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키스케.”
“네 활약으로, 아카락시아 가문은 여기까지 왔어.”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이동 게이트라는 수단으로 불과 몇 년 만에 단번에 급부상했다.
힐데가르트 본인 또한 미술계의 천재 화가를 발굴해 낸 유력가이자 황태자에게 직접 마법을 가르친 천재 마법사였다.
“그리고 너는 열여덟이, 나는 스무 살이 되었지.”
“…….”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할게, 힐데.”
필요하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이야기하리라.
“난 너를 여전히 좋아해.”
“…….”
“너를 진심으로, 깊이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수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이 아닌 가문을 위해 썼다.
그렇기에 키스케는 진심으로 바랐다.
앞으로는 레온하르트 공작이나 가문을 위해서가 아닌, 그녀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하기를.
그 선택지에 자신이 들어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네가 생각하는 미래 속에 내가 서 있고 싶어. 지금처럼 네 손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
힐데가르트는 문득, 눈앞의 상대가 저보다 훨씬 더 성숙하게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이야기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못 참겠어서.”
“제자의 인내심이 아직 모자라 보이네?”
“네 마음은 어떤지 물어도 돼?”
“어쩌고 자시고…….”
힐데가르트는 살짝 난처한 듯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동자만큼이나 푸른 목걸이가 빛을 반사했다.
“잘 모르겠어.”
“…….”
“키스케. 네가 준 이 목걸이, 사실 거절할 생각이었어.”
“…….”
“축하 선물치고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 안 했니?”
힐데가르트의 스텝이 키스케에게서 한 걸음 멀어졌다. 그러자 키스케는 능숙하게 그녀를 뒤따르며 반 바퀴 턴했다.
“네가 줬다는 걸 알면 무슨 말을 했겠어.”
“별생각 없을걸. 넌 내 목숨을 구했잖아.”
키스케가 가볍게 반박했다.
“목숨을 구해준 스승님의 데뷔탕트인데,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너 가만 보니 자기 편할 때 제자라는 타이틀을 써먹는구나?”
“들켰군. 너한테 배운 거라고 해둘게.”
키스케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돌았다. 힐데가르트는 저도 모르게 따라서 픽 웃어버렸다.
“어쨌든, 네 마음은 고맙지만 받아들이긴 어려워. 내 눈에는 아직도 네가 어릴 때의 키스케로 보이는걸.”
거짓말이다.
지금의 키스케는 어릴 적의 그와 완전히 똑같은 사람으로 취급할 수 없을 만큼 자라 있었다.
키스케는 힐데가르트가 감히 상상조차 못 해볼 만큼 미남으로 자랐고, 한결 진지하고 여유 있는 남자가 되었다.
하지만 달라진 그를 곧장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아직 힐데가르트는 ‘진짜 힐데가르트’의 행방을 알아내지 못했다.
레온하르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아.’
키스케가 레온하르트처럼, 남겨진 사람의 고통을 맛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녀는 마음을 감추며 이를 사리물었다.
“어릴 때라고 해봤자 열네 살 때잖아.”
“열네 살이나 스무 살이나. 나한테는 그게 그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내 마음 자체는 변한 게 없어.”
제법 분명하게 거절당했음에도 키스케는 침착했다.
“네가 날 거절하는 이유는…… 정말로 그게 다야?”
“…….”
“아직도 내가 어린이 키스케로 보이니까 안 된다, 그 이유 하나뿐인가?”
“글쎄.”
힐데가르트는 이 몸에 대해 무엇도 장담할 수 없었다.
만약 ‘진짜’ 힐데가르트가 이 몸을 되찾게 된다면, 모두에게 큰 혼란을 안겨주리라.
그중 가장 큰 혼란을 겪을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 사람.
키스케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힐데가르트는 일말의 가능성을 모두 꾹꾹 짓밟았다.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을 하고, 다정한 미래를 꿈꾸는 게 나한테도 가능한 일일까?”
“…….”
“잘 모르겠어. 지금도 수도를 떠돌고 있을 플람을 생각하면, 누군가랑 연애만 하기엔 내 마음이 무겁거든.”
키스케는 생각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데뷔탕트 드레스는 저토록 가볍게 팔랑이건만.
정작 옷을 입은 그녀의 발밑, 그림자 속에는 힐데가르트의 마음을 무겁게만 하는 짐뿐이라고.
그래서일까?
키스케는 그녀에게 짐을 더 얹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함께 고민하고, 마음껏 투정 부리고, 마음이 외로워질 때면 단단히 곁에 붙들어주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예전의 그녀가 저에게 그렇게 해주었듯이.
너스레를 떨며 사소한 말이나 행동으로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니 이 사랑은 너에게 배운 마음이요, 네가 없었다면 애초에 가지지 못했을 마음이리라.
키스케는 그녀의 단호한 거절에서 비롯된 서운함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곤 아무도 보지 못하게 마음 한구석에 처박은 뒤, 웃으며 물었다.
“너, 혹시 플람을 연애 상대로 좋아하거나 신경 쓰고 있었던 거야?”
“사람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힐데가르트의 높은 구두 끝이 키스케의 발을 꾹 밟았다.
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에 키스케의 안색이 파랗게 질린 것도 잠시.
팔을 뻗은 그가 힐데가르트의 허리를 안아 든 채 반 바퀴 턴 했다.
그 아름다운 광경에, 지켜보던 이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짧은 순간.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눈에 스며든 다정한 웃음에 목이 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보 같은 제자다.
레온하르트와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 사람에게, 우물 바닥까지 긁은 애정을 이렇게 퍼붓는 사람이라니.
“……연애 상대라니. 당치도 않아.”
힐데가르트는 스텝을 다시 밟으며 분명히 말했다.
“플람은 옛날의 너랑 똑같아. 내가 돌봐주기 위해 직접 거둔 상대. 그뿐이야.”
“그럼…… 그런 고민이 사라지면, 내 마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줄래?”
“뭐?”
키스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
첫눈이 내렸던 겨울날, 그녀의 손을 잡았던 날처럼.
“네게 여러 가지 사연이 있다는 건 나도 알아. 특히 너라면 ‘어릴 때부터 봐온 녀석이라 남자로 안 보인다’ 그런 말을 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어.”
“……알면 포기했어야지.”
“예상했지만 어떡하겠어? 네가 좋은걸.”
키스케는 뻔뻔하게 대답하는 것도 모자라 한마디를 덧붙였다.
“말했잖아. 어떤 이유 하나 때문에 널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금방 거둘 만큼 가볍지 않다고.”
“…….”
“그러니까 기다릴게. 네 마음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
키스케의 말은 너무나도 시원스러워서, 그가 예전의 작고 틱틱대던 소년이 아니라는 걸 새삼 실감할 따름이었다.
“키스케.”
“스무 살의 나랑은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잖아. 나한테도 기회는 줘야지.”
그는 더욱 단호한 거절의 말이 날아오기 전에 선수를 쳤다.
“그런 의미로 나와 내기를 하자.”
“내기?”
“난 황태자니까 언젠가는 마땅한 상대를 맞이해서 후계를 이어가야 할 의무가 있어.”
“알긴 아는구나?”
마침 그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는지, 힐데가르트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지금이야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황태자비를 들이는 걸 피하고 있는 키스케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일 내가 네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한다면 그땐…….”
“그땐?”
“뺨에 입 맞춰줘.”
“뭐?”
“입술에 해달라고 하면 안 해줄 거잖아.”
콰직!
힐데가르트는 대답보다도 빠르게 키스케의 발끝을 세게 짓밟았다.
고개를 떨군 키스케가 부들부들 떨었다.
“미안. 너무 당연하고 기가 찬 말을 하길래 그만 밟아버렸어.”
“아프잖아!”
“정신이 좀 들어?”
“……오늘의 너는 아름답고, 잔인하네.”
키스케는 아주 작은 불만을 입에 담았다.
고개를 든 그의 눈동자는 작열하는 태양처럼 붉고 강렬했다.
“대신 내기에서 진다면, 더 이상 널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게.”
“마음을 정리하겠다는 뜻이지?”
“응.”
왈츠는 서서히 마지막 악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기간은 언제까지로 할 건데?”
“네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어때?”
“좋아.”
2년.
열여덟인 힐데가르트가 키스케와 같은 나이가 될 때까지라면 딱 적절한 시간이다.
힐데가르트의 승낙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귓가로 바짝 고개 숙인 키스케가 속삭였다.
“두고 봐. 이 내기는 내가 꼭 이길 거야.”
“글쎄. 네가 이긴다면 뺨이 아니라 입술에 키스라도 해줄게.”
“그건 기대되는걸.”
거절할 때는 단호하면서, 사람을 부채질하는 건 반칙 아닌가?
왈츠가 끝났다.
키스케와 힐데가르트는 서로를 향해 우아한 인사를 남긴 다음, 우레와 같은 박수를 입은 채 뒤로 물러났다.
파트너와 추는 첫 곡이 끝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이렇게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왈츠를 춘 건 오랜만이다. 힐데가르트는 상기된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렸다.
‘벌써 쉬고 싶어지네. 무도회가 끝나려면 멀었는데.’
그간의 경험상, 서너 곡 정도는 더 추고 나서야 무도회에서 슬그머니 몸을 뺄 수 있으리라.
‘키스케 녀석……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파트너를 신청한 건 아니겠지?’
힐데가르트는 순식간에 인파 속에 파묻힌 키스케를 빤히 보았다.
‘후우, 일단 뭐라도 마셔야겠어.’
그녀가 자리를 벗어나려 하던 때였다.
“잠깐 실례하지.”
예상 밖의 인물이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아끌었다.
“카라딘 전하.”
“생각보다 춤을 잘 추던데.”
그의 허리춤에 매달아둔 녹색 휘슬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