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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93)화 (93/166)

91화

힐데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 걸 누가 길에 떨어뜨려?”

“어허! 오빠가 말하는데 말이 많다!”

주변 사람들이 웃거나 말거나, 레디스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성큼성큼 걸어서 다가오는 레디스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

레디스가 그녀에게 마석 광산 권리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좀 전과는 다르게,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땐 심한 말 해서 미안해. 화 풀어줄 거지?”

“푼 지 오래됐거든요?”

“그럼 좀 기쁘게 맞아줘. 반응이 예상했던 거랑 너무 다르잖아.”

“몰라, 키스케 전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멍청한 꿈이나 꾸는 애라 그런가 보지.”

“야, 야!”

레디스는 농담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원망스레 보았다.

“그땐 내가 너무 꼬여서 그랬던 거야. 홧김에 한 말이라고!”

“알아. 나도 미안해.”

“뭐?”

“미안하다고. 오빠가 섭섭해할 걸 생각 못 해서.”

사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남매싸움의 원인은 힐데가르트가 제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먼저 손수건을 주겠다며 약속했던 상대는 키스케가 아닌 레디스였으니까.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픽, 웃음을 흘렸다.

남매 아니랄까 봐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비슷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마석 광산 권리서를 든 힐데가르트가 넌지시 레디스의 등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난 됐으니깐, 어서 가 봐. 유시스 양이 기대하고 있잖아.”

레디스의 몸이 움찔 떨렸다.

“아까부터 계속 이쪽만 보고 있어. 내 얼굴이 다 뚫어지겠다.”

“……크흠.”

먼저 에스코트하겠다고 나선 건 자기면서, 왜 이럴 때 부끄러워하는지.

“알겠어. 그럼 다녀올 테니까 이따 저녁에 보자.”

“응!”

레디스는 어깨를 쭉 편 뒤 자리를 떠났다.

마침내 혼자 남은 힐데가르트는, 멀어지는 레디스를 응시했다.

그녀가 손에 쥐고 있는 마석 광산 권리서가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가족을 향한 레디스의 애정만큼이나 무거웠다.

‘참…… 곤란하네.’

80년.

아득한 세월을 뛰어넘어 깨어난 새로운 생(生).

원치 않게 시작한 이 삶을 축복이나 기쁨으로 여긴 적은 없었다.

사랑하던 이들, 사랑하고 싶었던 이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힐데가르트에게 환생이란 새로운 시작이 아니었다.

미처 죽지 못해 여분의 남은 삶을 사는 것과 똑같았다.

미하일과 레디스가 잘 자라면, 공작가가 다시 옛 영화를 되찾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상상하지 않는다.

그때야말로 꿈도 꾸지 않고 푹 잠들 듯 사라지고 싶다.

그런 마음이건만.

‘……큰일이네.’

어느새 정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미하일도, 레디스도 착한 아이들이지만 만일 그녀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뒷걸음질 치고 말 텐데.

‘착각하지 마. 착각해선 안 돼.’

그녀는 두 사람의 여동생인 ‘힐데가르트’가 아니었다.

대고모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막내딸이 아니다.

‘내 가족은 한 사람뿐이야.’

온 우주를 통틀어 단 한 사람.

레온하르트 아카락시아뿐.

‘해야 할 일을 잊지 말자.’

오빠를 대신해서 가문을 지키고, 융성했던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명성을 다시금 제국에 떨치는 일.

“…….”

이윽고 울렁거리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더 하고 난 뒤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키스케는 어딜 간 거지?’

발표가 끝나자마자 공관으로 돌아간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저쪽 끄트머리에서 노바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키스케가 무언가를 품에 안은 채 그녀를 향해 냅다 뛰었다.

“힐데!”

그 찰나에.

‘너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

‘뭐?’

‘네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때, 하던 걸 전부 내던지고 너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 자신보다 네 마음을 우선하는 사람.’

왜 레온하르트의 말이 떠올랐던 건지.

우두커니 서 있던 힐데가르트의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마침내 코앞으로 다가온 키스케의 입술이 떨어졌다.

“네 말이 맞았어.”

“……뭐?”

“토끼. 생각보다 잡기 어려웠어.”

“아…….”

그녀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키스케의 말에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키스케가 품에 안고 있는 건 눈처럼 새하얀 토끼였다.

눈처럼 하얀 털, 킁킁거리는 코. 쫑긋 세운 귀.

몸집은 힐데가르트의 주먹보다 조금 더 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키스케는 살짝 뿌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는 뒤늦게 기함했다.

“키스케…… 설마 이거 때문에 어제 사냥에 나갔던 거야?!”

“어.”

“야, 너……!”

그녀가 웃으며 호통을 쳤다.

“난 그것도 모르고 걱정했잖아! 아니, 그보다 오늘 아침에도 미열이 있었다며!”

“됐어. 나았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

되레 뻔뻔하게 대답한 키스케의 시선이 그녀의 손에 들린 마석 광산 권리서를 향했다.

그가 살짝 아쉽다는 듯 말했다.

“이번 대회는 레디스가 우승했잖아. 마석 광산 대신 토끼라도 잡아 온 거뿐이야.”

“…….”

“잡아달라며?”

그가 양손으로 보호하듯 감싼 토끼를 힐데가르트에게 내밀었다.

“자. 이름은 네가 지어 줘. 이왕이면 멋진 걸로.”

“…….”

“왜 멍한 표정을 하고 그래?”

무표정했던 힐데가르트의 눈썹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니…….”

그녀는 어느새 자신의 양 뺨이 아플 만큼 웃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레디스의 누명으로 혼을 쏙 빼놓은 일을 해결하느라,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잊고 있었는데.

“진짜 잡아 올 줄은 몰랐지……. 난 다람쥐로도 충분했는데…….”

“무슨 소리야. 노바한테 다 들었어, 다람쥐는 다시 풀어줬다며.”

“도토리 챙겨 줄 자신이 없었단 말이야. 다람쥐 키우는 법은 모르거든?”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토끼를 받아 들었다.

다행히도 따뜻하고 보드라운 토끼는 코와 입가를 벌름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항 없이 그녀의 품에 안겼다.

“……고마워, 키스케.”

녹다 만 양초에 다시 불을 켠 것과 다름없는 삶.

하지만 이 촛불이 없었더라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있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하얀 토끼를 소중히 안고 쓰다듬던 그녀가 말했다.

“키스케.”

“왜?”

“……너도 이 토끼처럼,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네 말투, 가끔 진짜 열받아.”

키스케가 투덜거리자, 그녀가 소리 나게 웃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무지개가 뜨면 아름다울 것 같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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