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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103)화 (103/166)

100화

키스케는 잠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그러나 생각보다도 먼저 몸이 반응했다. 다시 한번 울컥, 하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얼마든지 나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세요.”

로바르네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자기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서 눈이 먼 여자. 난 카라딘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어요.”

“으, 욱…….”

다시 한번 키스케의 입안에서 피가 쏟아졌다.

허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한 키스케는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넘어졌다.

반면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로바르네는 벽난로로 다가갔다. 그녀가 촛대를 손에 쥐었다.

“내가 왜 그랬는지, 정말 몰라서 물었던 건 아니겠죠? 아니면 설마 알면서도 예쁘게 봐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나요?”

그녀는 숨을 고르며 또 한바탕 피를 토한 키스케를 차분히 내려보았다.

“이런, 일을 벌이면…….”

“걱정하지 말아요. 증인이나 증거는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니까.”

로바르네는 문을 걸어 잠근 뒤 커튼과 침구에 불을 놓았다.

“지금 중요한 건 네가 나를 위해 얼마나 빨리 죽어주는지.”

“…….”

“그거 하나뿐이란다.”

키스케의 어깨가 크게 오르내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한 움큼 피가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까지…… 왜.”

“…….”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지?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언제부터였더라. 눈앞의 상대가 갈수록 차가워지기 시작한 게.

“……바 ……노바!!”

키스케는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노바의 이름을 불렀다.

그가 문을 향해 기어가자 로바르네가 그의 어깨를 세차게 걷어찼다.

키스케의 몸이 장식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장식장에 있던 잡다한 물건이 한 번에 쏟아졌다.

그중에는 키스케의 눈에 익은 물건도 있었다.

“이건…….”

그가 힐데가르트에게 선물했던 하얀 꽃 모양의 머리 장신구였다.

물에 빠졌을 때 잃어버렸다는 물건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키스케가 그녀의 장신구를 손에 쥐었다.

그의 눈에서도 불꽃이 튀었다.

“……대체, 힐데에게 무슨 짓을……!”

그러나 대답 대신, 로바르네가 문을 걸어 잠그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지금은 네 걱정을 하는 게 우선일 텐데?”

불티가 사방으로 날아다니기 시작하는 가운데, 유독 섬뜩하게 들리는 금속음이었다.

춤추듯 번지기 시작한 화염은 주변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카펫을 살라먹던 불꽃은 매캐한 연기와 함께 시야를 흐렸다.

로바르네는 기억하지 못할, 오직 키스케에게만 추억이 된 기억은 주마등처럼 스쳤다.

‘괜찮아 키스케. 엄마는 금방 나을 거야. 다 나으면 야유회를 열까? 황자비님이랑 카라딘도 불러서…….’

키스케가 지금보다도 훨씬 어렸을 때였다.

금방 다 나은 줄 알았던 어머니는 야유회 약속을 잡은 뒤 며칠 못 가 다시 쓰러졌다.

키스케는 매일같이 어머니를 찾아갔으나 돌아오는 말은 정중한 면회 거절이었다.

약속했던 야유회는 제 몫까지 대신 재미있고 놀고 오라며 어머니가 그를 보냈으나, 키스케는 그럴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억지로 탄 마차였다. 속도 모르고 옆자리에서 신나게 떠드는 카라딘이 싫었다. 제 등을 억지로 떠미는 시종도 미웠다.

날씨는 화창했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은 아름다웠으나 미소는커녕 울고만 싶었다.

‘아빠에 이어서 엄마까지 이대로 잘못되면 어떡하지.’

저대로 엄마가 일어나지 못하면, 나는 어떡하지.

쨍한 햇볕과 푸른 하늘은 키스케의 우울을 부채질했다.

제 마음은 이렇게 가눌 길이 없이 불안하고 두려운데, 세상은 관심조차 없다는 듯 맑고 화창한 게 비참했다.

‘형님, 왜 안 가요? 같이 가서 사과 따요!’

‘……난 됐어.’

‘저기 엄청 많이 열려 있단 말이야! 형님이 나 들어줘야 해요.’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가.’

‘싫어! 재미없단 말이야! 얼른 와요! 빨리 오라고!’

‘싫다고 말했잖아! 저리 가라고! 좀 가란 말이야!’

불안이 분노로 변한 건 한순간이었다. 키스케는 저를 귀찮게 굴던 카라딘에게 화를 냈다.

그러자 씩씩대던 카라딘은 키스케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작은 싸움은 금방 몸싸움으로 번졌다.

‘카라딘! 키스케!’

두 사람을 데리고 온 로바르네는 기겁하며 달려와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악을 쓰며 울면서 키스케를 향해 손가락질하던 카라딘을 시종이 데려가자, 남은 건 키스케뿐이었다.

키스케는 숙모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저를 크게 꾸짖을 거라 생각했던 숙모가 꺼낸 첫 말은…… 뜻밖에도 따뜻한 권유였다.

‘괜찮아요?’

로바르네는 그와 눈을 맞추며 손끝으로 맺혀 있던 눈물을 닦아주었다.

‘키스케. 우리 말을 타러 갈까요?’

‘……네?’

그렇게 말한 로바르네는 꼭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저를 안장에 올려주었다.

그녀는 다 괜찮을 거라며 키스케를 쓰다듬어준 뒤, 힘껏 말에 박차를 가했다.

숙모는 키스케가 엉망으로 울려도 들리지 않을 곳까지 말을 몰았다. 그리고 커다란 사과 한 알을 직접 따서 키스케에게 건넸다.

‘숙모님. 제가…….’

‘테레사 님은 금방 나을 거예요.’

‘…….’

‘정말이에요. 괜찮을 거예요.’

풀 죽은 아이에게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어른은 단순한 위안, 그 이상이었다.

로바르네가 건네준 사과 한 알은 크고 탐스러웠다.

달디단 사과를 으적으적 씹던 어린 키스케는 곧 엉엉 울었고, 로바르네는 계속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숙모가 좋은 어른이었을 때가 있었다.

가장 힘들었을 때 보여주었던 다정함을 믿고 싶었다.

저에게 이렇게 구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래도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오랜 시간 참아왔다.

그러나 바닥에 진득하게 눌어붙은 핏자국 위로 다시금 벌건 피가 쏟아졌다.

입안이 비리고 텁텁했다. 목에서부터 엉겨 붙은 것 같은 피 때문에 숨쉬기가 힘겨웠다.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던 키스케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애쓸수록 힘이 빠졌다.

‘나가야 하는데…….’

시야가 쉴 새 없이 핑핑 돌았다.

“빨리 죽어. 빨리…….”

“…….”

키스케의 몸에서 경련이 일어나거나 말거나, 로바르네는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정말 내가 죽기를 원했던 거구나.’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게 독 때문인지, 불길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다정하지라도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당신을 마음 편히 미워할 수라도 있었더라면…….

잘못된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다시 예전처럼 숙모가 다정하게 대해주길 바랐다.

‘그냥…… 이대로 다 놓아버리면…….’

숨이 차오른 키스케가 몸을 구부리며 누웠다. 희뿌연 연기 때문에 의식이 흐렸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에는 노바의 고함이 섞여 있었다. 어렴풋이 칼 부딪치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저 문을 열고 나가도 반겨줄 사람이 있을까?

깨진 항아리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주워 마시는 개처럼, 제게 주어질 리 없는 다정함을 갈급하는 꼴이란 이토록 형편없었다.

어룽어룽 눈물이 고여 있던 눈이 감기려던 때였다.

우르릉, 하고 하늘에 수상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어가는 키스케조차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강력한 마력이 움직이고 있었다.

천둥이 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맑았던 하늘이 금세 회색 옷을 입었다.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이 사선으로 떨어지질 즈음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졌다.

로바르네는 무심코 비명을 질렀다.

“키스케!”

비바람과 함께 들이닥친 상대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힐데…….”

창문턱을 짚고 방 안으로 들어선 힐데가르트가 거센 열기에 무심코 입가를 가렸다.

그녀는 곧장 불길로 뛰어들었다. 동시에 거센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키스케는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다가온 사람에게 손을 뻗었다.

피가 잔뜩 묻은 그 손을 힐데가르트는 쳐내지 않았다.

“괜찮아.”

그녀가 바닥에 쓰러져 있던 키스케를 끌어안았다.

거센 불길이 마법으로 순식간에 멎어 들기 시작했다. 누구에게서 비롯된 마법인지는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힐데가르트가 키스케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를 보고 곧바로 상황을 짐작한 듯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 키스케.”

로바르네가 사나운 괴성을 지르며 힐데가르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너…… 여길 어떻게!”

그러나 로바르네의 움직임은 얼마 안 가 멈췄다.

힐데가르트의 마법이 그녀의 몸을 무겁게 내리누르며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탓이었다.

“안 돼!”

엎드린 로바르네는 뒤늦게 도망치려 했으나, 사방이 투명한 벽으로 막힌 것처럼 한 걸음도 나아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이거 놔, 당장 이 마법을 풀지 못해?!”

쏟아지는 뇌우 속에서 그는 정신을 잃었다.

마침내 힐데가르트에게 도움을 청했던 노바가 잠긴 문을 뜯어내고 들어오는 그 순간까지.

키스케는 쥐고 있던 장신구를 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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