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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23)화 (123/166)

120화

편지 보관함을 매만지던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침착하자.

힐데가르트는 당황하지 않고 의연하게 물었다.

“제가 드린 제안은 아이테르 양의 명성을 크게 떨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

“<천지>뿐만 아니에요. 다른 작품들도 함께 전시할 예정이니…….”

“그건 들어서 알고 있답니다. 제안 자체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럼 어째서 거절하시는 건가요?”

캠벨 부인의 입은 한동안 굳게 다물린 채 열리지 않았다.

얼마 후, 한숨 같은 이유가 흘러나왔다.

“……저는 제 아이가 붓을 꺾지 않았으면 해요.”

“…….”

“<천지>는 아이테르가 가장 높이 평가받은 작품이에요. 미술제 우승도 그 아이가 뿌듯하게 가슴 펴고 자랑할 만한 업적이죠.”

얼핏 차갑고 깐깐해 보이던 캠벨 부인의 입가에서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부모란 참 다양한 얼굴을 가진 게 분명했다.

“그림만 그리면서 살 수만 있으면 바랄 게 없다고 말하는 아이예요. 남편과 제가 미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테르도 어릴 적부터 물감 섞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그림이 전부입니다.”

분노는 어떤 빨간색으로 덧칠해야 강렬하게 전달될지.

슬픔은 강물과 닮은 파란색이 좋을지, 바다를 닮은 암청색이 좋을지 물어보던 아이였다.

아이테르에게는 그림이 단순한 미술이나 취미를 넘어선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로서 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동시에…….

“하지만 <천지>는 <아이테르>보다 뛰어나다고 말할 수는 없어요.”

“냉정하시네요.”

“전 그 아이와 달리, <아이테르>를 직접 본 적이 있으니까요. ……네, 훌륭한 작품이었죠.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캠벨 부인이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엔날레에 방문한 사람들은 나란히 걸린 두 작품을 숨 쉬듯이 비교할 거예요. 수십 년 만에 공개되는 <아이테르>와 미술제의 우승 작품이 나란히 걸려 있다면, 당연히 <천지>를 더 낮게 평가할 겁니다. 미술계는 특히 작품 자체를 평가하기보다는, 명성 값을 쳐주는 세계니까요.”

“……그게 걱정이셨군요?”

캠벨 부인의 표정이 씁쓸해졌다.

“하필이면 <아이테르>라니요. 그 아이의 이름을 따온 작품이라 더욱 비교당할 텐데…….”

“부인.”

“아이테르는 아직 그런 종류의 아픔을 몰라요. 온 힘을 다해 그린 그림이 다른 작품과 비교당하고, 철저하게 깎아내려지며 평가당하는 괴로움을요.”

“비교를 당할 바에야 아이테르 양의 그림을 창고에 묵혀버리겠다, 그런 의미이신가요?”

“…….”

“그걸 원하시나요?”

몇 마디를 더 이어가려 하던 캠벨 부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힐데가르트의 물음에 하려던 말을 멈춘 그녀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캠벨 부인.”

“…….”

“부인께선, 따님이 어떤 삶을 살길 바라세요?”

힐데가르트는 편지 보관함에 묻은 먼지를 손끝으로 톡톡 털며 물었다.

“부인처럼, 평범하게 가정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시나요? 아니면 화가로서 크게 성공하길 바라시나요?”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힐데가르트를 바라보는 캠벨 부인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이테르가 행복하게 살면 그만이지요. 제게는 그 두 가지는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니랍니다.”

“그렇다면 더더욱 이 기회를 받아들이셔야지요.”

“…….”

힐데가르트는 정중한 말투로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이테르 양이 화가로 사는 걸 포기하지 않는 이상, 언제고 그림을 비교당하는 순간이 찾아올 거예요.”

“하지만…….”

“그러니 그 무대라도 공평해야죠. 제 비엔날레에는 살롱의 후원을 받은 그림은 단 한 점도 올리지 않을 겁니다.”

“……!”

캠벨 자작 부인은 깜짝 놀랐다.

미술계에서 이름 높은 그림 대다수는 살롱의 후원을 받은 작품이었다.

따라서 어떤 전시회에서든 살롱에서 먼저 공개된 그림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아이테르>와 <천지>가 비교당하는 걸 걱정하시는 부인의 마음도 알겠어요. 따님의 마음이 다치는 것도 걱정되시겠죠.”

“…….”

“하지만 지금 따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예술적 이해자이자 지지자입니다.”

힐데가르트의 눈빛은 몹시 진지했다.

“<아이테르>보다 <천지>가 낫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로 단 한 명도 없을까요?”

“그건…….”

없을 거라고는 말하지 못하리라.

여행지에서조차 스케치북을 들고 다닌 아이테르였으니까.

노력은 반드시 보답받는다.

혹자는 모든 노력이 보답받는 건 아니라고 말할 때도 있다. 그건 노력이 파고들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 존재하기에 자조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살아가며 불가침 영역을 피부로 느낄 때가 더 많아지기에 사람들은 노력의 가치를 깎아내리지만, 힐데가르트는 아직도 믿고 있었다.

노력과 성실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누군가는 반드시 알아줄 거라고.

“아이테르 양의 노력은 아직 열매를 다 맺지 못했어요. 지금껏 살롱 문화에 녹아들지 못했던 드러나지 않은 귀족, 비엔날레를 보러 온 이들 중 그녀의 그림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사람이 반드시 생길 겁니다.”

“…….”

“드넓은 우주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나를 이해하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기쁜 일이랍니다.”

힐데가르트는 편지 보관함의 까끌까끌한 표면을 매만졌다.

잠깐이지만, 저를 바라보던 키스케의 얼굴이 스치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니 제가 아이테르 양의 첫 번째 이해자가 되고 싶어요.”

“……공녀님.”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캠벨 부인.”

힐데가르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사람은 의외로 연약해서, 딱 한 명이라도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빠듯하게 벅차오른답니다.”

캠벨 부인이 입을 꾹 다물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상대의 입에서 항복의 낌새가 담긴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참, 이렇게까지 완고하게 설득하실 줄은 몰랐는데…….”

비로소 힐데가르트를 바라보는 캠벨 부인의 눈동자가 다정한 빛을 띠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공녀님. 딸아이와 한 번 더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소리 없는 환호를 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제가 먼저 거절하겠다고 찾아왔는데…… 번복하게 되어 죄송하네요.”

“그런 건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힐데가르트는 무지개처럼 활짝 핀 아름다운 웃음으로 화답했다.

“좋은 대답을 돌려주실 거라고 믿을게요. 꼭 아이테르 양과 함께 찾아와 주세요.”

그때는 맛있는 차 한 잔을 대접하겠다고 약속한 소녀의 눈동자가 티 없이 맑았다.

그제야 캠벨 부인의 얼굴에도 붓꽃처럼 청초한 웃음이 번졌다.

아이테르가 보았다면 당장에라도 연필을 다시 쥐었을 모습이었다.

* * *

다시 정원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래. 그런 이해자는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하지. 저번 생에서도, 이번 생에서도.’

유독 레온하르트와 키스케가 보고 싶어지는 밤이었다.

멈춰 선 그녀가 후우, 하고 깊은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때였다.

“힐데, 좀 쉬고 왔어?”

“레디스 오빠.”

“어디 보자, 안색은…… 괜찮네.”

태양도 없는데 손바닥으로 그늘을 만들어준 레디스가 씩 웃었다.

“아까부터 안 보이길래, 혹시 피곤해서 들어버린 건가 했어.”

“무슨 소리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얼씨구?”

힐데가르트가 힘차게 부정했다.

아이테르에게 확답을 받아내야 하는 건 물론이다.

물방울의 방을 조용히 미하일에게 찔러줘야 하고, 이동 게이트 사업을 확실하게 아카락시아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매듭지어야 했다.

“손님들 반응은 어때?”

레디스는 대답 대신 엄지를 치켜든다.

“너랑 사업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은 전부 작은 서재로 불러 모았어.”

“정말? 잘했어! 당장 가자!”

주먹을 세게 쥔 그녀가 크게 심호흡했다.

기합을 다지는 모습이 그렇게도 웃겼을까.

레디스는 못 말린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양손으로 세게 두들기며 말했다

“긴장하지 마. 네 뒤에 나 있다! 이렇게 든든한 오빠를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뒷배로 두고 있는데 왜 긴장을 하고 그래?”

“누가 긴장을 했다는 거야. 그냥 좀 각오를 다진 것뿐이야!”

“다 잘 될 거야. 넌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동생이잖아!”

“…….”

힐데가르트의 티 없이 맑은 눈에 그리움과 뿌듯함이 번졌다.

꼭 지금의 레디스처럼, 너는 아름답고 강한 공녀가 될 거라고 저를 위로해 준 오빠를 위해 선택한 삶.

“오빠 말이 맞아. 난 잘할 수 있어.”

후회하지 않는다.

무지개는 이제 막 뜨기 시작했으니까.

레디스와 함께 서재로 향하는 힐데가르트의 걸음이 거침없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작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몇 명의 사람이 마호가니 테이블 주변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면면을 살펴보니, 예상한 인물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상대도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파티는 이제 거의 끝물이네요.”

누구든 무슨 상관이랴.

힐데가르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는 비즈니스를 시작해 볼까요?”

이듬해 14살의 공녀가 후원자를 자처한 화가 아이테르는 캠벨 영지의 후계자이자 샛별 같은 화가로 제국 전체에 이름을 날렸다.

샛별에서 혜성으로.

혜성에서 신예로 불리며, 마침내 신예에서 천재로 불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4년 남짓.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그렇게 힐데가르트는 18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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