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정확히 엿새째의 사냥이 끝난 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카라딘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활과 화살통을 집어 던졌다.
“젠장……!”
그가 속한 녹색 조는 오늘도 최하위였다.
도움 되는 놈은 하나도 없었고, 말을 잘 듣는 녀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필 도움 하나 안 되는 떨거지만 모여선!”
“전하.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누구야!”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랑케르트 공작이었다.
“뭐 하러 오셨어요?”
카라딘은 칼란도를 향해 벌컥 화를 냈다.
혈연관계로만 따지자면 두 사람은 할아버지이고, 손자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에 걸맞은 애정을 보인 적은 없었다.
그들이 서로에게 원하는 건 응석 부릴 수 있는 할아버지나 귀여운 손자 역할이 아니었다.
황제의 자리에 앉혀줄 외척이요, 가문의 영예를 보장할 황손이었다.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화가 났으니까요!”
소년의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모두가 저와 형님을 비교해요. 제가 그것도 모를까 봐요?”
반짝이는 왕관, 황금과 상아로 만든 옥좌, 만물을 품는 황제의 망토.
빛나는 것들은 모두 키스케를 위한 것.
오직 그만을 위한 것.
키스케가 아니라면 절대 허락되지 않는 그것이, 카라딘은 화가 날 만큼 부러웠다.
“어머니가 오셔서 무슨 생각을 하시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사냥 대회 따위 참여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카라딘은 사냥 대회 기간 내내, 한 번도 키스케보다 사냥감을 더 잡아본 날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망신을 당할 건데, 그럼 황위는…….”
“진정하시지요, 전하.”
칼란도는 바닥에 흩어진 화살을 한데 모았다.
“전하. 저는 로바르네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
“앉은 자리에 따라 사람이 얼마나 변하는지를 직접 본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그는 손수 활과 화살을 정리한 뒤, 카라딘에게 안겨주었다.
칼란도의 뱀 같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지금은 감히 세 치 혀로 전하를 평가하는 자들이지만, 전하께서 황태자가 된다면 고개조차 들지 못할 잡배들이니 괘념치 마시지요.”
“……그렇겠죠?”
“물론입니다. 그러니 평소처럼 사냥하시지요.”
겁먹은 개가 가장 크게 짖는 법이다.
손자의 심리를 파악한 그가 자못 상냥하고 정중하게 말했다.
“거슬리는 것들은 제가 나서서 처리하겠습니다.”
“어떻게 하실 건데요?”
“어디 그림을 한번 그려볼까요?”
칼란도가 히죽 웃으며 손자의 손을 잡았다.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차남이 모종의 이유로 기권하고…… 두 전하께서 경합을 벌이다가 카라딘 전하께서 극적인 우승을 거두는 그림은 어떠십니까?”
“……그런 게 가능해요?”
“물론입니다. 사냥 대회에서는 상대의 명예를 해쳤을 때 사냥감으로 보상하는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칼란도는 준비해 뒀다는 듯 한 가지 묘안을 내놓았다.
카라딘은 피리 부는 소리에 홀린 뱀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들을 귀담아들었다.
“조, 좋아요. 마침 이용할 만한 사람이 한 명 있어요.”
“그거 다행입니다.”
칼란도가 살며시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전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 같을 때는 돌을 하나씩 치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악의를 품은 목소리는 끝까지 다정했다.
* * *
키스케는 최선을 다해 숨을 죽였다.
그는 덫을 놓은 주변에서 서성이는 토끼를 지켜보았다.
‘도망가지 마라, 제발.’
살아 있는 토끼를 잡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냥이야 화염 마법을 쓰든, 화살을 쏘든 잡기만 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살아 있는 생물을 온전하게 잡으려면 그 두 가지 모두 불가능했다.
그는 불과 일주일 전, 토끼 한 마리는 가뿐하겠다고 생각했던 제 이마를 한 대 치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서 덫으로 들어가라…….’
쉴 새 없이 코 근처를 벌름거리던 토끼가 덫을 놓아둔 곳으로 깡충깡충 다가가기 시작했다.
키스케가 극도로 숨을 멈추다시피 한 그 순간.
파사삭!
“뭘 하시나 했더니. 여기 계셨네요, 형님.”
“……카라딘.”
수풀을 헤치고 나온 상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키스케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토끼가 있던 곳을 확인했다.
그러나 눈치 빠르게 도망간 토끼를 대신해서 낙엽만 덫 위에서 구르고 있었다.
“대체 뭘 하시길래 그렇게 바닥에 바짝 붙어 계셨나요?”
“시끄러워. 네가 알 것 없어.”
“설마 그 토끼 하나 잡으려고 바닥을 기어 다니신 거예요?”
카라딘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한 능력으로 토끼라뇨. 실력이 아깝잖아요?”
“뭘 어떻게 잡는지는 내 마음이야. 신경 꺼.”
“첫날에 멧돼지를 잡으셨던 것처럼, 곰이나 더 흉악한 맹수를 잡는 게 좋지 않나요?”
키스케의 매몰찬 말투에도 카라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야 영광의 상처라도 얻어서 남들에게 관심 한 번이라도 더 얻으실 거 아니에요.”
카라딘은 은근한 미소와 함께 비어 있는 덫을 건드렸다.
그러자 사냥감을 포획하는 그물이 허공에 볼품없이 튀어나왔다.
“딱히 관심 끌기 위해 사냥 대회에 참가한 기억은 없는데.”
“…….”
“난 사사건건 관심받고 싶어 하는 너와는 다르니까.”
“거짓말하지 마세요.”
카라딘이 일축했다.
“형님은 항상 제 어머니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셨잖아요?”
“…….”
키스케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러나 동요는 잠깐이었다.
키스케는 애써 놓은 덫이 무용지물이 되었음에도 화를 내지 않고, 대신 자리를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카라딘은 그럴수록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아카락시아 공작령에서 지내는 게 재미있으셨나 봐요? 그곳 생활은 마음에 드세요?”
“네가 재미있게 들을 만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어.”
“그러지 말고 좀만 이야기해 주세요. 같이 온 여자애는 어떻던가요? 힐데가르트, 였죠?”
카라딘은 저를 떨어뜨려 놓으려 하는 상대를 놀리기 위해 따라갔다.
“역시 형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며 형님의 약혼자라도 되는 꿈을 꾸던가요?”
“…….”
키스케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정성이 갸륵하더라도 받아주진 마세요. 아카락시아 공녀라니, 형님의 격이 떨어지잖아요?”
“다물어라.”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는 것들은 나중에 결국…….”
펑!
카라딘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키스케의 손에서 날아간 화염이 지면에 부딪히며 까맣게 그 자리를 태웠다.
“입 다물라고 했어.”
사람에게 던지지 않은 건 힐데가르트가 하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너 또한 마법사가 되었다면, 이 능력으로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하여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지 마라.
순리를 거스르는 힘은 책임이 뒤따른다는 걸 명심해라.
그런 말이 없었더라면, 키스케는 당장 카라딘의 머리카락을 몽땅 태워버렸으리라.
그가 화염 마법을 손에 두른 채 말했다.
“힐데가르트는 한 번도 그런 걸 바란 적이 없어. 네 마음대로 그 애를 짐작하지 마.”
“꽤 아끼시는 모양이죠?”
“두 번 경고 안 할 거야.”
그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숙한 얼굴이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키스케 전하?”
“레디스.”
“무슨 일 있으십니까? 방금 펑 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쯧.”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키스케는 카라딘을 흘기며 마법을 거두었다.
내심 긴장하고 있었던 카라딘은 그걸 보자마자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레디스 공자, 무례하네요. 공작가 차남 주제에 나와 형님의 대화에 끼어들…….”
“레디스. 사냥은 잘되어가?”
“그다지요. 방금 한 마리 놓쳤습니다. 사슴 못 보셨어요?”
카라딘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때마침 마주친 두 사람은 잘됐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봤어도 안 알려줄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실 거 같았습니다.”
“사냥에 정신이 없나 보지? 남은 화살이 한 발밖에 없잖아.”
“전하께서는 아직도 토끼 찾느라 사냥은 뒷전이시고요?”
레디스가 태연하게 대답하며 어깨를 으쓱인 것도 잠시.
“지금, 감히 내 말을 무시한 건가요?”
“그럴 리가요, 카라딘 전하. 안 그래도 방금 아카락시아의 막내 공녀 이야기가 나온 거 같아서 여쭤보려던 참이었습니다.”
“…….”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지요?”
그의 시선이 정확하게 카라딘에게 꽂혔다. 서리처럼 차가운 시선이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요. 잘못 들은 거 아닌가요?”
카라딘이 시치미를 뗐다.
“형님. 말을 섞어도 되는 사람과 안 되는 사람을 구별하는 게 어떠세요?”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 못 느끼는 거야?”
키스케는 카라딘을 똑바로 보며 거듭 말했다.
“아주 잘, 구별해 뒀지.”
“……그래요? 다행이네요.”
주먹을 쥔 카라딘의 얼굴 위로 억지로 만든 웃음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럼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더 이상 시간 낭비를 할 수는 없으니까요.”
등을 돌려 성큼성큼 사라지는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키스케는 작아지는 등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느낌이 안 좋은데.’
키스케의 그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몇 시간 뒤, 레디스에게 화살을 맞았다고 주장한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