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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32)화 (132/166)

129화

얼마 후 트레이를 끌고 온 시종이 차를 내려놓았다.

한동안 자리를 지킨 노바는 키스케의 뾰족한 시선을 한 몸에 받고 난 뒤에야 물러났다.

“키스케, 노바가 오기 전에 무슨 말 하려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넌 꼭 그렇게 얼버무리더라.”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누구보다도 아쉬운 사람은 키스케 본인이었으나, 그는 입을 꾹 다무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온실 속 휴게 공간에 마주 보고 앉아 편하게 차를 마셨다.

“힐데. 안 그래도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노바가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아 있었던 키스케였다.

“혹시 데뷔탕트 파트너는 구했어?”

찻잔을 든 힐데가르트의 손이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키스케의 시선이 좀 전보다 훨씬 더 뜨겁게 느껴지는 건 제 착각일까?

크게 신경 쓴 적은 없지만 설마…….

‘혹시 이 녀석은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 걸까.’

힐데가르트는 아연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대답이 늦어지자 키스케의 표정이 갈수록 굳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힐데? 미리 약속해 둔 사람이 있는 거야?”

“아니야. 약속은 무슨.”

힐데가르트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커지는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런 사람 없어. 구하는 걸 잊고 있었거든.”

힐데가르트는 차를 목으로 한 모금 넘기며 말했다.

“아예 잊고 있었단 말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그럼 나한테도 아직 기회가 있는 거네?”

“……뭐?”

힐데가르트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녀를 보고 있었던 키스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한테는 천만다행으로 잘된 일이네.”

“키스케!”

그녀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남의 불행을 재미 삼아 놀리지 말라고 소리치려 했던 힐데가르트의 앞으로 키스케가 다가왔다.

“힐데가르트 공녀님. 제가 당신의 생에 한 번뿐인 데뷔탕트 파트너가 되는걸.”

“…….”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힐데가르트는 복잡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키스케가 보낸 편지들이 눈처럼 쌓이던 날들 속에서.

어떤 이유 하나 때문에 너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던 키스케를 떠올릴 때면, 떼놓을 수 없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만약 다시 만날 때까지 키스케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로 키스케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그가 보낸 편지와 함께 뚜껑을 닫아둔 상자 속 답이 여기에 있었다.

반쯤 무릎을 꿇고 다가와 손을 내미는 키스케가 조르듯 물었다.

“나는 안 돼?”

“…….”

“네 제자니까 죽어도 안 된다…… 그런 건가?”

“키스케. 너…….”

눈이 가늘어진 힐데가르트가 그를 흘겨보았지만, 키스케는 되레 뻔뻔하게 제 손이 비어 있다는 걸 티 낼 뿐이었다.

“……쪼그맸던 게 못 보는 사이에 넉살만 늘어 가지곤.”

결국,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못내 고개를 끄덕인 힐데가르트가 그의 손을 잡았다.

어차피 데뷔탕트의 파트너는 평생 한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이번만이다.”

어쩐지 뺨이 홧홧했다.

차를 마신 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부탁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옆에 있는 휴게실은 키스케가 마법을 연습하던 또 다른 공간이었다.

바닥에는 초크로 써둔 복잡한 수식이 있었는데, 키스케는 도저히 풀리지 않아서 내버려 두었다고 투덜거렸다.

“조합식이 독특하네? 결계 마법도 연습하고 있었던 거야?”

“맞아. 강제로 결계를 깨는 사람이 있으면 화염으로 공격하는 마법을 연구했어.”

“흐음…… 내가 좀 봐도 될까?”

“응.”

얼마 후, 힐데가르트는 수식의 잘못된 점을 고쳐준 뒤 소파에 앉았다.

키스케가 진지한 얼굴로 실험을 반복하는 동안, 그녀는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데 집중했다.

바깥보다 훨씬 더 따뜻한 공간이라 그런지 잠이 솔솔 쏟아졌다.

“힐데?”

“아, 미안. 잠깐 졸았어.”

“피곤하면 조금 자도 돼.”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힐데가르트는 삐져나오려는 하품을 손으로 가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럼 잠깐만 눈 붙여도 될까?”

“그렇게 해. 한 시간 뒤에 깨워 줄게.”

얼마 안 가, 새근거리는 숨소리와 함께 힐데가르트가 단잠에 빠졌다.

결계 마법을 연습하던 키스케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분명 그녀가 고쳐준 수식은 틀린 게 하나도 없는데, 등 뒤에 있는 그녀를 신경 쓰느라 실수만 연발하고 있었다.

‘심지어 잠들어서 날 보고 있지도 않은데.’

결국 마법을 포기하고 뒤돌아선 키스케가 소파에 앉아 잠든 힐데가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지금 내 옆에 있는데, 나는 왜 네가 계속 보고 싶은 걸까.

이렇게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 차서 언젠간 터져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울 정도야.

“…….”

키스케는 그녀가 깨지 않도록 일부러 제 숨소리를 죽였다.

그가 잠든 힐데가르트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겨우 여기까지 왔어.’

입술까지는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그러나 이 한 뼘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어쩌면 영원히 좁혀지지 않을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카라딘의 청혼 소식을 들었을 때, 키스케는 진심으로 그를 후려치고 싶었다.

힐데가르트와 재회하여, 그녀가 저를 놀릴 때마다 가슴이 덜컥거렸다.

이 마음이 사랑이 아닐 리 없다고 다시금 실감하고 만다.

키스케에게 사람이란 장담할 수 없는 존재였다.

편지를 쓰며 마음을 참아왔던 시간 동안, 다시 만난 그녀가 로바르네 숙모처럼 변해버릴까 봐 불안할 때도 있었다.

그녀가 말했던 것처럼, 제 마음이 변하는 날이 올까 싶었다.

하지만…….

‘안 와, 그런 날은.’

이제는 알겠다.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으리라.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같은 사람에게 마음이 반응한다. 매일 이 사랑을 거울처럼 꺼내 보게 만드는 힐데가르트였다.

혈관 안쪽까지 타들어 가듯 애틋함이 번진다.

키스케는 한 뼘밖에 남지 않은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입술 대신 그녀의 살랑이는 은발 끄트머리에 키스한 뒤 멀어졌다.

“잘 자, 사랑하는 힐데가르트.”

부디 네가 조금만 더 깊이 잠들기를.

이토록 애타게 바라보아도 결코 깨지 못하도록.

* * *

키스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가 힐데가르트를 깨운 건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이 더 지났을 때였다.

“너무 잘 자니까 깨우기 그랬어.”

“거짓말하지 마! 그럼 왜 눈 떴을 때 보고만 있었던 거야?”

“깨울까 말까 고민하느라 30분이 지났다니깐?”

힐데가르트에게 찰싹, 하고 팔을 맞으면서도 키스케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데려다주지 않아도 괜찮겠어?”

“당연하지. 오늘은 고마웠어. 난 가서 쉴 테니까 너도 들어가.”

힐데가르트가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자, 키스케는 잠시 아쉬운 얼굴을 했으나 깨끗하게 물러났다.

“조심해서 들어가.”

곧 마차가 출발하자, 힐데가르트는 커다랗게 기지개를 켰다.

“후우. 잠 좀 자고 일어나니 정신이 드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집도 아닌 황궁인데 긴장이 확 풀려버렸다.

‘키스케 녀석, 훨씬 더 짓궂어진 것 같은데.’

어느새 멀어지는 황궁을 바라보며 힐데가르트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성검도 처리했고, 파트너도 정해졌겠다.

이제 남은 건 데뷔탕트 준비뿐이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힐데가르트는 며칠간 춤 연습과 장신구를 고르는 데 열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유시스와 테리오 총괄이 동시에 저택을 방문한 건, 정확히 데뷔탕트를 닷새 앞둔 날이었다.

“테리오 총괄! 오랜만이네요?”

“넉 달 하고도 보름 만입니다. 그렇게 오랜만은 아닙니다.”

“여전히 꼼꼼하시네요. 유시스를 데려다주는 길에 들리신 거예요?”

“아뇨. 오늘은 공녀님을 따로 뵙기 위해 온 겁니다.”

“자리를 옮기죠.”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확연히 굳어졌다.

로빈이 저택 안으로 유시스를 안내하자, 힐데가르트는 테리오를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셨으리라 믿어도 될까요?”

“예. 일전에 말씀하셨던 플람이라는 인물과 비슷한 사람이 최근 수도로 들어왔다는 소식입니다.”

힐데가르트의 눈이 반짝였다.

“어디서요? 어떻게 찾은 거죠?”

“발프람의 경비대원 중 한 명이 술집에서 난동을 부린다는 말에 출동했는데, 내부 손님들을 불심검문 하던 중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신원에는 이상한 점이 없어서 그대로 보내주었다는군요.”

“찾아주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 수사관 몇 명을 이베르타에서 수도로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이베르타요? 최근 이베르타에 수사관을 파견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네.”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듣기로는 그쪽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최근 이베르타 영지 쪽에 수상한 인력이 남아돌고 있어서요.”

“수상한 인력이요?”

“예. 노역을 끝낸 빈민이나 복역을 마친 도적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정확히는 모여들고 있는 중, 이라며 테리오 총괄은 말을 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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