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차라리 잘됐어. 나로선 이 기회를 이용하면 되니까. 안 그래도 오브론 대공에게 연락하려 했는데…….’
이 떠들썩한 소식을 오브론 대공이 모를 리 없다.
로바르네 황자비가 독살을 시도하기 전에 황제의 저주에 관여했다는 건, 대공의 손녀딸을 저주한 사건에도 연루되어 있다는 걸 나타낸 거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공과 카유크는 그 사실을 눈치챘겠지.’
물론 로바르네 황자비는 그 모든 일이 제가 꾸민 일이 아니라며 부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사관을 봐가며 ‘모른다’라는 말과 ‘칼란도 공작이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한 것’이라며 억지를 부렸다.
실종된 사람을 탓해야 저를 향한 추궁이 줄어들 테니 그런 거겠지만, 그 모습이 좋아 보일 리 없다.
오브론 대공가로서는 랑케르트 출신의 황자비와 랑케르트 공작가 그 어느 쪽과도 원만한 관계를 이어갈 이유가 사라진 셈이다.
‘그럼 이쯤에서 오브론과 랑케르트의 관계를 조금 더 크게 흔들어줄까.’
힐데가르트의 펜이 종이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대공 각하께.
아름다운 가을의 선홍빛이 사그라들고 겨울이 찾아오는 날씨입니다.
부디 따뜻한 벽난로 앞에서 이 편지를 읽어주시고, 끝까지 읽으신 뒤에는 태워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힐데가르트는 서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오브론 대공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첫째는 앞선 사건이 랑케르트와 로바르네 황자비가 흑마법사의 힘을 빌려 벌인 짓이라는 것.
둘째는 지주 상단 사건과 랑케르트가 얽혀 있었고, 아카락시아 공작가 또한 그들의 공격을 받은 점이었다.
플람과 단테에 관한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대공가에서 직접 범인을 찾겠다고 나섰다간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어.’
여차하면 칼란도 랑케르트 공작처럼 희생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문제의 흑마법사를 붙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지만, 몇 년이 걸리더라도 끝까지 추적할 생각입니다.]
거기까지 적은 힐데가르트는 펜을 내렸다.
플람은 저를 반드시 만나러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은…… 플람의 진의를 확인해야 해. 그 애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벌인 건지도.’
만약 단테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플람이 ‘진짜’ 힐데가르트의 영혼에 손을 댄 거라면…….
재는 재로,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는 게 순리이자 합당한 이치일 것이다.
그건 플람과 자신 모두에게 통용되는 이치다.
거기까지 생각한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단테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몰라. ……우선 당장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해. 게이트 사업!’
그녀가 편지지를 한 장 더 뽑아 들었다.
이동 게이트 사업을 시작할 기반이 모두 갖춰졌다.
새롭게 개량한 마법진과 사업에 필요한 현금을 확보할 지주 상단, 게이트를 관리할 엘리사 일족까지.
남은 건 오브론과 아카락시아 공작령을 연결하는 게이트를 설치하고, 안전을 시험하는 것뿐이다.
그녀가 대공에게 보낼 사업 구상안을 적고 있을 때였다.
“힐데, 잠깐 들어간다.”
“응? 왜 그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레디스였다.
“내일 아침에 테리오 총괄이 영지로 돌아간다나 봐.”
“정말? 하긴 사냥 대회가 끝났는데 오래 머물긴 했지…….”
“우리도 슬슬 돌아가야 해. 형이 너 걱정하느라 정신을 바깥에 빼놓고 돌아다닐걸?”
“과장이 지나친데……?”
황당하게 중얼거린 힐데가르트였으나, 레디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사냥 대회가 끝난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 신문에서는 독살 사건부터 랑케르트 공작의 실종으로 지면이 한참은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 둘밖에 없는 동생이 돌아올 기색이 없으니 후계자 수업도 손에 잡히질 않겠지.
“으으음…… 알겠어. 그럼 우리도 며칠 내로 올라가자.”
“그래도 괜찮겠냐?”
“혹시 모르니 키스케에게 물어볼게. 수도로 돌아가겠다고 할 수도 있으니까.”
키스케는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이었다.
일을 벌인 로바르네 황자비야 수도로 압송된다지만, 키스케는 당장 환자인데다 막시밀리언도 억지로 부르거나 돌아오라는 황명을 내리지는 않았다.
‘현명하지. 지금은 수도로 올라가 봤자 시끄럽기만 할 테니까.’
예전부터 생각한 건데 황궁은 사람이 지내기에 정서적으로 참 좋지 못한 장소다.
“전하도 우리랑 같이 돌아간다고 하시지 않을까?”
“왜?”
“오빠의 감 같은 거야.”
그리고 레디스의 감은 제법 잘 맞아떨어졌다.
몇 시간 뒤, 키스케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으니까.
“나도 함께 돌아갈래.”
이제 죽 말고도 다른 걸 먹을 수 있게 된 키스케가 약 그릇을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어. 잠깐 수도로 돌아가서 할아버지의 얼굴이라도 뵙고 올까 했는데…….”
“했는데?”
“저쪽의 벽돌담 보여?”
키스케의 손가락이 침실 너머 창문으로 향했다.
성내를 빙 두른 빨간 벽돌담 위에는 침입자를 막기 위해 날카로운 쇳조각을 박아 둔 상태였다.
“어제 하녀로 변장하고 저 담을 넘어오려다가 다친 기자가 들것에 실려 가더라.”
“……집에 가자. 듣기만 해도 골치 아프네.”
“할아버지껜 따로 사람을 보냈어. 편지도 들려 보냈고.”
“무슨 편지?”
“숙모…… 아니, 황자비의 처벌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으실 거 같아서. 내가 생각하는 것만 전해드렸어.”
“그래? 잘했어!”
키스케는 그녀의 말에 픽 웃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면서 칭찬부터 하고 보는 거야?”
“네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했다는 거잖아.”
“…….”
“고생했어, 키스케. 이만 돌아가자.”
돌아가서 할 일이 많다.
엘리사 일족의 이주를 마무리하고, 브린힐드 상단과 이오타를 연결해 주고…….
‘성검을 찾아야지.’
필요하다면 캄파넬의 땅을 모두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단테보다 먼저 확보해야 하는 물건이다.
플람도 계속 찾아보았지만, 소득이 없었으니 이만 아카락시아 영지로 돌아가는 수밖에.
“……힐데, 너 눈이 반짝이고 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 목적을 위해서라면 삽과 호미로 땅을 갈아엎는 데 오십 명쯤 되는 인부를 투입할 계획을 하고 있어.”
“그게 대체 무슨 생각이야.”
키스케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힐데가르트는 그가 보낸 편지에 어떤 내용이 적혀져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해 겨울.
황제가 로바르네 황자비의 처우를 결정할 때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황실의 일원이었던 로바르네 랑케르트 드롯셀마이어를 폐위하고, 그 신변을 이베르타 공령의 오에노스 수도원에 두도록 한다. 외부와의 접촉은 물론 외출을 금지하며 자식과의 만남은 삼 년에 한 번으로 하겠다. 본래 사형으로 다스려야 할 일이나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기에 내린 관대한 처사임을 잊지 말라.”
로바르네 황자비는 간신히 사형만을 면했다.
사적인 재산은 물론 그녀를 두둔하는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동쪽 끝 수도원에 평생을 의탁하게 되었다.
사실상의 유폐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그녀의 입김이 닿았던 랑케르트 출신 관료 전원이 면직당했다.
아들인 카라딘은 국무 회의 중이었던 황제를 찾아가 난동을 부리기까지 했으나, 한 번 내려진 황명은 번복되지 않았다.
그렇게 조용한 겨울이 찾아왔다.
* * *
따뜻한 브랜디가 간절해지는 날씨였다.
오브론 대공은 황궁 밖을 나서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은 그를 향해 누군가가 급히 달려왔다.
“각하!”
“……마우제네.”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제대로 된 작위 계승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급히 랑케르트의 다음 가주가 된 마우제네였다.
그녀는 요 한 달간 제국을 요란하게 만든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대공과 마찬가지로 황궁을 찾은 이였다.
“각하. 바쁘신 건 알지만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순 없겠습니까?”
“자네가 무슨 일로 나를 찾는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게.”
“이 자리에서는 곤란합니다.”
오브론 대공은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대체 어떤 일로 날 불러세우는 건지 모르겠군. 이미 수도원으로 떠난 로바르네 폐황자비를 위해서는 아닐 테고, 내 귀여운 막내 손녀딸의 건강을 빌어주기 위해서도 아닐 것 같은데.”
“각하.”
마우제네는 예상보다도 날 선 반응에 당황했다.
이번 일만 아니었다면, 오브론 대공은 아버지를 갑작스레 잃고 허겁지겁 가주가 된 그녀에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남겨주고도 남을 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호의를 기대할 수 없는 듯했다.
“저희 가문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로 심기가 불편하실 걸 압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뵈려 했습니다. 한데 폐하께서…….”
“용건만 말해주겠나?”
“……오브론과 랑케르트의 목재 거래 철회를 재고해 주실 수 없겠습니까?”
오늘 아침, 오브론 대공가에서 사람이 왔다.
그간 삼십여 년 넘게 이어온 석재와 목재 간의 교환 거래는 물론, 목재 매입 거래까지 끊겠다는 내용이었다.
자다가 일어난 마우제네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을 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그녀는 황급히 예복을 차려입고 대공을 만나기 위해 입궁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다면 이야기로 풀어 풀어나 간다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는데…….
“거절하네.”
대공의 반응은 싸늘함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곧바로 바늘 하나 통하지 않을 만큼 깐깐한 대답이 날아왔다.
“황실을 위협하고 내 손녀딸의 목숨을 앗아가기 위해 사특한 수단을 쓴 가문에는 오브론의 돌조각 하나도 내 손으로 넘겨주고 싶지는 않군.”
“하지만……!”
“돌아가게.”
아무리 계승식조차 치르지 못하고 가주가 된 마우제네라 한들, 가문의 대표로서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문전박대나 다름없는 상황에 마우제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랑케르트의 목재, 정말로 필요가 없으십니까?”
“…….”
“올겨울은 비축해 두신 목재로 버티실 수 있으시겠지요. 하지만 내년은요? 그다음 해는 또 어쩌실 생각입니까?”
랑케르트의 목재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압도하는 수준이었다.
돌산이 가득한 오브론이 랑케르트 아닌 다른 영지의 목재를 사 온다는 건 그만큼 번거로움과 보이지 않는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소리였다.
“각하께선 합리적으로 생각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까? 랑케르트에 대한 불만은 차지하더라도 오브론의 손해를 생각하셔야……!”
“그만!”
소리 나게 지팡이를 내려찍은 오브론 대공의 살벌한 기세에 마우제네의 입이 닫혔다.
“그렇게 걱정해 줄 필요 없네. 목재에 관해서는 이미 새로운 거래 상대를 찾았으니 말일세.”
“예?”
“내년부터 오브론은 아카락시아 공작가와 목재 거래를 시작하기로 했네.”
“……진심으로 하는 말씀이십니까?”
마우제네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카락시아에서 목재를 옮기려면 랑케르트에서 옮기는 것 보다 두 배는 시간 걸립니다.”
“정말 그럴 것 같은가?”
순간, 오브론 대공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마우제네는 도무지 대공에게서 흘러나오는 여유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여우가 사자를 걱정해 주는 모습이로군. 아, 물론 오브론이 사자일세.”
“각하.”
“돌아가게, 마우제네.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의견이라면 결정하지도 않았을 걸세.”
대공은 제 앞에 선 마차에 오르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심 어린 충고를 던졌다.
“돌아가서 자네가 놓치고 있는 건 없는지 확인해 보게.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놓쳐서 도태되기 전에 말이네.”
“…….”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마우제네를 내버려 두고 대공이 탄 마차가 빠른 속도로 황궁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