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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27)화 (127/166)

124화

레디스는 그녀의 말에 백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난 눈에 흙이 들어가는 걸로는 모자라. 목구멍에 흙이 들어가도 안 된다고!”

목구멍에 흙이 들어가다니, 그건 식도든 기도든 큰일이다.

힐데가르트는 피식 웃으며,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버럭 성을 내던 카라딘을 다시금 떠올렸다.

‘나를 거절한 걸 두고두고 후회할 거다!’

‘하아, 그런 녀석들이 가장 귀찮은데…….’

쓸데없이 신분 때문에 콧대가 하늘을 찌를 듯이 높으면서, 막상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놈.

그런 녀석들이 꼭 뒤에 가서 이상한 짓을 벌이게 마련이다.

“근데, 카라딘 전하가 아직도 약혼자가 없었던가?”

힐데가르트는 안 그래도 신경 쓰이던 점을 지적했다.

“내가 알기론 혼담이 오가는 상대가 있다고 신문에서 읽었는데?”

“두 달 전까지는 콘스탄체 후작가의 잉그렛 영애와 혼담이 오갔지. 본인이 싫다고 해서 무산됐지만.”

“뭐?!”

콘스탄체 후작가는 명망 높은 무가로서, 검술에 일가견이 있는 곳이었다.

특히 최근에는 와인 사업으로 수완을 올리고 있었는데, 힐데가르트에게 발 빠르게 줄을 댈 정도로 눈치가 있었다.

신분이야 카라딘이 더 높다지만, 결코 떨어지는 상대는 아닐 텐데.

‘오히려 아까울 정도라고!’

배가 부른 애였구나.

현실을 모르니 그렇게 오만했던 거구나 싶다.

“힐데. 어지간한 일은 네가 알아서 잘 해결하니 오빤 크게 걱정하지 않는데…….”

깍지를 낀 미하일이 평소와 달리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네가 상대하지 말고 돌려보내.”

“상대가 황족인데?”

“응. 그런 식으로 혼담을 제의하는 상대는 말을 섞을 가치도 없어. 네 시간이 아까운걸.”

힐데가르트는 뿌듯한 얼굴로 미하일을 보았다.

‘우리 애가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야. 너 또 이상한 생각 하고 있지.”

제법 힐데가르트의 속내를 읽을 줄 알게 된 레디스가 그녀를 쿡 찔렀다.

힐데가르트는 레디스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렇게 할게.”

사실 힐데가르트도 깍듯하게 예의를 차린 것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도 개에 물리면 발을 털게 마련 아니던가.

“그런데 너 무슨 일로 수도에 온 거야? 요번에는 레노트 후작가가 게이트 설치해야 하잖아. 그쪽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맞아. 그런데 더 급한 일이 생겨서 올라온 거야.”

“급한 일?”

미하일이 작위를 물려받은 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비엔날레 사업과 이동 게이트 사업에 총력을 기울이던 여동생이다.

레디스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냐며 그녀를 꾹꾹 찔렀지만, 힐데가르트는 끝까지 비밀을 고수했다.

* * *

궁으로 돌아온 카라딘의 걸음이 딱 멈췄다.

그가 삐뚤어진 시선으로 물었다.

“뭐라고?”

“키스케 전하께서 와 계십니다.”

불호령을 예감한 시녀가 시선을 피했다.

“이 궁의 주인이 너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왜 마음대로 사람을 들여!”

“……죄송합니다.”

시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궁에 들일 수밖에 없는 손님이었으나, 카라딘은 한바탕 짜증을 내며 손님이 기다리는 협실로 향했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한숨에 젖은 키스케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카라딘. 어딜 다녀온 거지?”

“무슨 상관이십니까?”

고풍스러운 소파 위에 앉아 있던 키스케가 심심해서 보고 있던 책을 덮었다.

“외출할 때는 궁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나가. 아무도 네 목적지를 모르니 무작정 기다려야 하잖아.”

“그럼 돌아가 주시죠. 저희는 별로 좋은 이야기를 할 사이도 아니잖아요?”

“피곤하게 날 세우지 마. 나와 마주칠 때마다 그러는 거 피곤하지도 않아?”

“네. 안 피곤합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는지가 궁금하네요.”

카라딘은 맞은편에 앉기는커녕, 선 채로 키스케를 내려다보았다.

원래부터 성격이 좋지 못했던 사촌 동생은 해가 지날수록 모난 돌처럼 튀어나오는 부분이 생겼다.

“콘스탄체 후작 영애에게 사과드려. 일전에는 네가 너무 무례했다.”

“……제가 무례했다고요?”

두 달 전, 혼담이 오가던 잉그렛 콘스탄체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며 포도주를 뿌린 건 카라딘이었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그래도 전하께서는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라고 말했던 탓이다.

그 말을 들은 즉시 카라딘은 격분했다.

“어머니께선 지금도 수도원의 차가운 독방에서 시중 하나 없이 고초를 겪고 계십니다.”

그때의 일을 다시 떠올릴수록 화가 나는지, 카라딘이 씨근덕거렸다.

“그런데 다행이라는 말이나 하는 여자입니다. 드레스 한 벌 망친 걸로 어디까지 유세를 부릴 작정이랍니까?”

“카라딘.”

“게다가 이번엔 형님까지 나서서 저를 설득하려 드시네요? 콘스탄체 후작이 그렇게 무서우십니까?”

카라딘이 비아냥을 숨기지 않으니, 마주하고 있는 키스케의 얼굴빛이 좋을 리 없었다.

“몇 번을 말해도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그 여자가 날 먼저 모욕했고, 하늘이 무너져도 제가 먼저 사과할 일 없습니다!”

그가 악을 쓰며 화를 내자, 키스케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형님은 제가 빨리 혼인해서 황궁에서 떠나길 바라시나 보죠? 제 어머니랑 똑같이?”

예상대로 평소와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형님은 제 어머니가 가엽지도 않으세요?”

“내가 날 독살하려고 한 여자를 왜 가여워해야 하는데?”

키스케의 날카로운 지적에 카라딘이 움찔거렸다.

“그…… 그건 모함이에요. 어머니가 정말로 그런 짓을 했을 리 없잖아요!”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카라딘은 진실을 부끄럽게 여기기보다는 편들고 싶은 사람에게 마음이 기운 지 오래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뿐이다.”

빠드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키스케는 아랑곳하지 않고 턱짓했다.

“또, 설령 모함이라 해도 그걸 내 앞에서 꺼낼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숙모께서 수도원 유배에 그치게 된 건 죄가 가벼워서가 아니야. 내가 할아버지를 설득해서지. 따지고 보면 내게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날카로운 지적이었으나, 카라딘은 순순히 고맙다는 말을 하기는커녕 예상대로 입을 우물거렸다.

언제나 저에게 지기 싫어하던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이를 먹은 뒤에도 변함이 없다니.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현실을 부정하는 것도 작작 좀 해라.”

폐황자비가 된 로바르네의 초상화는 모두 태워졌다.

태우지 말라며 악을 쓰다가 기사들에게 붙잡혔다는 카라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황제의 근심으로 자리 잡은 카라딘을 계속 받아주고 싶진 않았다.

“내가 널 찾아온 건 콘스탄체 후작 때문이 아니야. 할아버지께서 그 일로 계속 신경 쓰고 계시길래 설득하러 온 거지.”

“그깟 같잖은 일로…….”

“너, 하루 빨리 황궁 아닌 다른 곳에서 사는 데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키스케는 날아올 비난을 가로막으며 넌지시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된다면 지금 같은 추태를 그냥 보고만 넘어가진 않을 거다.”

“뭐라고요?”

“할아버지야 그래도 널 손자라고 생각하며 이해해 주고 계시지만 나는 아니라는 소리지.”

그 순간, 카라딘은 이것이 키스케가 최초로 저에게 보내는 경고임을 자각했다.

황태자인 키스케와 황손에 불과한 카라딘의 격차는 이미 줄일 수 없을 만큼 벌어진 상태였다.

카라딘은 자의이든 타의이든 현 황태자를 독살하려 했던 여자의 아들이었다.

지금이야 이상하리만치 오랫동안 건강하게 장수하는 황제의 손자라지만 그다음은?

황제가 죽고 난 뒤, 카라딘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었다.

“형님께서 제 걱정을 그렇게 해주시는 줄은 몰랐네요.”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수치심에 붉게 물든 카라딘이 씨근덕거렸다.

“걱정하지 마시죠. 제 신세는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래서 아카락시아에 혼담을 넣고 온 길이고요.”

“……뭐?”

내내 차가웠던 키스케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소식 못 들으셨어요? 올해 힐데가르트 공녀가 데뷔탕트를 치르잖아요?”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보다 청혼이라니?”

“듣자 하니 막내 공녀는 사교계에 큰 관심도 없는 데다, 마법사라 저택에 붙어 있을 때도 없다잖아요? 쇼윈도 부부로는 그만큼 적합한 상대가 없죠.”

너무 잘난 여자는 피곤한 법이다.

서로 각자 살림을 차리는 쪽이 훨씬 편한데, 그런 점에서는 힐데가르트가 제법 괜찮은 상대였다.

후작가 여식인 잉그렛보다, 공작가의 공녀인 힐데가르트를 신부로 들이는 게 더 낫기도 하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그래서, 힐데가 네 청혼을 받아들이던가?”

“네?”

“받았냐고, 그 청혼.”

키스케의 표정은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은 침착했지만, 가면이 깨져나가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

카라딘은 면전에서 거절당한 건 물론, 머저리라는 말을 들었다는 걸 곧이곧대로 밝히고 싶지 않았다.

그가 한껏 으스대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물론이죠. 긍정적으로 고려해 보겠다던데요?”

“…….”

“뭐, 뭐예요.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는데?”

키스케의 차갑기 짝이 없던 눈빛에 허탈함이 실렸다.

그것이 키스케만의 냉소라는 걸 카라딘이 알 리 없었다.

“뻔한 거짓말을 할 바에야 솔직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게 너한테도 좋을 거다.”

“거…… 거짓말이 아니에요!”

“그래. 그건 내가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키스케는 무뚝뚝한 말로 대화를 끊으며 일어섰다.

“좌우지간, 콘스탄체 영애에게는 반드시 사과하도록 해. 이미 너무 늦은 사과라 할지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짧게 경고한 키스케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궁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노바가 다가왔다.

“용무는 끝나셨습니까?”

“노바, 내일 약속은 취소라고 하운 경에게 전해줘.”

“네? 갑자기요?”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급히 가봐야 할 곳이 생겼어.”

아직도 저를 어리게만 볼까 봐 꼬박꼬박 키를 재며 기다려 왔는데.

힐데가르트를 떠올린 키스케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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