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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99)화 (99/166)

96화

“플람!”

힐데가르트는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부릅뜬 랑케르트 공작의 눈이 뒤로 돌아갈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만해, 플람!”

저러다간 정말 죽을 거라는 말을 하려던 순간이었다.

랑케르트 공작을 움켜쥐고 허공에 매단 그림자가 다시금 땅으로 쑥 꺼졌다.

새카만 기운은 여전히 플람과 공작의 주변에서 맴돌았지만, 힐데가르트의 말 한마디에 얌전해졌다.

“네, 스승님.”

공작은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는지 미약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게요.”

플람의 웃음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티 없이 맑았다.

“이젠 정말 안 할 테니까…… 안 그럴 테니까.”

“…….”

“용서해 주실래요?”

플람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스승님.”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묻던 힐데가르트는 몇 번 더 기침을 터뜨렸다.

그러자 플람이 걸치고 있던 로브를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그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닌데, 그때는 정말로 너무 화가 나서…….”

플람은 무릎을 굽혔고, 그것도 모자라 바짝 엎드렸다.

그가 매달리는 아이처럼 힐데가르트를 붙잡았다.

“잠깐만. 너 지금…….”

“기억 못 하시는 거예요? 저희가 마지막으로 나눴던…….”

“그렇게 오래전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잖아!”

“…….”

아연한 힐데가르트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플람. 너 랑케르트 공작과 아는 사이야?”

“…….”

“네가 랑케르트 공작가에 힘을 빌려준 흑마법사야? 아니지?”

“…….”

“대답해!”

힐데가르트가 그를 채근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침묵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라고 말해, 제발…….”

랑케르트 공작에게 힘을 빌려준 흑마법사는 오브론 대공가도 모자라 막시밀리언을 저주했다.

상단을 통해 아카락시아 공작가를 무너뜨리려 하는 데 가담했다.

만약 그 주범이 플람이라면, 제자를 애틋하게 여겨온 힐데가르트라 해도 용서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플람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엄밀히 따지면 ‘제가’ 한 일은 아니에요.”

“너 말고 다른 흑마법사가 있어? 랑케르트 공작가에?”

“비슷해요. 그보다 역시 스승님은 눈치가 빠르시네요.”

스승의 물음에 답하는 목소리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을지언정 여전히 자상했다.

“랑케르트와 나눈 거래는 정당한 계약이었어요. 원하는 대로 저주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서로 목적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넌 그 계약을 두고 봤다는 거고?”

“…….”

“그런 거구나?”

“…….”

그 순간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그에게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본 제자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긴 머리카락과 나긋한 목소리. 눈을 접으며 웃을 때는 여우 같은 인상까지.

하지만 딱 한 가지, 눈에 띄게 다른 점이 있었다.

“플람…… 네 눈동자…….”

잘 익은 모과처럼 노랗던 눈동자는 몰라보게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특히 스멀스멀 붉은빛이 물감처럼 번졌다가 다시 사그라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저도 두고만 보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플람의 목소리가 점차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의 눈에 붉은빛이 더욱 퍼졌다.

“저한테는 스승님을 다시 만나는 거, 그게 제일 중요했어요. 그래서 제 딴에는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어요.”

“…….”

“모두가 스승님은 죽었다고 했지만, 아니잖아요?”

아드득, 이를 무는 소리가 났다.

힐데가르트를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스승님은 여기 계시잖아요. 지금 내 눈앞에 있잖아.”

“플람! 네가 두고 본 흑마법사가 막시밀리언을 죽게 할 뻔했어!”

“…….”

“그것조차 상관없다고 할 셈이야? 너 대체 그동안 무슨 짓을…….”

“막시밀리언은 그만하면 오래 살았으니 죽어도 괜찮지 않나……?”

“…….”

그 순간 힐데가르트는 하려던 말을 모두 잊어버렸다.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린 플람의 눈동자가 더욱 붉게 물들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힐데가르트가 말이 없자, 그가 황급히 고개를 마구 저었다.

“너…….”

“아니, 아니야……. 스승님과 다시 만나면 이런 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에요.”

혼탁했던 플람의 눈동자가 조금 더 노랗게 맑아졌다.

“이건 제 진심이 아니에요. 난 이런 재회를 바라지 않았다고요.”

플람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냥, 저는 돌아오실 스승님을 다시 만나는 거…… 날이 갈수록 그거 말곤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졌어요.”

“내가 돌아올 걸 알고 있었어?”

“막시밀리언에게 부탁한다고 했으니까…… 맡겼으니까, 정말 그걸로 만족하려 했는데…….”

힐데가르트의 물음에도 플람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가 힐데가르트에게 손을 뻗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석을 매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지만, 힐데가르트는 벌레가 기어가듯 소름이 돋았다.

이 낯선 느낌이 제자의 손가락이 너무 따뜻해서인지, 아니면 제 뺨이 너무 차가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내뱉는 숨소리만이 오가는 어두운 동굴 속에서 플람의 노란 눈동자에서 점차 생기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힐데가르트는 이 대화가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플람은 아직도 80년 전, 그녀를 잃었던 순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 같았다.

“레온 오빠가 널 캄파넬로 보내고, 그다음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니? 그런 거지?”

“아냐…… 아직은 안 돼. 아직은…….”

플람은 제 양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눈동자가 점차 붉어질수록 그는 자신의 얼굴을 쥐어뜯었다.

“플람!”

“스승님이 다시 돌아오셔서 정말 기뻐요.”

플람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가봐야 할 거 같아요.”

별안간 플람의 주변을 떠돌던 새카만 기운이 정신을 잃은 랑케르트 공작과 그녀를 감쌌다.

“다시 만나러 올게요, 스승님.”

공기가 달라졌다.

이제 그녀가 딛고 있던 땅은 단단한 암석이 아닌 촉촉한 풀잎이었다.

플람이 사용한 마법은 막대한 마력이 드는 공간이동이었다.

그가 힐데가르트를 조심스레 일으켜 세우자 힐데가르트를 그의 팔을 붙잡았다.

“기다려, 아직 물어볼게……!”

하지만 힐데가르트가 손을 뻗었음에도 플람의 모습은 재로 변해 사라지듯 허공으로 흩날렸다.

“플람!”

혼란에 빠진 그녀를 놓아두고 홀연히 사라진 제자는 말이 없었다.

* * *

힐데가르트가 몰라보게 너절한 꼴을 하고 나타나자, 레디스는 물론 함께 있던 유시스 또한 매우 놀랐다.

“보트가 뒤집혔다고요? 설마 물에 빠지셨던 거예요?!”

“응…… 너무 가까이에서 구경하려 했나 봐.”

힐데가르트가 그렇게 얼버무리자 레디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다친 곳은? 괜찮은 거야?”

“보다시피 멀쩡해.”

사색이 된 두 사람을 향해 그녀가 양팔을 들어 올렸다. 다행히 그녀의 옷은 젖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레디스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힐데가르트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 밝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 난 마법사라고! 별일 없었어!”

그녀는 키스케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둘이 함께 나란히 물에 빠졌다면 큰일이 났을 거라는 말로 웃었다.

레디스는 힐데가르트가 웃는 걸 보고 나서야 미간의 주름을 폈다.

그가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엔 혼자 가지 말고 다른 사람이랑 같이 가. 아니, 나랑 가.”

“맞아요! 저희랑 같이 다니는 게 좋겠어요.”

“됐어, 그럴 마음 없어요!”

힐데가르트는 시원스레 웃었고 그 모습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보다 오빠, 우리 며칠만 더 여기서 머물다 가자.”

“뭐? 갑자기 왜?”

“이오타랑 같이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거든. 아티펙트 관련 일이야.”

“아, 테리오 리브 총괄이 아티펙트를 구매한다고 그랬지?”

레디스는 빠르게 이해했으나 곧 불만을 터뜨렸다.

“야. 그럼 며칠만 더 일찍 이야기해 주지! 내일 오후에 가려고 준비 다 해놨데…….”

“미안, 말한다는 걸 깜빡했어. 그럼 시종에게는 내가 이야기 전할게.”

“그래라. 얼른 들어가서 자라. 감기 걸리겠다.”

“응. 그럼 유시스 양, 좋은 밤 보내세요.”

“안녕히 가세요, 공녀님!”

힐데가르트는 저를 향해 살며시 인사하는 솜사탕 같은 소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러나 걸음을 돌려 공관으로 향하는 걸음은 점차 빨라졌고, 표정이 무너지는 것 또한 순식간이었다.

* * *

늦은 새벽이었다.

키스케를 아무 용건 없이 4시간 가까이 붙잡아두었던 로바르네 황자비는 그를 만나보지도 않고 돌려보낸 뒤 시종에게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솔솔 몰려오던 잠기운이 한 번에 달아난 건, 공관 위층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그녀가 반짝하고 눈을 뜨자 물수건을 든 시종이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소리인지 보고 올까요?”

“됐다. 공작께서 또 난리를 피우시는 모양이구나.”

로바르네가 가운을 걸친 뒤 손바닥을 내저었다. 그러자 시종은 고개를 숙인 뒤 물러났다.

달칵.

문이 닫히자, 침대에서 일어난 그녀가 커다랗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등 뒤를 돌아본 순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

“……!”

소리 없이 나타난 보라색 머리의 사내가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로바르네는 가장 먼저 그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부터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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