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왜 부끄러움은 남의 몫인지.
카라딘을 따르는 시종은 차마 바라볼 면목이 없다는 듯, 그녀에게 공손히 편지를 내밀었다.
“숙부와 어머니께서 일찍부터 내게 물려주신 프라바체 땅이 있다. 나와 혼인한다면 그곳의 대지 지분과 막대한 황실 유산이 주어질 거다.”
편지를 받아 든 힐데가르트는 봉납을 뜯어냈다.
“공작가 생활과 비교해도 모자라는 건 없을 거라 장담하지. 그 목걸이는 예물 축에도 끼지 않아.”
“……하.”
“왜 그러지?”
“기가 막혀서요.”
황제의 직인이 찍힌 것도 아니고, 진솔한 문장 한 줄 없는 편지였다.
‘그럼 그렇지.’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못한 청혼이라니.
격식이라곤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카라딘은 그녀의 냉소적인 반응에 의외란 얼굴을 했다.
“네가 원한 대로 용건을 말했잖아. 뭐가 불만이지?”
“가문 사이에 오가는 인륜지대사를 가판대에 올려둔 옥수수 사듯 말씀하시고 계십니다만?”
도대체 예의범절은 어디에 팔아 치웠길래 이렇게 한 톨도 남아 있질 않은 거지?
‘제정신인가?’
카라딘은 당연히 제 혼담이 받아들여질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태도였다.
“혹시 혼담이나 청혼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시나요?”
“무엄하고 건방진 소리는 넘어가 주지. 신부 수업 때 전부 고쳐.”
“보아하니 카라딘 전하께야말로 필요해 보이네요, 그 신부 수업이라는 거.”
“뭐라고?”
힐데가르트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언행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하시네요. 이래서야 키스케 황태자 전하와 비교당하실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카라딘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목줄에 매인 채 그르렁대는 투견처럼 코 주변이 파르르 떨리던 것도 잠시.
곧 그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번졌다.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억지웃음이었다.
“네겐 그깟 형식이 중요한가? 무도회장 한가운데에서 꽃이라도 받고 싶어?”
그가 구두 끝을 까딱였다.
“응? 새빨간 장미 꽃다발에 핑크색 리본이라도 둘둘 묶어서, 세상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건네주길 바라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사양하죠. 꽃으로는 사람을 때리고 싶지 않아서요.”
“사양할 거 없어. 원한다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으니까. 약혼자를 주위에 과시하는 것도 때론 필요한 일이지.”
카라딘은 힘껏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데뷔탕트를 준비한다는 소식 들었다. 마침 적당한 기회겠군.”
“거절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힐데가르트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앞날이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다짜고짜 들이닥쳐 귀금속을 들이미는 혼담이 환영받으리라고 진심으로 믿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만약 그런 거라면 희대의 멍청이 확정이다.
이런 녀석을 위해 로바르네 폐황자비가 벌인 짓을 생각한다면 한숨이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수작질 부리지 말고 당장 목걸이를 가지고 돌아가 주시겠어요? 예정에 없던 손님 때문에 피곤하네요.”
마침내 카라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불평했다.
“대체 뭐가 불만이지?”
뭐긴 뭐야, 이 멍청아! 당연히 전부 다 불만이지!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개소리를 상대해 주고 있어야 하는 걸까?
“제가 이래 봬도 바쁜 몸이라서요. 최소한의 형식도 갖추지 않고 상식에 어긋나는 사람과는 혼담을 생각할 만큼 술에 취하지도 않았답니다.”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한 뒤 카라딘을 가만 바라보았다.
“혹시 전하가 취하셨나요? 주정 부리러 오신 거라면 번지수가 틀렸는데. 지금이라도 찬물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마시는 물보다는 뿌리는 물을 대접해 주겠지만.
“정략결혼에 사랑을 찾을 만큼 멍청했나, 공녀?”
카라딘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눈가도 일그러졌다.
“그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전하와 저는 6년 전의 사냥 대회에서 만난 게 다입니다. 저를 잘 안다는 말투는 불쾌하네요. 심지어 좋은 만남도 아니었잖아요?”
“네 능력이 뛰어나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소리잖아!”
기어코 카라딘이 언성을 높였다.
“수도에 설치한 게이트 말이다. 그 공적을 높이 사서 황실의 일원이 되는 걸 허락하겠다는 거다.”
깜빡, 깜빡.
느리게 눈알을 굴리던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아……. 이제야 좀 이해가 가네.”
어머니가 수도원에 가고 난 뒤부터, 카라딘 황자가 말썽을 부린다는 소식은 종종 들은 적 있다.
제 할아버지나 마우제네 공작이 아니라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고 했지.
막시밀리언이 이 혼담으로 허파에 바람을 넣었을 리는 만무하니,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인데…….
“마우제네 공작께서 제게 청혼하라고 하던가요?”
“…….”
“그런 거군요?”
카라딘의 몸이 움찔, 하고 작게 떨렸다.
마우제네 공작이 왜 카라딘에게 그런 바람을 집어넣었을까?
거슬러 올라가듯 따져보면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이걸 어쩌죠? 저는 랑케르트 공작령에 게이트를 설치해 드릴 마음 따윈 없는데.”
“뭐?”
“저는 랑케르트에서 솟아난 물 한 점, 그곳에서 난 살코기 한 조각, 흙 한 줌까지도 닿고 싶지 않아서요.”
공녀의 눈동자가 저렇게 서늘한 적 있었던가?
카라딘은 표정이 일순 흐트러졌다.
“그러니 얄팍한 수단일랑 집어치우시라고 이모님께 꼭 좀 전해주시죠.”
“나와 결혼하면 너는 대공비가 된다. 설마 그 이상으로 좋은 혼담이 있으리라 믿는 건 아니겠지?”
“도대체 언제까지 지적해 드려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절 선생으로 쓰고 싶으시다면 비용을 지불하세요.”
막시밀리언이 애를 잘못 키운 건지 아니면 키우지를 못해서 이 지경이 된 건지.
혼담이라는 게 아무리 가문 간의 결합이라 한들, 이렇게까지 권위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드물었다.
“돌아가세요. 저 목걸이도, 전하도 두 번 다시 볼 일 없으면 좋겠습니다.”
“…….”
면전에서 축객령을 들은 카라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는 못 박힌 사람처럼 걸음을 떼지 않았다.
‘좀 가라니까!’
짝다리를 짚고 사람을 노려볼 시간이 두 발 모두 부지런히 뚜벅뚜벅 움직여서 나가주면 안 되는 걸까?
“너…… 설마하니.”
그때였다. 카라딘의 입에서 가당찮은 이야기가 나온 게.
“키스케 형님과 잘 해봐서 황후라도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으면 착각에서 깨어나는 게 좋아.”
“…….”
멍해졌다가, 곧 일그러진 힐데가르트의 표정을 보며 카라딘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쪽은 이미 너보다 훨씬 더 나은 상대가 여럿이란 말이야. 응? 주제를 파악해야지.”
카라딘은 자기 머릿속에서 떠오른 말이라면 그게 얼마나 황당무계한 소리든 전부 옳은 말이라고 판단하는 재주가 있었다.
“최근 아카락시아의 기세가 좋다고 해도 착각해선 안 되지. 대공가의 일리야 공녀나, 이베르타의 라비엣 공녀처럼 황제의 뒷배가 되어줄 만한 상대가 수두룩한 걸 잊었나?”
힐데가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좋게 말해서 보내주려 했더니.’
상관도 없는 키스케의 이름이 나와서일까?
아니면 아카락시아 가문이 오브론이나 이베르타에는 비교도 안 된다고 평가받아서?
어느 쪽이든 더는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눈을 흘겼다.
“그런 꿈은 꾼 적도 없거니와, 좀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시나 보네요.”
“근본적인 문제?”
“네. 저는 믿을 건 신분밖에 없으면서 권위적이고 건방진 젊은 애송이는 사양이라서.”
“……뭐라고?”
“더 확실히 말씀드릴까요?”
사람은 비난의 화살이 자기 자신으로 쏠렸을 때 놀라우리만치 눈치가 빨라지는 생물이다.
그녀는 카라딘의 반응을 보고 코웃음 치며 쐐기를 박았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과시는 숨 쉬듯이 하며, 가문 간의 혼담이 얼마나 중요한지 조금도 이해 못 하는 전하 같은 머저리를 제가 정말 싫어한다고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너……!”
“그런 사람과의 결혼은 대공비는 물론이고 황후로 만들어 준다 해도 웃돈을 얹어서 사양이에요. 아시겠나요?”
이래도 못 알아들으면 그때는 지능을 의심해 봐야 했다.
시뻘겋게 변한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히 말한 보람이 있지만.
힐데가르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문가를 가리켰다.
“용건이 끝났군요. 그럼 어서 돌아가 주세요. 더는 손님을 받고 싶진 않으니까.”
“……운 좋게 사람들이 떠받들어주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군. 네가 감히 제국의 황족을 면전에서 모욕하고도 무사할 대귀족이라고 착각이라도 하는 거냐?!”
주먹을 세게 말아쥔 그가 힐데가르트를 노려보았다.
쥐의 내장을 파먹기 위해 달려드는 독수리처럼 살기가 섞인 시선이었으나, 힐데가르트는 그 기세에 말려들지 않았다.
“나를 거절한 걸 두고두고 후회할 거다!”
세상에 다음에 두고 보자는 말 만큼 가소로운 말이 있었던가?
힐데가르트는 겁을 먹기는커녕 눈을 반으로 접으며 웃었다.
“그거 정말 무서운 말이네요. 작별 인사는 서로 관두자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녀가 치맛자락을 살짝 들었다.
“다음번에 만날 땐, 키스케 전하의 반만이라도 닮으셨으면 좋겠네요. 상식도, 예의도, 학습 능력도요.”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
“로빈. 손님 돌아가신다고 하니 배웅해 드려.”
찌이익!
힐데가르트의 손에서 편지 찢겨나가는 소리가 선명했다.
서로를 노려본 시간은 짧았다. 이윽고 화를 이기지 못한 카라딘이 발 받침대를 있는 힘껏 걷어찬 뒤 응접실을 쏜살같이 빠져나갔으니까.
* * *
“누가…… 뭐 때문에 다녀갔다고?”
“카라딘 로젠발트 드롯셀마이어 전하께서, 혼담을 들고 찾아왔다고.”
“미친 거 아니야?!”
레디스가 수면을 박차는 돌고래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돼! 절대 안 돼! 미쳤어?! 절대 안 돼!”
“깜짝이야…… 소리 좀 줄여!”
밖에 나갔다 와서 피곤하다던 건 언제고 왜 이렇게 기운이 좋은 건지.
그러나 힐데가르트의 말에도 레디스의 흥분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반면 미하일의 표정은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저 차분함과 흥분을 반반씩만 섞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힐데! 너 설마 그 혼담을 받아들일 건…….”
“미쳤어? 그럴 리가 없잖아!”
힐데가르트는 당장 고개를 저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런 일은 안 생겨. 내가 바보야? 사냥 대회 때 겪은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고.”
그리고 그 억울함은 당사자인 레디스가 가장 심각할 것이다.
“어쨌든 됐어. 개에 물린 셈 칠 거야.”
그녀는 한숨을 쉬며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마우제네 랑케르트 공작이 어지간히 초조한 모양이야. 그런 가소로운 수작질이나 부리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