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힐데가르트가 동굴에서 위화감을 느낀 건, 보트가 출발한 지 십오 분쯤 흘렀을 때였다.
“어라? 여기…… 마력의 우물이 가까이에 있는 건가?”
마력의 우물이란 말 그대로 마력이 한곳에 고여서 움직이지 않는 곳을 뜻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자연에는 종종 이런 현상이 생기곤 했다.
“흐음. 키스케를 기다릴 걸 그랬나?”
마력의 우물 근처에서 마법을 쓰는 건 위험했다.
까딱하면 마력의 흐름을 제어하지 못하고 폭주하거나 사고를 칠 확률이 높아서였다.
‘아쉽네. 키스케가 곁에 있었다면 직접 이 느낌을 익혔을 텐데.’
그런 생각과 함께 주변을 구경하는 사이, 힐데가르트는 시종이 말했던 대로 붉은색 수정이 장식된 부분에 도달했다.
그녀가 가볍게 노를 젓자 보트는 미끄러지듯 왼쪽 길로 들어섰다.
얼마나 안쪽으로 들어갔을까. 문득 유속이 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 게 느껴졌다.
천장에서 날카롭게 내려온 종유석도, 바닥에서 뾰족하게 솟아난 석순도 어둑한 구간에 들어서니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뭐지? 길을 잘못 들었나?’
시종이 잘못 설명했던 걸까?
불길한 느낌은 적중했다. 곧 힐데가르트는 막다른 길에 들어섰다는 걸 깨달았다.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다행히 보트를 댈 수 있게 경사가 완만한 구간이 있었다. 그녀는 램프를 들고 보트에서 내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야, 순 엉터리잖아? 막다른 곳이 나와도 시종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더니.’
“냐앙!”
그때 고양이 우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힐데가르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그건…….”
누가 이런 곳에 고양이를 데리고 왔던 걸까?
설마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저기요! 여기 막다른 길인 거 같은데!”
힐데가르트가 큰 소리로 이 근처에 있다는 시종을 불렀다.
“야옹! 냐앙!”
“아니, 그보다 왜 이런 곳에 고양이가 있는 거야…… 나비야?”
동굴에 그녀의 목소리만 가득 울렸다.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으음, 마법을 써서 나가야 하나? 마력의 우물이 가까이에 있으니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은데…….’
짧게 고민하던 때였다. 어느새 살금살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종유석 너머로 그녀를 보았다.
힐데가르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녀가 반갑게 인사했다.
“너 어쩌다 여기 있어? 이리 와, 여긴 추워. 나랑 같이 나가자.”
힐데가르트가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냐아.”
“그래, 그래. 착하지.”
보랏빛이 도는 검은 털 고양이였다. 티 없이 맑은 붉은색 눈동자가 힐데가르트를 살폈다.
“얌전히 있…….”
그녀가 고양이를 품에 안아 든 그 순간.
쨍그랑!
첨벙!
벽면에 걸려 있던 유일한 횃불이 물속으로 떨어지며 사방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놀란 힐데가르트가 고양이를 안은 채 그대로 굳었다.
‘방금 그거…… 그림자?’
그녀가 황급히 램프를 들어 올리려던 때였다.
“흐읍……!”
품 안에 있던 고양이가 재빨리 그녀에게서 도망쳤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뻗어 나온 육중한 손이 힐데가르트를 끌어당겼다.
손아귀 힘이 센 남자였다. 목소리 또한 귀에 익었다.
“랑케르트 공작……!”
“나를 원망하지 마라. 모든 건, 성검에 대해 알아버린 네 탓이니까.”
막다른 길, 성검, 칼란도 랑케르트 공작.
힐데가르트는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물에 빠져 죽는 거라면 차라리 호상을 누리는 셈…….”
쿵! 퍼엉!
“아아아악!”
힐데가르트의 손에서 쏟아진 화염이 천장을 강타했다.
마력의 우물 탓에 훨씬 더 강력해진 위력이라, 일대가 뒤흔들릴 지경이었다.
고드름처럼 뾰족한 종유석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연쇄적으로 다른 종유석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둠을 뒤흔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희미한 피 냄새가 났다.
“컥, 콜록! 콜록!”
힐데가르트는 상대의 팔을 쳐내며 황급히 보트 쪽으로 뛰었다.
‘불…… 아니야, 발밑이 미끄러워. 우선 멀어져야 해!’
그녀가 지체하지 않고 보트에 탄 순간.
왼팔을 움켜쥔 칼란도가 쩌렁쩌렁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 계집애가!”
쨍그랑!
바닥을 뒹굴던 칼란도는 손에 잡히는 것을 무작정 내던졌다.
힐데가르트가 좀 전에 바닥에 내려놓았던 램프였다.
램프는 종유석과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등잔불이 꺼지는 찰나의 순간, 힐데가르트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랑케르트 공작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의 손에 들려있는 단도까지도.
“죽여버리겠어!”
발소리를 쿵쿵 내며 다가온 공작이 무작정 단도를 치켜든 그 순간.
퍼억!
“커, 헉!”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렸다.
공작의 손에서 단도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칼란도를 공격한 것이다.
동시에 힐데가르트의 마법으로 금이 간 거대한 종유석 한 무더기가 흔들거리더니, 수면으로 떨어졌다.
“스승님!”
어마어마한 물보라가 일어나며 수면이 크게 출렁거렸다.
힐데가르트가 급하게 탄 보트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뒤집혔다.
“안 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침몰하는 종이배처럼 속절없이 가라앉았다.
풍덩, 하고 뒤따라 물에 뛰어드는 소리가 들렸다.
‘방금 그 목소리……!’
힐데가르트가 마법을 쓰자, 손끝에서 모인 마력이 폭주하듯 그녀의 손끝을 벗어났다.
마력은 번개가 터지듯 팍, 하고 일대를 뒤흔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주머니에서 환한 초록빛이 퍼졌다.
이오타에게 주려고 샀던 아티팩트 반지였다. 그녀의 마력은 물론, 일대에 고여 있던 마력의 우물에 반응하고 있었다.
저를 따라 물에 뛰어든 상대가 손을 잡은 그 순간.
한꺼번에 어마어마한 마력이 몸에서 빠져나가더니, 희미해지는 의식 너머로 노란 눈이 보였다.
폭주하는 마력과 밀려 들어오는 기억 파편.
‘도저히 한심해서 봐줄 수가 없다. 그대로 굶어 죽을 셈이냐? 폐인처럼 살다가 목이라도 맬 셈이야?’
‘…….’
‘양팔 들고 환영하고 싶지만, 네가 힐데가르트의 목숨을 잡아먹고 살아있으면 가만두고 볼 수만은 없지.’
‘……뭘 바라는 겁니까, 레온하르트.’
‘캄파넬에 가서 힐데가르트의 시신이라도 수습해 와.’
분노를 참는 익숙한 목소리.
‘죽고 싶으면 그다음에 죽어. 원한다면 내가 죽여주마.’
파삭, 하고 아티팩트 반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힐데가르트의 몸을 강하게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쏴아아아!
힐데가르트와 그녀를 품에 안은 사람에게서 잔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웠던 건 잠깐이었다.
플람이 손가락을 튕기자 동굴이 환해졌다.
“플람!”
종유석에 팔이 꿰뚫린 것도 모자라, 뒤에서 마법으로 공격당한 칼란도는 왈칵 화를 냈다.
“자네 이게 무슨 짓이야!”
“…….”
그러나 플람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젖은 바람에 긴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흐르는 데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온통 정신없이 기침을 터뜨리는 힐데가르트에게 몰려 있었다.
칼란도 랑케르트는 상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채 씨근덕거렸다.
“왜 방해……!”
그러나 얼마 못 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의 발밑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른 그림자가 입을 비롯한 사지를 꼼짝도 할 수 없게 막아버렸던 탓이다.
숨을 고르던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들었다.
“……플람.”
“네, 스승님.”
“…….”
“저 여기 있어요.”
플람의 목소리는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웃으면 여우 같은 인상이 되는 얼굴까지도.
“괜찮으세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
“스승님?”
그렇기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역시…… 살아 있었구나.”
주름 한 점 없는 얼굴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 그대로다.
늙은 것은 쇠하는 게 순리건만.
왜 플람만이 그 흐름에서 빗겨나갔단 말인가.
“왜 네가 흑마법사가 된 거야?”
“…….”
소름이 돋을 만큼 차갑고 무거운 기운.
흑마법사 특유의 묵직하고 검붉은 마력이 그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오타에게 주기 위해 샀던 아티팩트 반지는 싸구려였던 탓에 오래 가지 못하고 터져버렸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분명히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을 보여주었다.
플람이 저를 눈앞에서 잃은 뒤 미친 사람처럼 떠돌았던 모습.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로 엉엉 울면서, 그녀가 사라졌던 땅을 맨손으로 파헤치던 광경을.
“흑마법사는 전부 죽여도 상관없는 녀석이라며. 그런데 왜…….”
“스승님이 보고 싶었거든요.”
“뭐?”
“저, 스승님이 한 번만 더 웃어주는 걸 볼 수만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었어요.”
노란 눈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그래서 뭐든지 한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걸…….”
“그게 무슨 소리야?”
플람은 꼭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쓰다듬고 칭찬해 달라며 마구 조를 때처럼.
하지만 지금의 힐데가르트가 옛날의 그녀가 아니듯, 플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말…… 십수 년 넘게 기다려 온 순간인데.”
플람에게서 시작된 그림자가 지면 위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춤추는 뱀처럼 불길한 움직임을 보이던 것들이, 칼란도 랑케르트를 향했다.
이미 사지가 꽁꽁 묶여 있던 공작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그림자는 꼭 힐데가르트가 겪었던 모습을 재연하듯, 공작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 그를 허공에 매달았다.
“저 버러지가 전부 망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