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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92)화 (92/166)

90화

보티네 백작과 디안 소백작은 그 즉시 사냥 대회를 포기했다.

끝까지 사냥 대회에 남아 있을 염치는 없었는지, 곧장 짐을 싸서 떠났다.

물론 그 전에 사냥감을 넘기는 건 잊지 않았다.

티모시 남작의 입회하에, 디안 소백작은 사냥감을 이관하겠다고 약속했다.

같은 절차를 밟은 건 카라딘 황태손도 마찬가지였다.

“나 카라딘 로젠발트 드롯셀마이어는, 레디스 아카락시아에게 모든 포획물을 넘기기로 약속하네.”

“받아들이겠습니다.”

“……곤란하게 만들어서 미안하군, 레디스 공자.”

카라딘이 애써 웃고 있다는 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공증 절차를 마친 카라딘은 그대로 등을 돌려 막사를 나가버렸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길까 봐 안절부절못하던 티모시 남작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심도 잠깐이었다.

레디스는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편향적인 태도를 보였던 티모시 남작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 레디스 공자…… 죄송합니다. 제가…….”

“사과는 이제 됐습니다.”

“아…….”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과는 받아봤자 피곤하기만 하니까요.”

예리한 눈으로 상대를 쏘아본 레디스도 티모시 남작을 뒤로했다.

불쾌한 감정이 치미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계속 안고 갈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레디스 오빠!”

“……힐데.”

“괜찮아? 아무 일 없었어?”

유시스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힐데가르트가 막사 밖으로 나온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레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다 끝났어.”

“진짜? 오늘 밤에 발 뻗고 못 잘 만큼 열받는 말 들은 건 없어? 있으면 다 말해! 당장 가서 엎어버릴…….”

“없어, 없다니깐?”

레디스는 그만 웃어버렸다.

‘그래. 우선 잊어버리자. 힐데가 계속 신경 쓰게 할 순 없잖아.’

힐데가르트의 기세는 그야말로 천군만마가 따로 없었다.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우고 철없이 굴어도, 결국 가장 필요할 때 제게로 달려오는 건 가족뿐이었다.

힐데가르트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가슴 한쪽이 뻐근했다.

“와악! 왜 이래?!”

“그냥.”

레디스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고맙다.”

힐데가르트는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이튿날 아침, 결국 카라딘 황태손은 사냥 대회를 사퇴했다.

* * *

디안 소백작의 자작극은 남은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로 떠올랐다.

유시스는 다부지게 쥔 주먹을 마구 흔들었다.

“실망이에요, 디안 소백작이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련의 사건이 자작극이었다는 게 기정사실로 굳어졌다.

“오해라고 말하며 넘어가기엔 도가 지나쳤어요. 정말 너무하잖아요!”

힐데가르트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에요. 고마워요, 유시스.”

“아니에요. 제가 한 게 뭐 있다고.”

“테리오 수사관을 소개해 주셨잖아요. 유시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해를 푸는 게 더 힘들었을 거예요.”

“참, 공녀님도. 당연히 도와야 하는 일인데요, 뭘!”

유시스는 고개와 손을 동시에 흔들었다.

그녀는 저편에서 청색 조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레디스를 흘끔거렸다.

“레디스 공자님이 기운을 되찾으신 거 같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기운을 너무 차려서 문제지만요…….”

힐데가르트는 어젯밤의 레디스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뒤늦게서야 억울함을 토로하던 레디스는 급기야 ‘술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까?’라는 말로 힐데가르트를 경악하게 했다.

‘술이라니, 아직 어림도 없지!’

파란만장했던 전날 밤을 떠올리며,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저었다.

삐이익-!

곧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며 사냥 대회가 재개됐다.

힐데가르트는 레디스가 조원들과 함께 숲속으로 사라지는 걸 본 뒤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앗, 네! 잡아둬서 죄송해요, 어서 가보세요!”

유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키, 키스케 전하께 안부 전해주세요!”

“후후, 그럴게요.”

힐데가르트는 짧게 대답한 뒤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의 걸음이 향한 곳은 키스케가 머무는 공관이었다.

“공녀님!”

“노바. 키스케 몸은 어때? 좀 괜찮아졌어?”

“많이 나아지셨습니다. 오늘은 아침이랑 점심 모두 식사랑 약을 드셨거든요!”

“식욕이 돌아왔나 보네, 다행이다.”

약이며 오렌지 주스며 이것저것 챙겨온 보람이 있었다.

노바는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 보세요.”

“고마워.”

밤새 비를 맞으며 화살을 찾아다녔던 키스케는 꼬박 이틀을 앓아누웠다.

안 그래도 사냥 대회 내내 마력을 펑펑 써서 미약한 마력 고갈 증세까지 있었는데 비까지 맞고 돌아다녔으니.

‘쓰러질 만했지.’

불덩이 같은 몸을 제게 기대며 정신을 잃었을 때는 아찔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야.’

그녀가 한숨 쉬었다.

“키스케, 나 들어갈게.”

힐데가르트는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몸은 좀 괜찮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금방 이유를 알았다.

“……잠들었네.”

키스케는 침대에 누운 채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열감이 느껴졌던 피부는 많이 식어 있었고, 한결 편하게 숨 쉬는 모습도 어제와는 딴판이었다.

‘땀을 많이 흘리던데…… 다행이다, 이젠 괜찮은 거 같아.’

그녀는 바구니를 내려놓고, 한쪽에 놓인 물그릇에서 수건을 꼭 짠 뒤 그의 땀을 닦아주었다.

저를 찾아온 키스케가 그대로 기절했을 때는 깜짝 놀랐다.

다행히 약을 먹고 푹 쉬니 열이 떨어졌다지만,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은 사양이었다.

“어서 일어나. 네가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이 많아.”

키스케가 빠진 적색 조는 사냥 대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녹색 조의 카라딘 황자조차 사냥물을 레디스에게 넘긴 뒤 포기해 버렸으니 사실상 청색 조와 적색 조의 승부로 접어든 셈이었다.

“……나도 그렇고.”

힐데가르트의 손이 키스케의 이마로 향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쓸어주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였다.

키스케가 그녀의 손길을 느꼈는지 반짝, 눈을 떴다.

몽롱한 눈이 느리게 움직였다. 붉은 눈이 그녀를 눈에 담았다.

“키스케, 깼어?”

“…….”

“몸은 좀 어때? 일어날 거면 커튼…….”

꼬오옥.

“……쳐주려, 했는데.”

왜 손을 잡고 잠드는 거니?

깍지는 또 왜 끼는 거고?

‘내 팔은 애착 인형이 아니라고!’

속눈썹을 한 올씩 세어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어정쩡한 자세가 되고 말았지만, 팔을 빼자니 너무 깊게 얽혀 있어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키스케는 그녀의 팔을 껴안은 채, 몸을 둥글게 말더니 도로 잠들어버렸다.

‘아직 약 기운이 남아 있나.’

따끈따끈 체온이며 부드러운 피부가 그녀의 손에 닿았다.

그녀가 예상 밖의 상황에 눈을 깜빡이던 것도 잠시.

‘어휴, 어쩔 수 없지.’

결국, 힐데가르트는 앉은 자세를 편안하게 고쳤다.

그녀는 침대에 상반신을 기댄 채 조용히 말했다.

“잘자, 키스케.”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

* * *

키스케가 침대에서 일어난 건 사냥 대회가 끝나기 하루 전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쉬라고 몇 번이나 말했으나, 그는 완강히 거절했다.

‘고집부리는 건 할아버지랑 똑같다니깐!’

하지만 파란만장했던 사냥 대회가 끝나는 날.

힐데가르트는 왜 키스케가 부득부득 사냥용 부츠를 신고 나섰는지를 알게 됐다.

“사냥 대회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티모시 남작이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뒤편에는 세 개의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적색, 청색, 녹색 횃불 중 가장 활활 타고 있는 건 단연 청색 조의 횃불이었다.

“가장 많은 사냥감을 차지한 조는 청색 조입니다!”

“우와아아앗!”

“해냈어요, 레디스 공자님!”

“이겼다!”

그간 제법 정이 들었는지, 청색 조는 서로서로 어깨동무하며 크게 환호했다.

“우승 조에는 약속했던 대로, 랑케르트산 겨울 늑대 모피를 드리겠습니다!”

제국에서도 단연 질 좋은 모피를 생산하는 랑케르트였다.

폐회식에 참여한 랑케르트 공작의 표정이 시들시들한 녹색 조의 횃불을 보자 얼음처럼 굳었다.

“이어서 개인 결과를 발표합니다. 3위! 청색 조, 테리오 리브!”

또 한 번 청색 조에서 열렬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3위는 유시스의 오빠구나.’

축하한다며 어깨와 등을 퍽퍽 두들겨 맞던 남자는 단상 위로 올라가 꽃을 받았다.

유시스, 이오타와 함께 박수를 치던 때였다.

“2위는 적색 조, 키스케 라모프 드롯셀마이어 황태손 전하십니다!”

키스케는 사냥 대회 후반에 거의 앓아누웠음에도 2위를 차지했다.

초반에 워낙 압도적인 실적을 올린 덕분이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올해는 1위를 하기 어려웠으리라.

왜냐하면…….

“대망의 1위를 발표합니다. 청색 조, 레디스 아카락시아 공자!”

검술 대회 1위이자, 카라딘 황태손과 디안 소백작에게 사냥감을 넘겨받은 레디스가 있었으니까.

“우승자에게는 약속대로 마석 광산을 수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레디스 공자.”

“감사합니다.”

레디스는 차분한 얼굴로 단상에 올랐다.

인사를 받은 그가 돌돌 말린 마석 광산의 권리서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단상에 내려오기 무섭게, 힐데가르트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왔다.

“힐데!”

그가 큰소리로 외쳤다.

“오빠가 이거 오다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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