었다.

“공녀. 그때의 일은…….”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는 세력을 온존하는 게 자연의 섭리라고 하면, 그때의 랑케르트는 이미 충분히 강력한 가문이었죠.”

“…….”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아카락시아를 압박하셨습니까?”

어떻게든 상대방을 구슬리려 하던 마우제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었다.

힐데가르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비수처럼 날카롭고 서늘했다.

“좀 전에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한 가문이 몰락하면 그 여파가 다른 곳에도 미친다고. 그걸 알고 있는 가문에서 왜 베가 상단을 통해 아카락시아를 벼랑 끝까지 내몰고자 하셨죠?”

“그건…….”

당황하는 상대를 보며 힐데가르트는 차분히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마우제네는 몇 번 입술을 떼었다가 입을 다물기를 반복하더니,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한참 뒤, 마우제네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때의 일은…… 내가 작위를 잇지 않았을 때의 일이야. 선대께서 행한 일이라면 나로서는…….”

“하실 말씀은 그게 다인가요?”

“나로서는 대답할 수 없는 일이네.”

“오브론의 공녀와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 했으니, 그 책임을 선대도 아닌 자기가 지는 게 두려워서 말이죠?”

“…….”

“가주로서 훌륭하신 자세로군요.”

힐데가르트는 항상 생각했다.

80년 전 레온하르트의 선택은 누가 뭐라 해도 어리석었다.

그는 랑케르트에게 광산 열 개를 넘겨선 안 됐다. 상실의 아픔으로 눈이 먼 감정적인 선택이요, 공작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따라서 아카락시아의 가세가 기운 것은 선대를 원망할 일이다.

다른 가문이 방임하는 태도를 선택한 건 속상한 일이기는 하나, 왜 간섭하지 않았냐며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사태를 방관한 이베르타와 몬테를로의 태도는 이해할 수 있다.

아카락시아와 쌍벽을 이루던 오브론도 마찬가지.

하지만 랑케르트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가혹했단 말인가?

핍박하면 웅크리며 초라한 처지를 곱씹던 공작가의 대들보마저 기어이 뽑아내려 했던 건 누구인가?

그들은 눈먼 레온하르트의 눈물을 기꺼이 갈취했다.

랑케르트 가문은 오로지 그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아카락시아 공작가를 짓밟았다.

남은 건 조각나고, 깨지고 흩어진 끝에 기울어진 초라한 가문. 연명하듯 숨 쉬는 아이 셋과 하녀 한 명뿐이었다.

“랑케르트는 그간 가문의 이익을 위해 아카락시아에 위해를 가했습니다. 그건 방관이나 견제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죠.”

“공녀.”

“그런데 이젠 조카를 구슬려 혼인을 종용하고, 국익을 운운하며 아카락시아의 이해를 바라다니.”

“…….”

“뻔뻔함에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공작 각하.”

마우제네는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진한 비웃음이 머무르는 것을 보며, 칼란도의 잘못으로 모든 허물을 밀어버린다 해도 이 일이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게다가 랑케르트에게는 수습할 시간이 6년이나 있었습니다.”

마우제네가 새로운 랑케르트를 만들어 갈 기회는 분명히 있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마우제네가 한 번이라도 진심을 담아 사과한다면, 힐데가르트는 이 원망을 덮을 생각이었다.

드롯셀마이어 제국은 제자가 다스리는 땅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땅이다.

서부와 타지방 간의 격차는 장기적으로는 아카락시아 공작가에게도 부담으로 다가오리라.

원망보다도 어려운 것이 용서일지라도, 랑케르트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한다면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던 힐데가르트였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 꼴이다.

“협상 같지도 않은 협상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요.”

“공녀!”

“다음 기회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니 보석 광산 몇 개로 조건을 내걸 일이 아니었네요.”

힐데가르트는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제가 살아 있는 한 서부에 게이트가 생기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말했던 조건을 다시 검토해 볼 테니 시간을……!”

“필요 없습니다.”

마우제네는 사색이 된 얼굴로 그녀를 붙잡았으나, 힐데가르트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어리석은 선택으로 가세가 기울어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고통.

언젠가의 레온하르트가 겪었을 감정을, 마우제네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는 건 이토록 쉬운 일이었다.

망연자실한 상대를 내버려 두고 발코니를 나서는 힐데가르트의 걸음에는 미련이 없었다.

* * *

카라딘이 연회장을 나선 이유는 따지고 보면 그가 제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힐데가르트가 마우제네와 자리를 뜬 직후, 카라딘은 공개적으로 노바를 견책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한 키스케가 한발 빨랐다.

“목소리 낮춰. 데뷔탕트 무도회를 엉망으로 만들 셈이야?”

“하지만 저놈이 먼저……!”

“황족으로서 처신해, 제발. ……나가서 머리 좀 식히고 돌아오도록.”

노바에게 붙잡혔던 팔보다도, 키스케의 그 한마디에 수치가 일었다.

설상가상으로, 부채 너머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도 있었다.

두 달 전에는 혼담이 오갔으나 지금은 견원지간이나 다름없어진 잉그렛 콘스탄체 후작 영애였다.

카라딘은 가슴 안에서 불길처럼 올라오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걸어갔다.

분노 앞에서는 처신은커녕 이성적인 판단조차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어머니가…… 어머니만 계셨다면, 저런 것들은 전부……!”

모조리 쫓아냈을 것이다. 웃으며 오늘 밤을 마칠 수 없도록, 아프게 뺨을 쳐줬을 텐데.

그가 무작정 연회장 바깥으로 나선 뒤 얼마나 걸었을까.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마법사인 제가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을지.’

인적 없는 곳에서 카라딘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손이 허리춤에 매달아두었던 녹색 휘슬로 향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이이익-!

어두운 나무 그림자 사이로 새들이 우짖는 것처럼 휘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로 올까?’

휘슬을 분 카라딘 본인이 혼란스러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뵙는군요.”

마법사는 어둠을 등에 짊어진 채 솟아나듯 모습을 드러냈다.

“연회가 한창인데, 들어가서 즐기지는 않으시는지요?”

“나를 도와줄 수 있다고 했지?”

카라딘은 그의 인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고 제 할 말부터 꺼냈다.

“정확히 어떻게 도울 수 있지?”

“으음, 어떻게든 도울 수 있다고 해두겠습니다.”

흡사 검은색과 다름없는 보라색 머리카락이다. 그가 제 머리카락을 왼쪽으로 쓸어넘기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힘. 그것이 마법의 위대함이니까요.”

“…….”

카라딘의 눈동자 속에 어두운 시샘이 머물렀다.

황태자인 키스케가 마법을 배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카라딘은 마법이 싫었다.

그러나 가끔…… 아카락시아 공작령에서 마법을 배운 게 형님이 아닌 저였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버리기 어려웠다.

그는 마법이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배우지 못한 것을 화려하게 구사하는 키스케가 부러웠다.

“……망신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아니, 한 사람이 아니야. 아주 많아. 전부 다…….”

낮았던 목소리가 점차 흥분으로 거칠어졌다.

“날 비웃는 놈들은 모조리 다! 내일 아침의 해를 보지 않기를 원할 만큼 강한 마법을 원해. 그것도 가능해?”

“오호.”

상대의 붉은 눈이 저를 분석하는 것도 모르고, 카라딘은 이름도 모르는 마법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마침 전하께서 딱 만족하실 만한 마법이 있답니다.”

“정말?”

“네, 오늘은 전하와 저의 우정이 시작되는 기념비적인 날이니, 마법사 단테가 기꺼이 힘을 빌려드겠습니다.”

카라딘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신, 저의 사소한 부탁도 하나만 들어주시겠어요?”

“사소한 부탁? 그게 뭔데?”

단테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별건 아닙니다. 전하께서 가져다주셨으면 하는 물건이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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