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Chapter 11. 행방
수도 발프람. 일몰 무렵임에도 황궁은 부산스러웠다.
임시로 열린 국정 회의가 늦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귀족들은 방석을 이리저리 돌리며 조금이라도 딱딱한 의자 위에서 편히 앉을 수 있게 온몸을 뒤틀었다.
긴 테이블에서 상석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마우제네 랑케르트 공작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에 비하면 미하일 아카락시아 공작의 표정은 물처럼 부드럽고 온화했다.
미하일 공작은 막간의 시간이 나자 곁으로 몰려든 다른 귀족들과 화기애애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마우제네와는 사뭇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시종이 다가와 국정 회의가 재개됨을 알렸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막시밀리언 황제가 자리로 들어서자 모든 귀족이 시립했다.
날이 갈수록 기력이 쇠하기는커녕 건강해지는 것 같은 황제는 이제 회의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 황태자 키스케를 곁에 두었다.
황제가 손짓하자, 키스케가 말했다.
“회의를 재개하도록 하지.”
앳된 티를 완전히 벗어낸 황태자의 시선이 차가웠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금발과 선명한 붉은 눈동자.
지나가던 사람이 한 번씩 뒤돌아볼 만큼 조각상 같은 외모였다.
언제나 딱딱한 표정을 하는 그였으나, 미하일과 눈이 마주친 순간 조금 부드러워진 것을 알아챈 사람은 드물었다.
“마저 마무리하지 못한 안건만 의결하고 끝내도록 하지. 로렌조 공작?”
“예.”
“시작하지.”
키스케의 부름에 일어난 사람은 로렌조 이베르타 공작 대리였다.
그가 좌중을 둘러보며 미리 나누어주었던 자료를 흔들었다.
“재작년 이베르타의 수해지였던 키론 지방의 제방 건축이 거의 다 완료되었습니다.”
이베르타 공작령의 수해 피해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회의에 참석한 귀족 대다수가 시큰둥한 표정을 애써 감췄다.
“그간 난민들이 터를 잡았던 임시 구역이 비워지면, 새롭게 주택을 지어야 할 것 같은데 이 공사를 맡아줄 가문이 없으십니까? 본래대로면 이베르타에서 진행할 예정이었지만 얼마 전 발굴된 유적지 때문에 손이 모자랍니다.”
오브론 대공을 대신해서 참석한 유스티즈 오브론 대공 대리가 손을 들었다.
“예산과 기간은 어떻게 됩니까?”
“수도관 공사를 위해 배분해 둔 금액과 같습니다. 기간은 4년으로 넉넉하게 잡고 있습니다.”
“기간은 충분해서 좋지만, 너무 적은 금액이군요.”
“급하게 편성하느라 예산을 더 책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해해 주시지요.”
로렌조가 능청스레 웃었다.
“진행 의사가 있는 가문에서는 손을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익성은커녕 손해를 볼지도 모르는 사업이었다.
회의장을 둘러보자 거의 대다수 가문이 로렌조의 시선을 피했다.
예상대로 가장 먼저 발을 뺀 건 몬테를로 공작가였다.
“죄송합니다. 몬테를로에서는 운송선 건조 작업이 한창이라 인력을 빼기 어렵습니다.”
“흐음…… 그럼 유스티즈 공?”
“이 예산으로는 어렵습니다, 로렌조 공. 오브론의 건축가는 이보다 훨씬 더 비쌉니다.”
“계속 아픈 곳을 찌르시는군요.”
이제 남은 건 아카락시아와 랑케르트 공작가뿐이었다.
그리고 선수를 친 건 미하일이었다.
“이 일은 랑케르트 공작가에서 맡는 게 옳을 것 같네요.”
“미하일 공작.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는 수해 복구 같은 돈 안 되는 안건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지?”
마우제네가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미하일은 대답을 준비해 둔 사람처럼 느긋했다.
“그럴 리가요. 예산을 생각해서 의견을 낸 겁니다. 현재 랑케르트 공작령의 목재값이 가장 저렴하니까요.”
“……!”
마우제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힐데가르트 공녀가 이동 게이트를 발표한 지 6년이 흘렀다.
그간 아카락시아산 목재는 게이트를 통해 빠른 운송이 가능하다는 장점 덕분에 하나둘 아카락시아산 목재로 갈아타는 곳이 늘어났고, 그 결과 날이 갈수록 가격이 오르고 있었다.
반면 랑케르트의 목재는 재고가 쌓이기 시작하며 가격이 단계적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뻔뻔하게 내막을 다 알면서 웃는 낯짝으로…….’
마우제네가 이를 갈았다.
“랑케르트는 사양하고 싶군. 동부의 이베르타와는 물리적으로 거리가 너무 멀어서 목재를 옮기기엔 시간이 부족할 것 같군.”
하지만 이대로 물러선다면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우제네는 턱을 치켜든 채 말했다.
“아카락시아에서 협조해 준다면 또 모르겠군.”
“협조라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동 게이트 말이네.”
다섯 별 공작가에서 현재 이동 게이트가 없는 건 랑케르트 공작가뿐이었다.
“힐데가르트 공녀가 랑케르트에 이동 게이트를 설치해 준다면 공사야 어렵지 않지.”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천재, 힐데가르트 공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랑케르트의 이동 게이트 수주 제안을 빈번히 돌려서 거절했다.
랑케르트가 두 배의 계약금을 제시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서부의 랑케르트 공작령과 근접한 영지에게도 이동 게이트를 설치해 주지 않았다.
랑케르트 공작령과의 거리를 어찌나 깐깐하게 따지는지, 현재 서부의 귀족들은 공녀에게 잘 보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이럴 때야말로 공녀가 누누이 말하던 ‘귀족의 책임을 다하는’ 협조가 필요한 상황 아니겠나?”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없는 문제네요.”
“왜지? 공작인 자네가 여동생에게 부탁만 하면 될 문제라고 보는데?”
“당장 급하게 랑케르트 가문에 이동 게이트를 설치한다면, 그만큼 다른 영지의 순서가 뒤로 미루어질 거라서요.”
미하일은 회의장에 앉아 있는 레노트 후작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른 영지는 전부 일 년 전부터 기다려서 설치한 이동 게이트입니다. 랑케르트만 새치기하듯 끼어드시면 안 되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레노트 후작이 허겁지겁 미하일의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마우제네 공작, 곤란합니다! 다음은 저희 레노트 후작가에 이동 게이트를 열 차례입니다!”
“그다음은 저희 차례고요!”
순식간에 마우제네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가 오가기 시작했다.
“그만.”
소란스러워진 회의장을 훑은 황제가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자 참석한 귀족들이 마우제네 쪽을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막시밀리언은 고개를 돌려 키스케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어찌 생각하는가?”
“미하일 공작의 말대로 예산이 적은 만큼 랑케르트 공작가에서 맡는 게 옳습니다.”
마우제네가 원망스러운 얼굴로 황태자를 보든 말든, 키스케의 대답은 흔들림 없이 태연했다.
“공사 기간이 4년이나 되니 이동 게이트가 없어도 충분히 목재를 옮길 수 있을 테니까요.”
키스케와 시선을 마주친 유스티즈 오브론이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럼 오브론에서는 석재를 일부 제공하지요. 이동 게이트를 통해 이베르타까지 보내둘 테니 뒷일은 잘 부탁합니다, 마우제네 공작.”
“…….”
“마우제네 공작. 받아들이지 않을 다른 이유가 있다면 말하겠나?”
황제의 물음에 마우제네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폐하. 랑케르트 공작가에서 책임지고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게.”
마우제네는 미하일을 노려보았으나, 그는 제 여동생과 닮은 웃음으로 생글거릴 뿐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돌아갈 무렵이었다.
“미하일 공작.”
“어쩐 일이신가요, 마우제네 공작.”
마차에 타려던 미하일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힐데가르트 공녀에게 연락 좀 받아달라고 전해주겠나?”
마우제네 공작은 이런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치욕적이라는 태도로 말했다.
“랑케르트에도 이동 게이트를 설치하고 싶네. 올해만 해도 벌써 세 번째 편지를 보냈는데 답장을 받을 수가 없군.”
“그랬나요? 사람을 보내지 그러셨어요.”
보낼 때마다 저택을 비웠다고 하니 편지라도 보낼 수밖에!
마우제네는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자네도 다섯 별 공작가이니, 랑케르트 공작령에 게이트가 설치될 수 있도록 거들어줄 순 없겠나?”
“글쎄요, 그건 제 동생이 결정할 문제라서요.”
몇 년 새 부쩍 예의 바르게 뻔뻔해진 미하일이었다.
마우제네의 표정이 기어코 일그러졌다.
“자네는 내 말에 항상 동생을 방패로 삼는군. 주관이라는 게 없는 건가?”
“제 동생이 저보다 훨씬 뛰어난데다, 사업은 전적으로 힐데의 몫이라서요. 서로 존중해 줘야 하는 부분이죠.”
“…….”
“제 동생이 얼마나 뛰어난 천재인지는 공작도 아시죠?”
미하일 공작이 여동생을 끔찍하게 아낀다는 건 비밀도 뭣도 아니었다.
“그럼 먼저 실례해도 될까요? 동생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잠깐 기다리게, 미하일 공!”
“좋은 하루 보내세요, 마우제네 공작.”
미하일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못 들은 척하며, 품속에서 회중시계를 꺼낸 뒤 마부를 재촉했다.
* * *
수도의 테세라 거리에 있는 아카락시아 저택.
마차에서 내린 미하일은 로빈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웃었다.
“로빈! 벌써 왔구나, 힐데는?”
“아가씨라면 위층에 계세요. 그간 잘 지내셨죠, 도련님?”
“물론이지. 그런데 손에 든 그건 뭐야?”
“아가씨 앞으로 온 혼담 제의요.”
로빈은 한숨을 푹 쉬며 일곱 통이나 되는 두꺼운 편지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아가씨가 사람을 안 만나주니 다들 편지라도 보내는데 한두 통이어야죠…….”
“아, 그럼 그건 내가 가지고 갈게.”
상황을 짐작한 미하일이 편지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갔다.
문밖의 기척을 알아챈 힐데가르트가 소리쳤다.
“로빈. 이 편지들 전부 다 가져다 버려줄래?”
“미안, 로빈이 아니라 나야.”
“미하일 오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놀란 힐데가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인어처럼 투명한 피부와 밤하늘을 담아둔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
살랑이는 은빛 머리는 달빛과 은을 넣어 빚은 보석 같았다.
어마어마한 미녀로 자란 힐데가르트는 제국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였다.
소문이 무성한 마법사는 직접 보는 순간 그 천재성만큼이나 미모로도 유명했다.
“오느라 고생 많았지?”
“고생은. 어차피 이동 게이트를 써서 왔는걸. 오빠야말로 계속 수도에서 머물면서 회의 참여하느라 피곤했지?”
“그게 공작이 할 일이니까 괜찮아.”
미하일은 그녀의 손에서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오빠, 왜 벽난로에 불을 피우는 거야?”
화르르륵!
“추워서. 와, 너무 춥다. 곧 가을이라 그런가?”
“여름 다 안 지났는데?”
미하일은 맑게 웃으며 스무 통에 가까운 편지를 모조리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