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랑케르트 공작이 실종된 지 이틀째가 되었다.
힐데가르트는 여전히 플람의 행방을 수소문하거나, 추적 마법으로 흑마법사의 흔적을 찾았으나 별다른 성과는 거두지는 못했다.
“너, 괜찮은 거 맞지?”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지만 힐데가르트는 피식 웃었다.
“당연히 괜찮지! 어제도 물어보더니 오늘 또 물어보는 거야?”
“……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놀랐단 말이야. 왜 마법사가 물에 빠지는 거야? 이왕이면 물 위를 걸으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마법사는 신이 아니거든? 물에 빠지는 거 정도야 양호한 거지. 그리고 말했잖아. 마력의 우물이 있어서 쉽지 않았다고.”
산책로 벤치에 앉은 힐데가르트가 옆자리를 두드리자, 키스케가 냉큼 앉았다.
“……나도 갈 걸 그랬어.”
“뭐?”
“보트 투어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을 깨는 게 아니었는데.”
“다음에 같이 가면 되지 뭘.”
힐데가르트는 그를 달래듯 말했다.
“둘이서 사이좋게 물에 빠지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야?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겼으면 동굴은 그대로 폐쇄되었을걸?”
힐데가르트가 활기차게 말했지만, 키스케의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한참 뒤 키스케가 꺼낸 말은 다소 뜬금없었다.
“그렇지만…… 너 거기서 무슨 일 있었잖아.”
“…….”
얜 어디에서 이렇게 확신을 얻고 말하는 걸까.
힐데가르트는 신기한 기분이 되었다.
“갑자기 넘겨짚는다?”
“평소보다 기운도 없고, 레디스한테 들었는데 아침도 거의 안 먹었다며. 거기에 매일 하던 마력 단련도 하루 쉬었잖아?”
“…….”
힐데가르트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체내에 마력을 쌓는 단련을 거르지 않았다.
그건 키스케가 마법사가 되어서 알게 된, 힐데가르트의 드러나지 않는 노력이었다.
“무슨 다른 고민거리라도 생긴 거 아니야?”
“어…… 그…… 이젠 괜찮아. 얼굴에 그렇게 드러났나?”
힐데가르트는 제 뺨을 손으로 몇 번 쓸었다. 그러자 키스케가 재빨리 말했다.
“드러나서 한 말이 아니야. 널 계속 보고 있으니까 아는 거지.”
“…….”
힐데가르트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릴 것 같아서, 키스케는 한마디를 툭 던졌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해도 돼.”
“그건 내가 너한테 한 말이잖아.”
초여름 무렵, 한창 키스케와 수업이 힘들어서 티격태격 다툴 때 했던 말이었다.
‘그대로 듣고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이 제자 녀석…… 은근히 섬세한 구석이 있단 말이지.
키스케를 바라보던 그녀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
“힘든 건 아니야. 그냥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겼는데, 누구한테 이야기하기엔 사정이 좀 복잡해서 그래.”
“들어줄게.”
“너무 긴 이야기라서 말하기는 좀 그렇다. 그럴 마음이 들면 그때 말할게.”
“…….”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걱정할 거 없어. 지금 키스케 너랑 이야기하니까, 기분이 괜찮아진 거 같아.”
“볼 찌르지 마라. 손가락 내려놔라.”
힐데가르트는 킥킥 웃으며 손을 내렸다.
“그보다 키스케 넌 별일 없었어? 황자비 전하가 불렀다면서. 안 좋은 말 들은 거 아니야?”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뺨이라도 때린 건 아니겠지?
힐데가르트가 꼼꼼하게 키스케를 살피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 그냥 앉혀놓고 시간만 허비하게 만든 게 다야.”
“무슨 소리야? 그게 다라니! 일부러 시간 허비시킨 거잖아!”
“그 정도면 가벼운 심술이지 뭐.”
“그게 가볍다고?”
그런 건 보통 도가 넘은 치졸함이라고 하지, 가벼운 심술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텐데.
“나도 당연히 그런 일을 겪는 건 싫어. 그래도…….”
키스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운 미간이 찡그려지더니 얼굴이 하늘로 향했다.
“키스케,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사람 궁금해지게.”
“……숙모님과 내 사이가 좋았던 적도 있었어.”
“정말? 그건 의외인데.”
“꽤 예전이지만 말이야.”
키스케의 입에서 실낱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숙모님이 그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돼.”
“……밉지는 않고?”
그 순간 키스케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스쳤다.
차라리 그럴 수 있으면 편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키스케.”
덜컥 마음이 무거워진 힐데가르트가 그의 팔을 잡았다.
“로바르네 2황자비 전하는 조심해야 해.”
“…….”
막시밀리언의 저주가 플람과 랑케르트 공작가, 특히 로바르네 황자비에게서 비롯된 거라면 키스케가 황자비와 접촉하게 내버려 두는 건 위험했다.
“황자비 전하뿐만이 아니야. 랑케르트를 조심해. 황제 폐하의 저주와 연관되어 있을 수도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그래.”
“진짜 알아들은 거 맞아?”
힐데가르트가 팔을 꼭 쥔 채 대답을 채근하자,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비 전하가 불러도 가지 마. 어차피 진짜 중요한 용건이 있으면 널 찾아올 거야.”
“어차피 며칠 있다 다시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돌아가잖아. 조심이고 뭐고, 별일 없을 거야.”
그러나 키스케가 장담했던 것과는 달리, 절박한 여인의 간계는 그림자를 타고 넘어왔고, 해일처럼 그를 덮쳤다.
* * *
키스케가 로바르네의 공관으로 들어선 건 늦은 시각이었다.
행방이 묘연해진 랑케르트 공작을 찾기 위해 티모시 영지 측 사람들이 정신없이 수색 중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차를 마시자니.
키스케는 도저히 로바르네의 심중을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카락시아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한 번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에 초대에 응했다.
로바르네의 허락이 없었기에 노바는 동석하지 못하고 공관 바깥에서 대기 중이었다.
“와주어서 고맙군요.”
로바르네가 우아한 손길로 자리를 권했다.
“그저께는 너무 바빠서요. 갑자기 인사하러 오는 사람이 많았지 뭐예요. 불러놓고 미안하게 되었네요.”
“……예.”
“그간 잘 지냈던 것 같아 마음이 놓여요, 키스케.”
“숙모님께서도 건강하셨던 것 같아 다행입니다.”
겉치레 인사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키스케가 자리에 앉자 로바르네는 미리 준비해 둔 차를 손수 따랐다.
찻주전자를 기울이는 로바르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사냥 대회 소식은 들었어요. 우승을 목전에서 놓치다니 아쉽게 되었네요.”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요.”
로바르네의 웃음소리는 꽃망울 터지듯 화사했다.
“키스케는 예전부터 사냥을 좋아했지요.”
키스케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알고…… 계셨습니까?”
“물론이죠. 그대와 함께 말을 탔던 사람이 나였던 걸 잊었나요?”
“기억합니다.”
여섯 살 무렵, 혼자서 말을 타는 건 위험하다는 말에 키스케가 생떼를 부리며 주변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을 때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난처해하고 있을 때였다.
로바르네는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다가오더니, 함께 타자며 키스케를 안장 위에 올려주었다.
그때의 로바르네는 정말 멋진 사람이었다.
숲에서 나고 자란 랑케르트 출신답게, 그녀에게는 늠름함과 당당한 기백이 있었다.
키스케는 제 숙모가 직접 고삐를 쥐고 어디로든 달려갈 수 있는 멋진 기수(騎手)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마냥 멋지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기억 못 할 리 없죠. 숙모님이 그렇게 다정하셨던 적이 있다는 걸, 기억해서 괴로우니까요.”
“…….”
로바르네의 웃음기가 잦아들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옥처럼 하얀 손은 조용히 키스케의 코앞까지 찻잔을 밀어줄 뿐.
“……오늘은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숙모님의 초대에 응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키스케가 깊게 심호흡했다.
“저에겐 정말 중요한 일이니 얼버무리지 말고 대답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일이죠?”
로바르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었다.
그는 도자기 인형처럼 우아한 숙모를 똑바로 보았다.
“숙모님. 저에게 왜 그러셨습니까?”
“…….”
“다정하셨잖습니까. 카라딘만큼은 아니었더라도…… 제게도 다정했던 때가 있으셨잖아요.”
로바르네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숙모님은 제가 존경할 수 있는 어른이셨습니다. 한때는요.”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간 숙모님께서 제게 가혹하셨던 이유가, 단순히 카라딘이나 황위 때문만은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제게 부족함이 있어서 더 다그칠 작정으로 그러시는 거라고 믿고 싶었어요.”
“…….”
“하지만 그걸 차지하더라도, 그저께 같은 괴롭힘은 치졸합니다.”
키스케는 정말 오랜만에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아버지는 항상 바쁘셨죠. 제가 가족처럼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숙모님뿐이었어요.”
“…….”
“숙모님도 그걸 아셨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언제부터였던가. 오팔처럼 맑았던 숙모의 눈에 낯선 적의가 깃들었던 게.
어느새 불순물이 가득 낀 보석처럼 그 속내를 들여다보는 게 어려워진 사람이었다.
“왜 그러냐니요.”
차분한 목소리에 가슴이 술렁거린다고 생각했던 건 잠깐이었다.
차가워지는 손발과 달리, 가슴 안쪽이 갈퀴로 긁어내듯 쓰라리고 뜨거웠다.
키스케가 손바닥으로 막아낸 헛구역질은 한 번뿐이었다.
무언가가 울컥하고 목구멍을 역류하더니 결국 입 밖으로 쏟아졌다.
“당연히 카라딘의 황위를 위해서죠. 무슨 대답을 기대한 건가요?”
내장 조각을 토해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새빨간 토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