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착각했을 리 없다.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키스케에게서는 단단하게 응축된 마력이 느껴졌다.
“너…… 그동안 마법 수련 열심히 했구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예전과는 비교도 못 할 만큼 많았다.
‘원래부터 마력 친화도가 뛰어난 녀석이긴 했지만…… 이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수련한 것 같은데?’
힐데가르트가 놀라자 키스케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힐데가르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조심스럽게 내리도록 에스코트하고 난 뒤에야 대답했다.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마법을 연습했던 것뿐이야.”
“뭐?”
마법사인 이상 마력을 꾸준히 모으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워낙 지루한데다 성실함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수련을 강요하지 않은 황궁에서 그걸 혼자 했다고?
“너, 내가 알던 키스케 맞지? 수업받기 싫어서 도망치던 걔 맞아?”
“언제 적 이야기야.”
키스케의 귓가가 살짝 발갛게 물들었다.
“그냥, 마법을 수련하고 있으면…… 네가 해줬던 말들이 생각나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수련을 했다고?”
“고작이라 미안하다. 내버려 둬, 내 마음이야.”
“칭찬하고 있는 거야. 왜 부끄러워하고 그래.”
힐데가르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어, 키스케.”
“……딱히 너한테 칭찬받으려고 한 건 아니야.”
단지 그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습관처럼 집중해서 마력을 모았다.
힐데가르트라면, 다시 만난 저를 보며 잘했다고 웃으며 칭찬해 주리라 믿었으니까.
꼭 지금처럼 웃어주는 모습을 상상하며 노력했던 것이다.
“……가끔 의미 없는 짓을 하는 건 아닌가 했는데.”
“의미 없긴!”
“응.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꽤 기쁘네.”
예전 같았으면 버럭 소리를 치거나 부끄러워서 신경질을 냈을 텐데.
키스케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를 바라보던 힐데가르트의 눈이 살짝 떨렸다.
“가자. 성소까지는 조금 걸어야 해.”
“…….”
가만히 그를 보던 힐데가르트는 재촉에 못 이겨 발을 옮겼다.
그녀는 성검을 넣어둔 상자를 들고 따라오는 가문의 기사와 거리가 떨어진 걸 확인한 뒤 속삭였다.
“키스케. 그 정도였으면 차라리 직접 만나러 오지 그랬어?”
“내가 갔으면 만나줄 시간은 있었고?”
“윽…….”
묘하게 핵심을 찌르는 구석은 변한 게 없구나.
힐데가르트가 오브론 대공령은 물론이고 온 영지를 돌아다니며 게이트 사업을 펼친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투닥투닥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성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겹겹이 늘어서 있는 아치형 입구 앞에서 뒤를 돌았다.
“키스케? 같이 안 갈 거야?”
“나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성소에는 이미 사제가 와 있을 거야.”
“알겠어. 그럼 금방 갔다 올 테니 다녀오면 차라도 같이 마시자.”
“좋아.”
키스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힐데가르트 공녀님. 자세한 이야기는 대사제님께 들었습니다.”
키스케의 말대로 성소에는 이미 마흔 살이 조금 넘은 사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는 오르녹스 신을 모시는 로우라고 합니다.”
사제 쪽에서 먼저 허리를 굽히자, 힐데가르트도 예의 바른 인사를 건넸다.
“바쁘셨을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우 사제님.”
“아닙니다. 당연히 교단이 해야 할 일입니다.”
살짝 몸을 튼 힐데가르트는 뒤따라오던 가문의 기사에게 성검이 담긴 상자를 받았다.
그녀가 눈짓을 하자, 공작가의 기사는 재빠르게 인사를 한 뒤 성소 밖으로 나갔다.
“그럼 이쪽으로 오셔서 물의 제단에 성검을 올려놓으시지요.”
힐데가르트는 사제의 말에 따라 물의 제단으로 다가갔다.
계단식으로 만들어진 제단의 꼭대기에서는 끊임없이 지하수가 솟아 나오며 아래쪽으로 흘러내려 가는 구조였다.
그녀가 성검을 놓고 한 계단을 내려가자, 로우 사제가 신성력을 불어넣으며 기도문을 외웠다.
곧, 흐르는 물에 은은한 황금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주목한 건 성검이 아닌 로우 사제였다.
“사제님. 표정이 안 좋으시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성검의 신성이 약한 것 같습니다.”
로우 사제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대사제님께서 저를 부르신 이유를 알겠군요. 하루라도 빨리 봉납 의식을 치르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그녀도 바라는 바였다.
“의식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는데…… 괜찮을까요?”
“글쎄요. 이런 일은 여태껏 선례가 없는 일이라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덩달아 어두워지자, 사제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교단에서도 이 일의 중요성을 알고 있으니까요. 최대한 빨리 준비하고, 순조롭게 진행될 겁니다.”
“꼭 아무 문제 없이 봉납되도록 신경 써주세요. 부탁드릴게요.”
로우 사제는 의외로 진지하게 이런 일에 나서는 공녀를 빤히 보았다.
힐데가르트는 그 시선 속에 담긴 의문을 풀어주듯 대답했다.
“대고모님께서 마치지 못한 일은 제가 완수할 생각입니다.”
“아. 그래서 직접……!”
로우 사제의 눈이 반짝였다.
사실 진짜로 기대하는 건, 플람의 몸에 깃든 단테의 힘이 약해지는 일이지만.
가끔은 숨겨야 하는 진실도 있는 법이다.
“누군가 성검을 노릴지도 모르니 철저히 관리해 주세요.”
“예. 황궁의 성소는 아무나 발을 들일 수 없는 신성한 영역입니다. 경비도 더욱 강화하였으니 마음 놓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사제님. 그럼 이다음에는 봉납 의식 때 뵙겠습니다.”
* * *
키스케는 정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성검은?”
“무사히 전달했지!”
“다행이네. 그럼 이제부턴 나한테 시간을 내줄 수 있는 거지?”
“흐음, 어떻게 할까?”
힐데가르트는 차라도 마시자는 약속을 제 입으로 내뱉었으면서도, 그를 조금 놀리고 싶어져서 말을 끌었다.
“생각해 보니 돌아가서 할 일이 산더미인데…… 차는 나중에라도 마시면 되지 않을까?”
“…….”
“농담이야. 그런 얼굴 하지 마.”
“그런 얼굴이라니? 내가 뭘?”
가지고 놀던 애착 인형을 빼앗기기 직전의 표정이라고 말하면, 순순히 인정하려나.
키스케가 저를 빤히 보는 시선은 어쩐지 즐거웠다.
“차 한잔 줄래? 안 그래도 조금 피곤했어. 어제 밤새웠거든.”
“밤새 한숨도 안 잔 거야? 왜?”
“성검을 가지고 오느라…… 그래도 잠깐 눈은 붙였어.”
키스케는 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살며시 힐데가르트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네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어.”
“보여주고 싶은 곳?”
그곳이 어딘지는 금방 알았다.
키스케를 따라 걸음을 옮긴 힐데가르트는 유리온실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여긴…….”
“할아버지가 상관없다고 하셔서 내 마음대로 꾸며봤어.”
“우리 저택의 유리온실을 떼온 줄 알았어.”
그 정도로 내부의 풍경이 비슷했다. 양옆으로 늘어선 식물 덕분에 눈이 편안한 건 물론, 풍만한 마력이 느껴졌다.
그녀는 유리온실의 그을린 흔적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키스케 너, 여기서 마법 수련을 했구나?”
“……마법 수련만 하지 않았어.”
“응?”
“너한테 보낸 편지 대부분은 여기서 적었거든.”
아카락시아 공작저의 유리온실과 비슷하게 꾸민 공간.
처음에는 집중에서 편지를 쓰기 위한 공간을 만들 겸, 마음 놓고 마법을 수련하기 위한 장소였다.
하지만 마력을 쌓으며 수련하는 동안 그녀를 떠올려서일까?
종래에는 마법을 수련하고 싶어서인지, 그녀가 보고 싶어서인지 모를 마음으로 이곳을 찾았다.
어린 날, 그녀와 만났던 그때처럼. 새벽을 업고 또 한 번 눈부시게 아름다운 마법과 함께 제 앞에 나타나 주기를.
그리고 매번 생각했다.
내가 생각보다 너를 정말 깊게 새겼다고.
“…….”
“키스케? 왜 그렇게 봐?”
“힐데. 난 아직도 널…….”
키스케가 입을 연 그 순간이었다. 유리온실으로 뛰어들다시피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공녀님! 힐데가르트 공녀님!”
“이 목소리는…… 노바?!”
키스케가 조개처럼 입을 다문 것과, 힐데가르트의 고개가 휙 돌아가는 건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바! 말도 안 돼…… 어쩜 이렇게 하나도 변하지 않을 수가 있어?!”
“공녀님께서는 너무 많이 변하셨네요. 아름다워지셨어요! 이래서야 데뷔탕트 때는 말 걸 기회도 안 올 것 같은데요?”
“……둘 다 너무 반가워하는 거 아니야?”
키스케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불평했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이젠 정말 어엿한 숙녀로 자라셨군요!”
“고마워. 노바도 건강하게 잘 지낸 것 같네.”
키스케와 달리, 헤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변한 게 하나도 없는 노바였다.
힐데가르트는 그의 청록색 머리카락이 여전히 복슬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깜짝 놀랐습니다. 대체 누가 키스케 전하와 저렇게 오붓하게 걷고 있나 싶었는데…….”
“……노바.”
“전하께서 이곳에 숙녀분을 데리고 오신 건 처음이네요.”
“노바. 그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제자리로 돌아가!”
“오자마자 돌아가라고 하시는 건 너무하세요!”
노바가 항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