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112)화 (112/166)

109화

비록 이 마음으로 그녀를 바꾸지 못할지라도 변하지 않을 감정이었다.

키스케를 가만 바라보던 아레스가 히죽 웃었다.

“그럼 나는? 나한테도 잘해줄 거지?”

“……아니라곤 말할 수 없는데 막상 그렇게 물어보니 대답해 주기 싫어지네.”

“부끄럼 타냐?”

킥킥 웃던 아레스가 키스케를 발끝으로 쿡쿡 찔렀다.

“키스케. 너 혹시 황태자 책봉 건, 미리 알고 있었어?”

“어렴풋이 예상은 하고 있었어. 그렇지 않을까 생각만 했던 거지.”

로바르네 랑케르트가 수도원에서 사실상 유폐나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게 된 이후 신문에서 며칠간 카라딘을 집중적으로 다룬 적이 있다.

그가 황제를 찾아가 난동을 부렸고, 어머니를 돌려보내 달라는 소란이 먹히지 않자 그대로 궁에 틀어박혔다는 소식이었다.

그걸로 끝이면 좋았으련만 계속 황궁에 있느니 차라리 랑케르트 공작가로 가겠다며 소란을 피우며 시녀로 입궁한 파르니 백작 영애를 폭행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당연히 그 소식을 접한 제국민의 반응이 좋을 리 만무했다.

다음 황위는 키스케가 이어받게 되리라는 짐작까지 쉽게 나올 정도였다. 그런 사실을 키스케 본인이 모를 리 만무했다.

“어…… 그런데 이제 황태자로 책봉되면 황궁으로 돌아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

“호외가 뜬 게 오늘이잖아. 그럼 황실에서도 내일쯤 사자가 오는 거 아냐?”

“응.”

키스케의 고개가 무겁게 움직였다.

더는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머물 수는 없겠지.

이 사계가 끝날 무렵, 눈이 녹으면 그녀의 곁을 떠나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언제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온다는 걸.

영원한 이별도 아니고, 금방 다시 볼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카락시아 공작령은 시간으로만 따지면 그렇게 오래 머문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있는 장소라서 그런 걸까?

그녀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 겨울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에 용건도 없으면서 힐데가르트를 찾아가고 만다.

그녀를 생각하면 웃음이 번지는 걸 막을 수 없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키스케. 너 힐데가르트를 좋아하는구나.”

“…….”

“어, 진짜야?”

아레스는 어림짐작하며 물어봤으면서도 깜짝 놀랐다.

입술을 꼭 깨문 키스케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가 아레스를 향해 짧게 경고하려 들었다.

“너 그 말…….”

“안 해! 아무한테도 안 할게. 놀릴 일이 아니잖아.”

“……꼭이다.”

키스케는 돌아온 대답에 내심 안도했다.

아레스는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웃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 축하해?”

“그게 대체 무슨 축하야?”

“어차피 황태자로 책봉되면 차기 황태자비에 관한 이야기도 나올 거 아니야.”

“…….”

키스케는 생각도 못 해본 지점을 아레스가 파고들었다.

“폐하께서도 그걸 염두에 두신 게 아닐까?”

“그런 의도로 마법을 배우라고 하시진 않았어…… 아마도.”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든 폐하께선 네 공작가의 균형을 맞추고 제국을 이끌어가시는 분이잖아. 비교적 침체된 공작가를 다시 같은 선상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해 힐데가르트 공녀를 일찍부터 황태자비로 눈여겨보셨다던가?”

“……말도 안 돼.”

키스케가 픽 웃어버리자 아레스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웃을 일일이야? 어쨌든 잘 된 거잖아. 정략혼을 해야 하는 너로서는 호감을 느낀 상대를 반려로 맞을 기회가 흔치 않을 텐데.”

“잠이나 자라.”

“반응 한번 차갑네!”

아레스는 투덜거리면서도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왜? 힐데가르트 공녀라면 내가 봐도 괜찮은 상대인 것 같은데.”

자리에서 일어난 아레스는 꿀벌처럼 빙빙 돌며 제 입가를 쓸었다.

키스케가 치던 피아노 의자에 앉은 그가 건반 뚜껑에 등을 기댔다.

“지금 황태자비에 걸맞은 공녀라면 이베르타의 라비엣, 오브론의 일리야, 아카락시아의 힐데가르트. 이렇게 셋밖에 없잖아?”

괴상한 자세로 온몸을 비틀던 아레스가 건반 뚜껑을 콩, 콩, 콩 치며 말했다.

“셋 다 폐하께서 눈여겨보고 있는 상대일 텐데…… 충분히…….”

“왜 그래?”

“충분히…… 어라?”

아레스가 하던 말을 멈추고 다시 한번 건반 뚜껑을 콩, 하고 두드렸다.

그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레스?”

“잠깐만. 여기 뭔가 이상한 거 같은데?”

아레스는 키스케를 바라보며 건반 뚜껑을 노크했다.

“이상하다니? 피아노 말이야?”

“어. 이거 봐. 소리가 다르잖아.”

자리에서 일어난 키스케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잘 들어봐.”

아레스가 건반 뚜껑을 또다시 두드렸다.

그러자 오른손으로 두드린 곳에서는 콩, 콩 하고 선명하게 소리가 났다. 반면 왼손으로 두드린 곳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안쪽에…… 빈 공간이 있는 건가?”

“그런 거 같아. 비밀 장치인가?”

“힐데는 딱히 그런 말 한 적…… 잠깐. 아레스! 마음대로 만지면 안 돼! 이건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쓰던 물건이니까…….”

그러나 아레스의 손길은 재빨랐다.

그가 건반 뚜껑을 샅샅이 뒤지다가 안쪽으로 누를 수 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그가 손가락에 힘을 주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건반 뚜껑의 안쪽 일부가 분리되었다.

“이건…… 수첩인가?”

“일기장 아냐? 편지도 잔뜩 있는데? 으아! 이 퀴퀴한 먼지 냄새! 창문 좀 열어봐 키스케!”

코를 부여잡던 아레스는 작은 일기장에 손을 뻗은 키스케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자, 대신 일어나 창문을 황급히 열었다.

그사이 키스케는 안쪽에서 쏟아져 나온 물건을 손에 집어 들었다.

남색 표지의 일기장이었다.

겉면에는 L이라는 이니셜이 적혀져 있었고, 손때가 탄 걸로 봐서는 누군가가 오랫동안 쓰던 물건인 게 틀림없었다.

방점과 온점 하나까지, 적혀 있는 모양에는 흐트러짐 하나 없었다.

‘피아노의 원래 주인이 쓰던 건가?’

그때였다.

힐데가르트에게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던 키스케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들어온 건.

[힐데가 어깨를 다쳤다.]

일기장을 덮으려던 손이 멈췄다.

[430년 7월 8일. 강한 빗줄기가 내리니 잊지 말고 범람에 대비할 것.

힐데가 어깨를 다쳤다.

말을 타다가 다쳤다고 둘러댔는데 뻔하지. 아무래도 플람에게 경고를 해야 할 것 같다.

그 애는 내가 마구간 지기에게 물어보기만 하면 거짓말을 간파할 수 있다는 걸 잊어버리는 걸까.

아직도 애 같은 구석이 있다. 언제 철들지.]

[430년 7월 9일. 다행히 빗줄기가 약해졌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플람에게 경고했다. 마법 연구를 하든 뭘 하든 네 마음이지만 힐데를 휘말리게 하지 말라고.

오후엔 힐데가 찾아와서 엄청나게 따져댔다. 잘못한 건 자기인데 왜 플람을 혼내냐는 소리였다.

힐데는 지나치게 플람을 아끼는 경향이 있다. 설마 그 녀석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일기로 쓰고 나니 섬뜩해지는 데 내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듯.]

[430년 7월 10일. 햇볕 따뜻하나 지면 상태가 고르지 않음.

힐데에게 헛소리하지 말라며 쫓겨났다.

아닌 거면 다행이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생각해 보면 가장 소란스러운 건 그 녀석인데.

저택이 너무 시끄러워서 짜증이 난다.]

일기는 그 뒤로도 쭉 이어졌다.

주기는 들쑥날쑥했다.

며칠 연속으로 쓰일 때도 있었고, 두어 달에 한 번일 때도 있었다.

세월을 가늠해 보면,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검술을 배웠다던 할아버지의 옛 지인일지도 모르는 이였다.

[432년 9월 9일. 바람이 많은 날이라 마음이 편치 않음.

힐데가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마탑 일 때문에 바쁘다며 끼니도 대충 때우고 새우잠 자더니.

겨우 정신을 차린 녀석에게 네가 가문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말했더니 크게 화를 냈다.

섭섭하게 들렸던 모양이지.

그런 의미가 아니었는데, 왜 항상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한테 꺼지라는 말을 하다니. 이번엔 또 어떻게 사과를 하지.]

[432년 9월 14일. 흐린 안개 주의.

무사히 화해했다.

사과는 힐데가 먼저 했다. 나도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여전히 가문에 폐 끼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걸로 봐선,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데.

일단 화해했으니 됐다.]

선조와 똑같은 이름을 후대에 물려줄 때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엄청난 공적을 이뤄낸 사람이라서.

둘째는 너무 이른 나이에 요절해 버린 사람이라서.

이 경우엔 후자인 게 분명했다. 팔락팔락 넘긴 일기장의 맨 뒷장이 그걸 증명했으니까.

공허함마저 느껴지는 문장이 일기 안에 갇혀 있었다.

[435년 2월 6일. 날씨 모름.

힐데가 죽었다.

저택이 너무 조용해서 미칠 것 같다.

플람을 죽여버리고 싶다.

모두 꿈이었으면.]

그 뒤는 모두 찢겨 있었다.

‘……레온하르트 공작?’

그 순간.

항상 석연치 않은 형태로 키스케의 가슴속에 남아 있던 퍼즐 한 조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사냥 대회 초대장이 날아오기 전 지주 상단을 방문한 힐데가르트가 사고를 당해서 쓰러졌던 날.

‘레온 오빠, 가지 마.’

그녀가 무의식중에 했던 말을 기억한다. 잠든 채 흘렸던 눈물까지도.

힐데가르트가 처음으로 깨진 거울처럼 보였던 날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녀에게서 위화감을 느꼈던 순간은 많았다.

나이에 맞지 않는 언행, 사리에 밝은 총명함, 혼자서 터득한 천재적인 마법 재능.

뭣보다 아카락시아 공작가를 향한 맹목적인 애정까지.

가주도 아닌 그녀가 80년 전 레온하르트 공작이 팔아치운 광산을 다시 사들어야 한다며 집착했던 건 치기 어린 허풍에서 비롯된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아함을 느낄 만큼 비장한 각오였지.

“키스케, 어디 가?!”

키스케는 남색 표지의 일기장을 손에 든 아레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별채를 나왔다.

그가 정신없이 빠른 걸음으로 향한 곳은 공작가 저택의 2층 복도. 역대 공작의 개인 초상화와 가족 초상화가 걸려 있는 곳이었다.

멈춰 선 키스케는 일기장의 주인을 금방 찾았다.

레온하르트 공작의 초상화 근처에는 옛적에 죽었다는 힐데가르트 공녀의 초상화도 함께 걸려 있었다.

지금의 힐데가르트와는 사뭇 다른 모습임에도, 키스케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서 깨달았다.

“……이제 알겠어.”

힐데가르트.

이게 진짜 네 정체였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