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하지만 돌아온 로빈의 말은 몹시 상식적인 반박이었다.
“하지만 데뷔탕트를 축하하는 선물이잖아요. 내일 차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키스케는 내 약혼자가 아니야. 선물이라 해도 이건 과하잖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냥 예쁘다고 생각하겠죠. 누가 선물해 준 건지는 말하기 전까지 모르잖아요?”
“으…….”
그건 그랬다.
로빈이 허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리고 오해 좀 받으면 어때요. 제일 예쁜 우리 아가씨, 이렇게 아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요?”
“로빈. 칭찬 기쁘지만, 너무 과해.”
“진짜 그렇다고요!”
힐데가르트는 로빈의 넉살 좋은 말에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논리로 치면 사실 레온 오빠가…… 레인보우 글로우가 훨씬 더 값진 선물인걸.’
이런 선물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키스케에게는 고맙다.
하지만 그걸 레온하르트와 비교할 수 있을까?
힐데가르트는 심란한 표정으로 키스케의 선물을 내려다보았다.
“아가씨께 계획이 있다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가 키스케 전하라면…… 아가씨를 위해 고른 선물을 차보지도 않고 거절하면, 크게 실망할 거예요.”
“…….”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린다는 걸 눈치챈 로빈이 한 번 더 강하게 주장했다.
“레인보우 글로우가 필요하시면 제가 따로 챙길게요!”
“……하아.”
로빈이 이렇게까지 꿋꿋하게 나선 적이 있던가?
결국 복잡한 얼굴을 하던 힐데가르트는 백기를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 대신 이번만이다?”
사실 로빈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키스케의 실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나도 마음이 많이 약해졌다니까. 어차피 돌려줄 타이밍도 놓쳤으니 어쩔 수 없지.’
힐데가르트는 제 눈동자와 똑같은 색을 지닌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자, 그렇게 정해졌으면 얼른 주무세요!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알겠어, 알겠으니까 재촉하지 마.”
로빈이 목걸이가 든 상자를 가지고 가자, 힐데가르트는 파자마로 갈아입은 뒤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갔다.
“……어휴.”
데뷔탕트가 코앞이라 그럴까, 유독 싱숭생숭한 마음이다. 힐데가르트는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았다.
키스케의 선물은 고맙지만 그걸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난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는데.’
오래전 레온하르트가 저에게 레인보우 글로우를 선물로 주었을 때와 지금의 마음이 비슷했다.
만약 키스케가 아직도 저에게 진심이라면.
그 어릴 적과 하나도 다름없이 여태껏 마음을 간직해 왔다면.
그럼 이제부터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키스케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또 황태자인 그에게 다른 사람이 생길 수도 있기에 밀어두었던 마음을 이제 마주해야 할까?
“마주 보는 게 무서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그냥…….”
언젠가는 이 몸으로, 진짜 힐데가르트가 다시 돌아오는 게 아닐까?
그런 한 줄기의 불안함이 가슴에 바람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 * *
유례없이 정신없는 아침이었다.
“장미 향유에 몸을 절인 것 같잖아!”
“이렇게 준비해도 저녁 무도회 때는 향이 빠질 거에요.”
“그래도 이건 심하잖아! 너무 오랫동안 목욕물에 들어가 있던 거 아냐?”
“자, 입씨름할 시간 없어요! 빗질은 나중에 하고 우선 마사지부터 해요!”
“로빈!”
피부를 닦고 또 닦으니 뽀득뽀득 소리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오늘만큼은 비명을 지르더라도 로빈이 빗질을 멈추지 않았기에, 힐데가르트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하루 종일 끌려다녔다.
몇 시간 뒤, 힐데가르트는 거울을 뒤로한 채, 저택의 1층 로비로 내려왔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미하일과 레디스는 똑같이 입을 벌렸다.
“그, 어때? 내가 봐도 좀 괜찮은 것 같은데…….”
“…….”
“저기요?”
“힐데…….”
파르르 떨리던 미하일의 눈가가 점차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울어?!”
“정말 예쁘다…… 어떡해…… 우리 애 다 컸나 봐…….”
누가 누구더러 ‘우리 애’라고 하는 거야?
힐데가르트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미하일은 감동한 나머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레디스는 그런 형을 말리지 않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정말 예뻐. 오늘은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네.”
“레디스 오빠가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로빈이 고생한 보람이 있네.”
평소라면 옷이 날개라는 말을 했을 레디스건만.
“두 사람도 잘 차려입었네. 합격!”
“너랑 비교하면 들러리지. 그럼 가실까요, 공주님?”
공주님 취급까진 바라지도 않았다며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레디스의 손을 잡았다.
허겁지겁 눈물을 닦으며 미하일이 뒤따른 지 한 시간 뒤.
황궁에 도착한 힐데가르트가 마차에서 내리자 주변 반응은 미하일보다 과격했으면 과격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저기 좀 보세요! 아카락시아 공작 남매가…….”
“같이 예쁘게 입었네요. 오늘이 막내 아가씨의 데뷔탕트라고 했죠?”
“엄마…… 저렇게 예쁜 사람은 처음 봐요.”
“그러게, 우아한 천사 같구나.”
힐데가르트의 새하얀 드레스는 프릴과 레이스 끄트머리를 금색으로 마무리하고, 색색의 보석을 달았다. 옷이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운 드레스였다.
꽃보다도 더 예쁘게 핀 그녀가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한차례 폭풍이라도 몰아친 듯 양, 사람들이 그녀가 지나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힐데가르트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 중에서는 카라딘도 있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힐데가르트가 로빈을 데리고 투왈렛룸으로 가려던 때였다.
“힐데.”
층계참에서 내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키스케였다.
머리를 말끔하게 뒤로 넘기고, 목에는 여전히 붉은색 루프타이를 단 황태자는 검은색과 금색이 뒤섞인 연미복이 아주 잘 어울렸다.
“키스케.”
“…….”
“목걸이, 놀라긴 했지만 잘 받았어. 오늘은…… 저기요? 정신 차려!”
“잠깐만.”
키스케가 황급히 얼굴을 가렸다.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가 변명하듯 덧붙였다.
“……이쪽 보지 말아봐. 이건 예상 못 해서…….”
“뭘 예상 못 했다는 거야?”
“……이렇게 예쁘게 꾸미고 왔을 줄은 몰랐단 말이야.”
“그걸 불만이라고 말하는 거야?”
“불만 아니라서 말한 거야.”
힐데가르트는 그만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서로를 빤히 보았다.
헛기침한 키스케가 먼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약속대로 오늘은 내가 에스코트해도 될까?”
“물론이지. 잘 부탁해.”
힐데가르트가 그의 손을 잡았다.
미하일은 뒤늦게 제 여동생의 데뷔탕트 파트너가 너무 거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황태자는 지금껏 제 신분과 위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가벼운 인사가 아니라면 따로 여성과 친분을 나누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건만.
미하일이 턱이 빠지게 입을 벌렸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말도 안 돼…… 지금 제가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죠?”
“키스케 전하가 공녀의 파트너였다고요?”
아니나 다를까 주변의 반응이 파도처럼 몰려왔다.
“아카락시아 공녀가 마법을 가르친 스승이라면서요. 그래서가 아닐까요?”
“그럼 축하 인사나 꽃다발로 충분하잖아요! 방금 그 표정 보셨어요?”
흥분으로 가득 찬 목소리가 잦아들기 무섭게 미하일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한마디라도 말을 붙여보려 했던 상대가 힐데가르트에게서 미하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미하일 공작님! 안녕하세요!”
“저번에 인사드렸는데, 절 기억하시나요?”
“무, 물론이죠. 다시 만나 반갑습니다. 루미 양.”
“저는요? 저도 기억하세요?”
미하일은 제 곁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쉽사리 뿌리치지 못했다.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그 광경을 지켜본 뒤 자리를 떴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2년 전이었죠? 몰라보게 아름다워졌군요, 힐데가르트 공녀.”
“감사합니다, 대공비 전하.”
“앞으로도 그 총명함을 잃지 않는 공녀가 되기를 바라요.”
황궁의 안주인이 오랫동안 부재중이기에 어린 소녀들에게 덕담을 건네는 역할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오브론 대공비가 맡게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옅은 웃음과 함께 드레스 끄트머리를 잡아 올리며 인사했다.
데뷔탕트 행사가 끝난 뒤.
힐데가르트는 조용히 노바와 함께 자리를 떴다.
황제는 데뷔탕트 무도회에는 참석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렇게 뵈니 예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우십니다, 스승님.”
“농담 그만해. 이 나이 되어서 다시 데뷔탕트를 치르게 될 줄은 몰랐어.”
힐데가르트는 은밀하게 안내받은 내실에서 오랜만에 막시밀리언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저도 할 수만 있으면 18살 때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젊은 건 좋은 거죠.”
“막스. 너 진짜 나이 먹으니까 뻔뻔해지는 건 손자랑 똑같구나?”
“키스케가 저를 닮은 겁니다.”
막시밀리언은 킬킬 웃었다.
이토록 쌩쌩한 제자를 보는 건 기쁜 일이다. 팔짱을 낀 힐데가르트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축하드립니다, 스승님.”
“축하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만난 김에 한 가지 확인할게. 네가 이렇게 오래 사는 건, 역시 플람과 관계가 있는 거지?”
“…….”
“그 아이가 너에게 엘릭서를 주었니?”
힐데가르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언제나처럼 여유로웠고, 태연했으며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닌 채였다.
“……네. 진작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을 만나셨군요.”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다.”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죽었을 스승이 돌아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플람과 믿지 못한 막시밀리언.
자신을 광인 취급하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눈치챈 플람이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일방적으로 엘릭서를 맡긴 뒤 또다시 사라져 버렸을 뿐.
“키스케가 오늘을 많이 기다렸습니다. 즐겁게 보내고 오시지요.”
“모레쯤 황궁에 방문할 테니 그때 이야기하자.”
“예.”
힐데가르트는 막시밀리언과 짧은 이야기를 마친 뒤, 흡사 연기를 펼치는 배우처럼 우아한 인사를 남기고 방을 나섰다.
노바와 함께 기다리고 있던 키스케는 곧장 그녀의 곁으로 붙었다.
“힐데, 이야기는 끝난 거야?”
“응.”
“그럼 가자.”
“…….”
키스케는 진심으로 오늘을 기다렸구나.
제 손을 잡고 앞장서는 상대의 설렘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읽혔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은 아니잖아.’
그에게 손을 허락한 힐데가르트는 제 뺨까지 함께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나타난 황태자가 파트너의 손을 잡고 홀의 중앙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자, 주변에서 자연스레 시선이 따라 붙었다.
음악 소리가 두 사람의 등을 밀어주듯 울려 퍼졌다.
사교댄스 스텝은 간단히 시작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딛는 다이아몬드 스텝.
그리고 상대와 시선을 마주할 것.
오늘을 기대했다는 막시밀리언의 말대로, 키스케는 그녀만큼이나 근사하게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머리를 뒤로 넘기니 분위기가 몰라보게 달라졌네.’
여전히 긴 속눈썹이 가볍게 떨린다.
맞닿은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 소리 또한 선명하다.
그렇게 세 바퀴째 턴을 마친 때였다.
“힐데. 네가 언젠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응?”
“언젠가는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돌이켜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웃으면서 말할 날이 올 거라고.”
“…….”
키스케의 눈동자에 그녀가 한 아름 담겼다.
“네 말이 맞았어. 나는 그 날이 지금이라고 생각해.”
“…….”
있잖아, 힐데.
지금의 내게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두렵거나 겁나는 일이 아니라…….
“엄청나게 설레고, 기대되는 일이라는 걸 느껴.”
느리게 흘러가는 선율 속.
키스케의 속삭이는 목소리는 놀라우리만치 선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