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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16)화 (116/166)

113화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손을 잡지 않았다.

“내가 너에게 잘해주니까? 친절하니까?”

“…….”

“비난처럼 듣지 마. 오히려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해.”

“어떤 이유 하나 때문에 널 좋아하는 게 아니야.”

이유가 있어서 그녀를 좋아한다는 건, 달리 말하면 그 이유가 사라졌을 때 자신의 마음이 변한다는 걸 의미했다.

힐데가르트가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 물은 거라는 걸 키스케는 금방 파악했다.

“키스케. 네 마음은 금방 변할 거야. 넌 아직 어리잖아.”

“변하지 않으면?”

“…….”

힐데가르트는 키스케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변할 거야. 틀림없이.”

키스케는 애써 침착하게 그녀를 보았다.

그는 텅 빈 손을 조용히 거두어 들었다. 그리고 딱 잘라 말했다.

“내 마음이 금방 거둘 만큼 가볍지는 않아.”

그러나 키스케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말을 증명하려면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그가 조용히 주먹을 감아쥔 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매일 편지 할게.”

“편지도 좋지만, 마법 공부 열심히 해. 그래야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말하지.”

“…….”

힐데가르트는 쾌활하게 웃으며 등을 돌렸다.

키스케는 그 등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벌여둔 사업을 시작하면 많이 바쁠 거야. 공작저도 자주 비울 거라 제때 답장도 못 할 거야.”

“…….”

“나도 네가 보고 싶을 거야, 키스케.”

그녀의 웃는 얼굴은 부서져서 쏟아지는 햇빛 같았다. 조금은 따갑고, 계속 보고 있으면 눈앞이 아찔해지니까.

키스케는 그녀와 제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분명하게 이해했다.

“어라?”

걸어가던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멈춰 섰다.

하늘을 바라보자 한 송이씩 떨어지는 차가운 눈송이가 보였다.

그녀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키스케가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렸다.

“올해 첫눈이네?”

“그러게. 하필 아레스 공자가 떠나는 날에 내리네…… 괜찮으려나.”

허공으로 손을 뻗은 힐데가르트의 손가락 위로 떨어진 눈이 사르르 녹았다.

천천히 내려오는 눈송이는 어느새 힐데가르트와 키스케의 어깨를 두드렸다.

키스케는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같이 호수로 산책 갈까?”

“응? 지금?”

“원래 아레스가 오기 전에 가기로 했잖아. 갈 사람은 갔으니까.”

키스케는 그녀에게 조급하게 다가가지 않았다.

천천히, 한 발자국씩 내디딘 그의 걸음이 쌓여가기 시작한 눈송이 위에 점점 확실하게 찍혔다.

“손잡고 걷자, 오늘만.”

“…….”

“싫어?”

키스케가 그녀에게 또 한 번 손을 내밀었다.

힐데가르트는 그런 상대를 가만 보다가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그를 향해 걸어왔다.

* * *

노바는 젖었다가 마른 흔적이 역력한 키스케의 케이프를 탈탈 털었다.

“전하아, 이렇게 눈을 맞으시면 감기 걸려요!”

키스케는 고개를 마구 흔들며 머리를 팍팍 털었다. 그러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손끝을 본 노바가 드물게 잔소리를 했다.

“그것 보세요. 하다못해 털장화라도 신고 가시지.”

“난 괜찮아.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그렇게 춥지도 않았으니까.”

“아무 일 없어서 다행이지만…… 이젠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노바가 엄한 척, 말투를 바꿨다.

“전하의 위치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힐데가르트 공녀님께서 유능한 마법사시니 이번에는 저도 고집을 굽혔습니다만…… 내일부터는 절 떼어놓고 돌아다니실 수 없다고 생각하셔야 해요.”

“평생?”

“예, 평생이요.”

과연 몇 살까지 제 삶이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족히 몇십 년은 될 세월이었다.

키스케가 농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노바 넌, 평생 나랑 붙어 다닐 생각 하면 징그럽지도 않아?”

“징그럽다뇨! 어디서 그런 표현을 익히신 거예요?!”

노바가 펄쩍 뛰었다.

“설마…… 키스케 전하, 저랑 붙어 다니는 게 징그럽다고 생각하시는 건…….”

“그런 의미로 말한 거 아니야.”

“하아, 다행이다. 십년감수했네요.”

노바가 벽난로에 장작을 하나 더 집어넣는 동안 키스케는 옷을 갈아입었다.

“아레스 공자님을 여기서 뵐 줄은 몰랐는데…… 엇갈리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그 녀석 일주일만 늦게 왔어도 얼굴을 못 봤겠네.”

“객지까지 찾아올 만큼 좋은 친구분이 계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시죠?”

“응.”

“어라? 이건 제가 생각한 대답이 아닌데요?”

“너무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이상해?”

키스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장작 타는 소리 또한 선명하게 들렸다.

“너도 그래.”

“예?”

“힐데가르트나 아레스만큼이나 널 만난 건 내 행운이야.”

“…….”

“마법을 배우길, 이곳에 오길 잘한 거 같아. 네가 권해준 덕분이야.”

노바는 무심코 우두커니 서서 어린 주군을 바라보았다.

“항상 고마워.”

“……전하.”

저를 바라보던 이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자, 키스케가 그를 쿡 찔렀다.

“왜 울고 그래?”

“아닙니다. 그냥, 우리 전하가 정말 잘 크셨다 싶어서…… 좀 감동이라서. 죄송해요. 저야말로 징그럽죠?”

“이제 징그럽다는 표현 둘 다 쓰지 않기로 하자.”

“하하, 알겠습니다.”

노바가 손가락으로 눈가를 짓눌렀다.

“생각보다 눈이 많이 내릴 것 같은데, 베르하임 백작에게 먼저 수도로 돌아가라고 일러둘까요?”

“아냐. 예정했던 대로 모레 출발하자.”

“괜찮으시겠어요?”

노바가 걱정하는 건 빙판길 따위가 아니었다.

좋든 싫든 키스케는 또다시 수많은 사람에게 평가 대상으로만 비쳐질 황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괜찮아.”

키스케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야지. 힐데가르트가 그러는 것처럼.”

분하지만, 키스케는 인정해야만 했다.

힐데가르트는 우선순위를 몹시 분명하게 인식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에게는 가문이 명성을 되찾는 일만큼 중요한 게 없었고, 그 탓에 키스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란 몹시 제한적이었다.

키스케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레온하르트 공작과 가문 재건에 비교하면 자신의 새로운 삶까지 의미가 없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키스케는 그녀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직 어리니까 그런 거라고, 네 마음은 금방 변할 거라고 단언하는 그녀의 말을 뒤집어주고 싶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바빠질 거야, 노바. 할아버지께 배워야 할 일이 많아. 너도 푹 쉬어둬.”

“제 걱정일랑 하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그럼 내일은 하루 종일 짐을 정리해야겠네. 나도 도울게.”

“아녜요. 저 혼자서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보다…… 전하, 전해드려야 하는 게 있어요.”

“응?”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노바가 빙긋 웃더니 방을 나갔다.

얼마 후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 들려있는 건 처음 보는 네모나고 길쭉한 선물 상자였다.

곱게 포장된 리본은 방 안이 묘하게 어두운 탓인지 살짝 빛이 바랜 것처럼 느껴졌다.

오래전에 사 둔 선물인 듯했다.

“그게 뭐야?”

“엊그제 공녀님께서 주신 거예요.”

“……힐데가?”

키스케의 눈이 도토리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네. 베르하임 백작이 온 날, 제게 기회를 봐서 전해달라고 하셨거든요. 열어 보세요. 저도 무슨 물건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얇고 긴 상자는 그리 무겁지 않았다.

깃펜이나 만년필일까?

이걸로 편지라도 보내라는 뜻일까, 지레짐작한 키스케의 예상은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자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건…….”

상자 속에 있는 건 다름 아닌 홍옥이 박혀 있는 루프 타이였다.

키스케는 상자 안에 있는 쪽지를 집어 들었다.

이제는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는, 힐데가르트의 필체였다.

[같이 잘해보자, 키스케.

앞날이 기대되는 제자에게. H.]

“올봄에 수도에서 전하께 전해드리려고 사 뒀던 건데 전해드릴 타이밍을 놓치고 그대로 잊고 계셨대요.”

“…….”

키스케는 루프 타이를 차분히 목에 걸어보았다.

끝까지 죄어서 매자 기분 좋게 목에 밀착된 타이는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금방 익숙해질 게 분명했다. 내일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고 다니고 싶을 만큼 소중했으니까.

“노바.”

“네?”

“난…… 아마 앞으로 눈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될 거야.”

호수를 보면 그녀와 같이 걸었던 오늘을 기억하겠지.

거울을 보면 루프 타이를 보며 그녀를 또다시 기억하겠지.

마법을 수련할 때도, 황궁 온실에 들릴 때도.

언제나 그녀를 생각하게 되리라.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시도 때도 없이 거울을 꺼내 보듯 그 사람을 제 마음에 비추어 보는 거니까.

키스케는 루프 타이의 끈을 손끝으로 몇 번이나 매만졌다.

사계의 끝이 지나고, 이 눈이 그쳤을 때 그녀가 저를 한 번이라도 떠올려 줄까.

부디 그렇기를 바라는 키스케를 데리고 겨울이 강물처럼 조용히 흘렀다.

이틀 동안 내린 눈은 키스케가 마지막으로 떠나는 날까지 펑펑 쏟아졌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드디어 힐데가르트가 기다리던 작위 계승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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