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아이들은 적의와 동정심을 금방 구별할 줄 알았다. 붙잡힌 아이를 위해 한꺼번에 달려들어 소리쳤다.
“도련님, 알렉을 놔주시면 안 될까요?”
“알렉은 죄 없어요!”
“맞아요! 알렉은 그냥…… 우릴 돌봐주려고 한 건데!”
“알렉은 우리 가족이에요! 네? 한 번만 봐주세요.”
소매치기범을 붙잡은 아레스가 난처한 얼굴을 할 즈음, 신고를 받고 달려온 치안대가 다가왔다.
“이런. 또 이 녀석들입니까?”
치안대원은 붙잡힌 아이를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아이들은 히익, 소리를 지르며 곧장 달아났다.
힐데가르트의 얼굴을 알아본 치안대원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저희가 데려가겠습니다. 요즘 이렇게 몰려다니며 소매치기를 하는 통에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저…… 붙잡힌 아이는 어떻게 되나요?”
“평소라면 벌금도 물지만, 이번엔 다친 사람도 있으니 좀 더 무거운 형이 떨어질 것 같습니다.”
자신이 나설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아레스는 난처한 얼굴을 했다.
“……너무 심하게 대하지만 말아주세요.”
치안대원은 대답하기 직전에 힐데가르트를 힐끔 보았다. 그녀가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입을 열었다.
“걱정하실 만큼 험한 꼴을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치안대원이 아이를 데려가려고 할 때였다.
“호외요, 호외!”
마차 한 대가 도로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동그랗게 말아둔 신문을 던졌다.
“다음 황태자로 키스케 전하를 책봉하겠다는 호외입니다!”
“어어?”
놀란 노바가 마차를 바라보다가 재빨리 신문을 주웠다. 키스케는 무심코 안경을 더 깊게 눌러썼다.
호외로 발행된 신문지에는 키스케의 얼굴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겠다는 공회의 발표와 함께.
* * *
“아레스 너 이것 때문에 온 거였어?”
“아니거든? 정말 우연이거든? 진짜 처음 듣거든?”
아레스는 레벤 거리 구경을 끝내고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억울하다며 투덜거렸다.
힐데가르트는 저택에 도착하기 무섭게 로빈에게 의원을 붙였다.
그녀는 괜찮다고 했으나, 하필 머리를 다쳤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루 동안 푹 쉬기로 약속한 뒤에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모두가 한 테이블에 앉았다.
공회 출석을 위해 저택을 비운 미하일 대신, 레디스가 축하를 건넸다.
“키스케 전하, 기사 보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저택으로 들어오시는 데 힘들었죠? 기자들이 엄청나게 많더라고요.”
키스케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마지막에는 미안하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매번 미안해. 나 때문에 공작가의 기사들이 힘들 것 같은데.”
“전혀요. 오히려 기사단의 사기를 북돋울 기회인걸요.”
저녁 식사가 끝나자 레디스는 편히 이야기 나누시라고 말한 뒤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래도 축하한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는데, 그게 오늘이었네.”
아레스가 팔짱을 낀 채 테이블에 기댔다.
“어느 날 갑자기 나한테 무엄하다고 혼내면 안 돼. 황태자 전하가 되어도 너는 너다?”
“그런 건 보통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닌가?”
“맞아. 아레스 공자뿐만 아니라 나중에 스승님도 모른 척하고, 그럼 못쓴다?”
“안 그런다니깐.”
로바르네 황자비가 유폐된 뒤, 어렴풋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나야 막시밀리언에게 며칠 전 편지를 받아서 알고 있었지만…….’
더는 후계 문제를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이었겠지.
힐데가르트는 복숭아 퓨레를 크게 한입 떠먹었다.
후계 문제가 공고히 다져진 건 잘된 일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되었다는 건 바꿔 말해 키스케가 곧 이 저택을 떠나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미하일이 후계자 교육을 받는 것처럼, 키스케도 할 일이 많을 테니까.’
힐데가르트는 왠지 모를 섭섭함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손님방으로 안내했던 아레스와 다시 마주친 건 그로부터 한 시간 뒤였다.
“힐데, 잠시 괜찮을까요?”
“아레스? 어쩐 일이에요?”
“어…… 들어가도 돼요?”
“물론이죠.”
토끼를 쓰다듬고 있던 힐데가르트가 손짓하자, 아레스는 조심조심 다가왔다.
“키우는 거예요?”
“네. 키스케가 사냥 대회에서 잡아준 거예요. 이름은 아방가르드 2세랍니다.”
“키스케가 지은 이름이에요? 그럼 두고두고 놀려줄 텐데.”
“제가 지은 거예요.”
“세상에 그렇게 멋진 이름은 처음 들어봐요.”
힐데가르트는 아레스의 태도 변화를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실은,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요.”
“소매치기요?”
“네. ……다치신 분은 괜찮으세요?”
손님으로 찾아온 상대가 일개 사용인의 안부를 묻는 경우는 신선했다.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빈이라면 괜찮아요. 오늘은 안정을 취하게 했으니까요.”
“다행이네요.”
“그걸 물어보고 싶어서 온 건 아니죠? 무슨 일 때문에 그래요?”
“…….”
토끼를 쓰다듬던 아레스는 곧 입을 열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소매치기범 말인데…… 처벌 대신 그 아이들을 몬테를로 공작령으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시려고요?”
“전과가 있거나 범죄 조직에서 솎아내서 쓸모없어진 아이들을 몬테를로에서 따로 교육하는 곳이 있어요. 거기로 보내면 좋을 거 같아서요.”
힐데가르트는 아레스를 빤히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처벌하지 않고 보내는 건 안 될 것 같아요.”
“…….”
“벌을 내리지 않으면 다음번에 똑같은 일이 또 일어날 거에요. 오늘처럼 사람을 밀쳐서 상해를 입혔는데도 어리다고 봐준다면 다음엔 더 크게 일을 벌일 수도 있어요.”
“그건…….”
아레스는 그녀의 단호한 말에 내심 놀랐다. 할 말이 궁해진 그가 고개를 숙였다.
“대신 처벌이 끝나면 그때 데리고 가는 건 허락할게요.”
그제야 아레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게 신경 쓰였던 거예요?”
“봤는데 못 본 척할 수는 없잖아요. 아카락시아 공작령에도 피해를 끼치는 일인데.”
“아레스는 정이 많네요.”
“제 눈에 보이는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것뿐이에요.”
살짝 바보처럼 착한 부분도 있고.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그런 바보들을 좋아했다. 그녀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번에 찾아온 것도 실은 키스케가 걱정돼서 온 거죠?”
“그게…… 으음…….”
아레스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끄덕였다.
“맞아요. 실은 지금쯤 키스케가 엄청나게 침울해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거북이 등껍질에 들어간 상태일 줄 알았거든요.”
그렇기에 깜짝 놀랐다.
황궁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황궁 내에서도 잘 돌아다니지 않았던 키스케였다.
하지만 레벤 거리를 함께 돌아보는 모습은, 독살 사건을 겪고 난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키스케가 잘 지낸 거 같아서 놀랐어요. 아니, 그, 다행이긴 한데! 당연히 잘 지내는 게 좋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그렇게 변명할 거 없어요.”
아레스의 눈이 보기 좋게 접혔다.
“힐데 덕분이에요. 황궁에 혼자 있을 때보다 몰라보게 많이 웃던데.”
그건 힐데가르트도 느끼고 있었다.
시종일관 투덜거리며 말꼬리를 잡던 키스케의 태도가 은근히 변했다.
“그 녀석답지 않게 여유도 생긴 것 같고요. 무슨 마법을 부린 거예요?”
“잘 모르겠어요. 딱히 한 건 없는 거 같은데.”
토끼를 쓰다듬는 힐데가르트의 손길이 느려졌다.
“오히려 제가 키스케 덕에 많이 웃었는걸요.”
미하일과 레디스는 물론 그녀 본인조차 낯설게 느낄 웃음이 입가에 머물렀다.
* * *
키스케가 머무는 별채로 아레스가 돌아왔다. 그가 읽던 책을 내려놓았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응. 아이들은 처벌이 끝나면 몬테를로 영지로 보내주시겠대. 근데 너 이 시간에 안 자도 괜찮아?”
“원래 일어나 있을 시간이야.”
“그러다 키 안 큰다.”
키스케는 아레스를 향해 푹신한 쿠션을 던졌다.
한 아름 쿠션을 안은 아레스가 헤헤 웃으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한가로이 책을 읽고 있는 키스케의 얼굴에는 근심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때, 저를 돌보아주던 시녀에게 끔찍한 일을 당했을 뻔했던 키스케는 불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노바의 부탁으로 실컷 검을 섞거나 데리고 돌아다니며 키스케를 피곤하게 만든 아레스였다.
그렇게라도 해서 친우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작정이었는데…….
“키스케. 네가 죽을 뻔했다는 소식 듣고 걱정 많이 했거든.”
“…….”
“그런데 얼굴 보니 이제 알겠다. 너 정말 괜찮은 거구나.”
두 사람의 시선이 조용히 얽혔다.
얼마 후 키스케가 끄덕였다.
“응. 숙모님에 관한 일은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
“예전처럼 내가 뭔갈 잘못해서, 미움 살 만한 일을 했는지 돌아보지 않을 거야.”
‘네가 겪은 일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면서 웃어넘기게 될 그때까지 곁에 있어줄게.’
키스케는 그의 반짝이는 열쇠처럼 가슴 속에 남은 한마디를 떠올리며 웃었다.
“내 곁에 남아준 사람에게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
“왜냐면 나 자신을 소중하게 돌보지 않으면, 나를 아껴주는 사람을 슬프게 만들 테니까.”
그것이 키스케가 힐데가르트를 만나, 사계의 끝에서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사람을 믿고 사랑하게 되는 일은 여전히 두렵고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배신이 뒤따르고 보답받지 못해도 괜찮았다.
힐데가르트를 좋아한다.
스스로를 비출 수 없는 금이 간 거울 같은 그녀의 틈새마저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