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연못 위에 제 모습이 떠오르자,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레디스도 움찔거렸다.
아티팩트는 화살에 담긴 스물네 시간의 기억을 고스란히 비추기 시작했다.
문제의 화살은 레디스의 화살통에 들어간 이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레디스가 키스케와 마주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눴을 때도, 쭉 화살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레디스의 말대로, 혼자 남은 레디스가 그 화살을 꺼내 활줄에 감는 광경이 똑똑히 보였다.
그다음,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사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나무에 정통으로 박혔다.
“……흡!”
시켜보던 이들이 숨을 삼켰다.
레디스는 화살을 뽑으려 했으나, 너무 깊게 박힌 탓에 뽑는 걸 포기하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이네요? 정말 레디스 공자가 말했던 대로잖아요!”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힐데가르트는 손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스케.’
한참 그 자리에 박혀 있었던 화살은 키스케가 회수할 때까지 그 자리에 박혀 있었다.
‘엄청 넓은 숲인데, 이렇게 찾은 게 기적이지.’
키스케의 노력이 빚어낸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 광경이 믿기지 않으시다면 키스케 전하께서 화살을 뽑은 장소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되니, 할 말이 없어진 건 오히려 보티네 백작이었다.
“이제 설명해 보시겠어요, 보티네 백작?”
“이…… 이익……!”
“아니면 소백작이 말씀하셔야겠네요. 아버님 뒤에 숨어 있지만 마시고요.”
“다 엉터리야!”
보티네 백작은 더욱 제 자식을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
“근거도 없는 마법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걸 모르는 줄 아는가!”
몇몇 귀부인이 부채를 펼친 채 속닥거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어떤 말들이 오갈지는 뻔한 일이기에, 백작은 기선을 제압하듯 소리쳤다.
“카라딘 전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나. 레디스 공자의 화살통에 화살이 많았다고!”
일련의 사건을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고만 있었던 카라딘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전하의 말씀까지 거짓이란 주장을 할 셈인가?”
“아, 그렇죠. 그런 말씀을 하셨죠.”
힐데가르트는 여유롭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서 진상을 진흙탕으로 만들 작정인가 본데.’
슬슬 퇴로를 완전히 끊어놓는 게 좋겠다.
“그래서 저도 의문인 겁니다. 애초에 디안 소백작은 화살을 맞기는 한 건가요?”
“……뭐, 뭐라고?”
“디안 소백작.”
힐데가르트는 디안 소백작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아무래도 이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백작의 상처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죠?”
“네, 네, 네?!”
“지금 이 자리에서 붕대를 풀고 상처를 보여주시겠어요?”
“……!”
지켜보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본래 활과 화살이란 몹시 위협적인 무기다.
살상력으로 치면 원거리 무기 중 최고. 괜히 사냥 수단으로 쓰이는 게 아니었다.
만일 정말로 디안 소백작이 팔에 활을 맞았다면?
‘저렇게 서 있을 수 없지. 당장 의원이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맞은 즉시 앓아누워서, 온 신경이 팔에 몰린 사람처럼 끙끙거리는 게 정상이다.
“지금 내 아들이 다쳤다는 걸 의심하는 건가!”
“네. 꽤 의심스럽거든요, 저는.”
화살을 맞은 사람이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나?
그래서 힐데가르트는 이오타를 통해 디안 소백작을 감시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들어맞았다.
디안 소백작은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다친 곳 하나 없는 팔의 붕대를 풀고 기지개를 켰다.
힐데가르트가 백작을 맞서듯 노려보았다.
“키스케 전하께선 본인의 발언을 증명하는 증거까지 찾아주셨습니다.”
“큭…….”
“제가 디안 소백작과 카라딘 전하를 믿지 못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보티네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좋네! 마침 보는 눈이 많으니 잘되었군!”
그는 더 두려울 게 없는 사람처럼 제 아들의 등을 밀었다.
“뭣 하느냐 디안! 당장 네 상처를 보여드리도록 해라!”
“아, 아버지…….”
“망측한 짓으로 사건을 엎으려 드니, 이참에 확실히 하는 게 좋겠구나!”
디안 소백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디안은 붕대를 감은 팔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그러곤 악귀처럼 무서운 얼굴로 저를 노려보는 카라딘의 눈치를 살펴다.
“보는 눈이 많다고 신경 쓸 것 없다!”
결국, 울상이 된 그가 보티네 백작의 옷을 잡아끌었다.
“아버지, 드릴,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잠깐만, 귀 좀…….”
디안 소백작은 부들부들 떨며 제 아버지에게 귓속말하기 시작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던 백작의 얼굴이 점차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디안, 너……!”
“이야기는 다 끝나셨나요?”
“……크흠, 어흠!”
부자의 귓속말을 지켜보던 힐데가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나신 거죠? 그럼 이제 붕대 좀 풀어주시겠어요?”
“공녀……. 그…… 아무래도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소.”
“오해요?”
힐데가르트의 입가에 삐딱한 웃음이 걸렸다.
“정확히 어떤 오해를 말씀하시는 거죠?”
“아들놈이…… 다시 생각해 보니, 범인이 레디스 공자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는구려.”
“그거 정말 책임감 넘치는 발언이네요.”
보티네 백작의 얼굴이 수치로 붉게 물들었다.
저보다 훨씬 어린 소녀의 말이었지만 말마따나, 제가 얼마나 무책임하고 염치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어서였다.
“전 이제 디안 소백작의 생각에는 관심 없습니다.”
“고, 공녀!”
“당장 그 붕대를 자르고 상처를 보여주시겠어요?”
눈앞의 소녀는 물론, 검술 대회 우승자인 레디스 공자가 저를 향해 무서운 시선을 쏟아내고 있었다.
백작은 계속해서 헛기침만 했다.
“크흠, 큼! 에흠!!”
“뭘 하고 계세요, 디안 소백작. 설마 상처를 보여주실 수 없는 건가요?”
“그게, 그, 겨우 봉합해 둔 상처라…… 잘못하면 다시 터질 수도 있고…….”
“화살을 맞지도 않았는데 소란을 피운 게 아니고요?”
“크흐으음! 커흠!”
“시끄럽네요. 보티네 백작, 기침할 때는 입을 막고 하세요.”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왜 붕대를 풀지 않는 거죠? 설마 자작극인 건…….”
“차라리 상처를 확인하는 게 낫지 않아요?”
“전부 떳떳하게 확인해야죠!”
“세상에……. 레디스 공자가 크게 낭패를 볼 뻔했네요.”
“아, 이제 알겠어요. 레디스 공자가 검술 대회 우승자였잖아요? 디안 소백작은 예선에서 떨어졌으니…….”
소문이 강이 되어 흐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마 이 일이 끝나면 해일로 변해 닥치리라.
디안 소백작은 무서운 직감으로 몸을 떨었다.
‘끝났군.’
힐데가르트는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훑었다. 그러곤 휙, 고개를 돌렸다.
“카라딘 전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던 카라딘이 몸을 움찔거렸다.
“정말 레디스와 재회했을 때, 전하께선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 찬 걸 보셨나요?”
“……그건.”
“신중하게 대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힐데가르트가 아티팩트를 보여주며 말했다.
“기억이 안 나신다면, 기억나게 해드릴 수 있거든요. 조금 전에 했던 방법으로요.”
“…….”
카라딘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가 주먹을 바르르 떨며 말했다.
“자세히…… 자세히 생각해 보니 내가 잘못 보았던 것 같군.”
“그렇군요.”
힐데가르트의 목소리가 한층 냉랭해졌다.
“네, 그런 거겠죠. 사람 하나를 죽일 듯이 물어뜯는 소문이라는 게 결국 파헤쳐보면 이렇게 별것도 아니라니까요?”
무책임한 언동. 경솔한 비난.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다. 상처받은 사람만 있을 뿐이지.
“디안 소백작. 아카락시아의 명예는 가볍지 않답니다.”
“히, 힐데가르트 공녀…….”
“당신이 하룻밤 동안 더럽힌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명예.”
디안 소백작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부친께서 내 가족에게 퍼부은 명예훼손과 모욕,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저, 저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억측으로…… 사람을 의심해서…….”
“어떻게 사죄할 건가요?”
그녀가 디안 소백작의 말을 잘랐다.
디안은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제대로 사과하고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제게 큰 화가 닥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바늘처럼 뾰족한 힐데가르트 공녀든, 시키는 대로 따르라 했던 카라딘 황태손이든.
혹은, 억울하게 누명을 쓸 뻔한 레디스 공자든.
한때는 든든하고, 여론으로 여겨졌던 주변의 시선들 또한 몰라보게 냉담했다.
그가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레디스 공자. 함부로 사람을 의심해서, 정말 미안합니다.”
“…….”
하지만 레디스의 시선은 차가웠다.
“나도 사과하겠네, 정말 미안하게 되었군.”
“…….”
“한 번만 용서해 주게, 레디스 공자.”
보티네 백작도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그의 연륜이 이때가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음을 걸 직감해서였다.
레디스는 그들 모두를 가라앉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침묵에 귀가 아파질 무렵.
레디스의 입이 떨어졌다.
“사죄와 용서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고, 공자.”
“사과 몇 마디로 끝낼 수 있는 문제였나요?”
레디스가 사납게 되물었다.
“백작께선 제가 사과했어도 이렇게 넘어가려 하셨겠어요?”
상대의 분노를 어림짐작한 디안 소백작이 부랴부랴 말했다.
“제 행동으로 레디스 공자의 명예를 훼손할 뻔했으니…….”
“할 뻔했다는 게 아니라, 이미 하셨습니다만.”
“제가, 아니, 저와 카라딘 전하가 잡은 사냥감 모두 레디스 공자께 넘기겠습니다!”
카라딘은 난데없는 말에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러나 디안 소백작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혼자서 발뺌할 생각이라면, 당신에게 사주받은 일이라는 걸 밝히겠다는 듯.
“나도…… 함께, 사과하지, 공자.”
결국 카라딘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전부, 내가 잘못 본 탓이야.”
디안 소백작이 다급히 덧붙였다.
“자숙, 아니, 정양을 위해 올해 사냥 대회에는 더 이상 출전하지 않겠습니다.”
“…….”
“부디 용서해 주세요.”
힐데가르트는 하아, 하고 길게 숨을 내뱉으며 코웃음 쳤다.
“…….”
레디스는 제가 고통받은 만큼 갚아주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가는, 저들과 똑같은 인간이 되어버릴 것이다.
“경고하는데…….”
결국, 레디스는 힐데가르트를 한 번 바라본 뒤 점잖게 분노를 삼켰다.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레, 레디스 공자…….”
보티네 백작은 물론, 디안 소백작의 몸 또한 흠칫 떨렸다.
“그게 당신을 위해서도 좋을 겁니다.”
레디스의 시선은 다시 나타난다면 진짜로 화살을 쏘겠구나 싶을 만큼 매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