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하지만 키스케의 불만을 힐데가르트가 알 턱이 없었다.
사람들의 통행이 적은 곳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윽…….”
과일을 먹던 힐데가르트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그녀의 고운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다.
“왜 그래?”
“이거…… 파인애플 먹고 나서 먹으니깐 혀가 따가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입천장은 물론이고 혀 안쪽까지 바늘로 찌르듯 따끔거렸다.
키스케는 의아하게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녀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과일 꼬치를 와앙, 하고 커다랗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예법에 벗어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딱히 이상하진 않은데?”
키스케는 입가를 매만졌다.
“난 괜찮아. 상한 거 같진 않아.”
“그래? 난 왜 그러지?”
“먹지 말고 버려.”
“무슨 소리야! 아까운 음식을 왜 버려?”
애가 곱게 자라서 그런지 음식 귀한 줄을 모르네.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마지막 과일 조각을 먹으려고 했을 때였다.
“그럼 아픈 거 참고 먹지 말고 이거랑 바꿔. 이쪽엔 파인애플 안 들어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키스케가 그녀에게서 과일 꼬치를 빼앗더니, 제 것을 쥐여주었다.
“난 너랑 다르게 편식 안 하거든.”
“나도 안 하거든?”
두 사람은 툴툴거리면서도 과일 꼬치를 깨끗하게 해치웠다.
과즙 때문에 끈적해진 손을 음수대에서 씻을 때였다.
커다란 트럼펫 소리와 함께 작은북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힐데, 퍼레이드…… 니자.”
“뭐라고?”
키스케의 목소리는 둥, 둥 하고 연이어 울리는 커다란 북소리에 묻혔다.
“……시작…… 자고!”
“뭐? 안 들려!”
그 순간 귀신같이 음악 소리가 멈췄다.
“퍼레이드 시작하니 손잡고 다니자고!!”
“…….”
“…….”
쩌렁쩌렁 소리친 키스케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웃음을 터뜨린 힐데가르트가 깔깔거리며 웃는 동안, 키스케는 입술을 질끈 감은 채 그녀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웃지 마!”
부끄럽고 가슴께가 뻐근한 것도 모자라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키스케가 퍼레이드를 구경하기 좋은 장소를 찾았을 때는 이미 사람이 우글우글 몰려 있었다.
그의 미간이 난처하게 일그러졌을 때였다. 그의 발밑이 두둥실 떠올랐다.
“힐데?!”
“괜찮아, 괜찮아.”
힐데가르트의 마법이었다.
두 사람은 낡은 2층 건물의 평평한 지붕으로 올라갔다.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거리가 한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음악 소리에 맞춰 춤추는 무용수가 곡예를 펼치는 동안, 해는 서서히 지평선을 향해 떨어졌다.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박수가 끝없이 이어졌다.
항상 날카롭던 키스케의 표정도 몰라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는 연극을 관람했을 때처럼 들리지 않을 박수를 치고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제자의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키스케, 무슨 생각 해?”
“그러는 넌?”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
키스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또 오고 싶어.”
“또 오면 되지! 활기가 넘쳐서 재미있었지?”
“……그래. 오길 잘한 거 같아.”
키스케는 어렵사리 한마디를 꺼냈다.
“데리고 와줘서 고마워.”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 * *
해가 완전히 가라앉자, 힐데가르트는 공관으로 돌아왔다.
예상대로 먼저 돌아온 레디스가 벤치에 앉아 그녀를 보며 알은척했다.
“축제 잘 다녀왔냐?”
“응, 재미있었어. 오빠는?”
“나도 그럭저럭 괜찮았어.”
레디스는 퉁명스레 말하며 휙, 고개를 돌렸다.
힐데가르트는 그게 부끄럼을 타고 있어서 그렇다는 걸 금방 알았다.
그녀는 좀 전에 마주쳤던 유시스를 떠올렸다.
유시스는 곱게 포장된 손수건을 소중히 들고 있었고, 손목에는 며칠간 본 적 없었던 예쁜 장신구가 있었다.
“유시스 양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던데? 솔직하게 불어. 손수건 말고 뭘 사 준 거야?”
“그냥, 사과 표시로 작은 팔찌 같은 거…….”
“팔찌? 으흠…… 내 건 없어? 또 오다 주운 게 있으면 받아줄게.”
“자꾸 까불면 딱밤이다.”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레디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어라? 저쪽은 뭐 하길래 사람이 몰려 있어?”
힐데가르트는 저 멀리 공관 앞에서 대여섯 명의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았다.
“아, 넌 모르는구나? 아까 로바르네 2황자비 전하가 오셨거든.”
“로바르네 2황자비…….”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고 보니 마무리 축제 때 온다고 했지.’
막시밀리언의 저주에 이용된 제물의 매개체가 2황자비의 궁에서 나온 일로 황제는 그녀를 추궁했다.
로바르네는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뗐지만, 결국 랑케르트 공작령으로 추방당했다.
‘겉으로야 요양이니 여행이니 핑계를 대고 있지만, 과연 언제까지 둘러댈 수 있을까.’
눈에 띄지 않게 랑케르트 공작성에서만 머물고 있었을 텐데, 아들이 참여하는 사냥 대회는 무시할 수 없어서 들른 모양이다.
“오신 지 얼마 안 됐어. 걱정하지 마, 인사라면 내가 하고 왔으니까.”
“딱히 인사하러 갈 생각도 없어. 오빤 용케 다녀왔네? 카라딘 전하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었어?”
“그거랑 이거는 별개잖아.”
디안 소백작과 달리, 카라딘 황태손은 사냥 대회를 포기한 다음에도 티모시 영지를 떠나지 않고 공관에 머물고 있었다.
‘밖으로 거의 나오는 일은 없다지만…….’
마무리 축제 때 온다는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보다 힐데, 너 보트 투어는 어떡할 거야? 갈 거지?”
“물론이지. 키스케랑 이미 약속도 했는걸.”
마무리 축제 2부에 해당하는 보트 투어는 그녀도 제법 기대하고 있었다.
특히 올해는 그간 외부에 개방하지 않았던 종유 동굴을 공개한다며 화제를 모았다.
“오빠는 유시스 양이랑 갈 거지?”
“응. 옷 갈아입고 온다고 하길래 기다리고 있었어.”
“실례하겠습니다! 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그때 마침, 시종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종유 동굴은 삼십 분씩 시간을 두고 차례대로 입장하겠습니다! 순번을 정해두었으니 확인하신 뒤 시간에 맞춰 가시면 되겠습니다!”
남매가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조심스레 다가온 이가 그녀를 불렀다.
“공녀님, 잠깐 괜찮으실까요?”
“응? 왜 그래, 노바?”
노바의 표정이 평소보다 어두웠다.
그가 대뜸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죄송합니다, 키스케 전하께서 저녁 약속을 함께하지 못할 거 같다고 전해달라 하세요.”
“뭐? 왜?”
“그게, 급한 일이 생기셔서…….”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키스케한테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네, 그건 걱정하실 것 없어요.”
몇 시간 전 티모시 영지에 도착한 2황자비는 키스케를 안부를 묻겠다며, 무작정 그를 불러서 기다리도록 잡아두고만 있었다.
그런 방식의 심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기에, 키스케는 별수 없이 노바를 보냈다.
“많이 급한 일이야? 기다릴까?”
“아뇨, 기다리지 말고 공녀님만 다녀오세요.”
노바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2황자비가 언제 키스케를 놔줄지 모르겠는데 그녀를 잡아둘 수는 없었다.
“이왕이면 같이 가는 게 좋잖아.”
“급한 일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서요.”
힐데가르트의 얼굴에 살짝 실망감이 스쳤다.
노바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종유 동굴이 외부인에게 공개되는 건 처음이라고 하잖아요. 다녀오셔서 전하께 멋진 곳이었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알겠어. 키스케 몫까지 구경하고 올게.”
“예.”
노바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간 뒤, 힐데가르트가 종유 동굴로 입장할 차례가 되었다.
레디스와 유시스는 앞서 떠났고 드디어 그녀가 보트에 탈 순서였다.
안내원을 따라 선착장으로 가자, 나이 지긋해 보이는 시종 하나가 그녀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저는 노스웬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가워.”
작은 체구의 시종은 그녀에게 꾸벅 인사했다.
그가 천천히 힐데가르트가 탈 배를 준비하며 종유 동굴에 대해 설명했다.
“이 종유 동굴은 티모시 영지에서도 몹시 특별한 곳입니다. 몹시 아름다운 곳이지요.”
“나도 들었어. 몇백 년은 된 동굴이라며?”
“그렇습니다. 보트는 강물을 따라 알아서 움직일 테니, 마음껏 구경하시면 됩니다.”
노스웬은 조금 추울 수 있으니 보트 안에 담요를 넣어놓았다고 덧붙였다. 몹시 친절한 미소였다.
“동굴 내부는 어둡지 않아?”
“불을 밝혀놓았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만 딱 한 가지. 주의하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돌연, 노스웬이 진지한 얼굴을 했다.
“보트를 타고 가시다 보면, 거대한 붉은색 수정이 나올 겁니다. 거기선 반드시 왼쪽 길로 가셔야 합니다.”
“갈림길이 있단 말이야? 실수로라도 오른쪽으로 가면 어떻게 되는데?”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막다른 길이라 배를 돌리느라 고생하시는 것뿐이지요.”
“왼쪽으로 가야 한단 말이지? 왼쪽…… 왼쪽. 외워야겠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오른쪽에는 줄을 쳐 놓았으니 헷갈리지 않으실 겁니다.”
설령 오른쪽 길로 잘못 들어서도, 막다른 곳에 시종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며 그가 걱정을 덜어주었다.
“동굴 내부는 유속이 느린 데다 중간에 사고가 일어나도 대응할 수 있게 기사들도 배치해 두었습니다.”
“여러모로 준비가 철저하구나. 알겠어. 설명해 줘서 고마워.”
힐데가르트는 나무 보트에 몸을 실었다.
보트는 잠시 기우뚱거렸으나, 노스웬이 매어둔 줄을 풀자 천천히 좁은 강줄기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즐거운 투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보트가 간이 선착장을 출발했다.
노스웬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그 자리를 떴다.
그로부터 삼십 분 뒤, 티모시 남작의 시종이 보트에 자리 잡은 귀족에게 설명했다.
“……그럼 종유 동굴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꼭, 붉은색 수정이 나오면 오른쪽 길로 가셔야 합니다. 왼쪽 길은 수심이 깊어서 위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