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저 각오에 찬 표정을 봐서는 오늘도 레디스에 관한 질문을 퍼부을 거 같은데.
힐데가르트는 속내를 숨기며 끄덕였다.
“그럼요. 이오타, 마실 것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이오타가 처음으로 대답한 뒤 자리를 벗어났다.
“어쩐 일로 그러시나요?”
힐데가르트의 다정한 표정에 안심이 되었는지, 잠시 이오타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유시스가 말했다.
“걱정되어서요. 저번에 레디스 공자님께서 무릎 다치신 건 다 나으신 게 맞죠?”
그 정돈 레디스에게 직접 물어봤어도 대답해 주었을 텐데.
“네. 다 나았으니 걱정하실 거 없어요.”
“그렇지만, 어제 부축받으면서 돌아오시길래…….”
“반대예요. 오빠가 다른 사람을 부축하면서 왔던 거예요.”
“그런 거였어요?”
유시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다행이다! 전 또…… 크게 다치신 줄 알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랬으면 오늘 사냥에도 참여하지 않았을 거예요.”
힐데가르트가 무심코 웃었다.
“오늘이야말로 돌아오면 말을 걸어보지 그래요?”
“그게,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그녀는 기어가는 목소리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용기가 안 난다는 말과 함께.
“공녀님.”
때마침 이오타가 마실 걸 들고 돌아왔다.
“드시죠.”
“고마워, 이오타.”
“유시스 양,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한 유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예상대로 그녀는 이오타를 정면에서 보자마자 오늘도 굳어버렸다.
며칠 내리 무시했던 이오타도 빤히 꽂힌 시선에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제…… 얼굴에 뭔가 묻었나요?”
“아니요,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너무 잘생긴 분이라 무심코 빤히 보고 말았어요.”
어린 새처럼 화들짝 놀란 유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 저는 유시스라고 합니다. 성함을 물어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이오타입니다. 성은 없고…… 사냥 대회 동안 공녀님 곁에서 마석 아티팩트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오타가 한 발자국 떨어지려 했으나, 그녀가 힐데가르트가 가지 못하도록 그의 옷깃을 꽉 잡았다.
“이오타는 재주가 뛰어나거든요. 마석을 아티팩트로 만들 줄 아는데, 여러 가지 도움을 주고받고 있답니다.”
“아티팩트요? 그게 뭔데요?”
“들어본 적 없으세요?”
힐데가르트는 재빨리 이오타에게 눈짓했다.
이오타는 머뭇거리면서도 품 안에서 자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펜던트로 만든 아티팩트가 은은한 빛을 냈다.
“이런 겁니다.”
“작고 귀여운 장신구네요!”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에요. 가지고만 있어도 효과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거든요.”
“위험한 마법이 걸려 있는 건…….”
“아뇨, 오히려 그 반대예요.”
힐데가르트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곤 그녀에게 클로버 모양의 펜던트를 쥐여주었다.
“이건 행운을 부르는 아티팩트랍니다. 한번 차보겠어요? 마침 레디스 오빠도 똑같은 걸 차고 있는데.”
“하, 한 쌍으로 만든 물건인가요?”
“맞아요.”
“차볼래요!”
유시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녀는 힐데가르트가 채워준 마석 아티팩트를 신기하게 매만졌다.
“행운을 부르는 펜던트라니……. 어떤 좋은 일이 생기나요?”
“그건 사람마다 다를 거예요. 행운이라는 건 주관적이잖아요. 선물로 줄 테니 오늘 하루 차볼래요?”
“그래도 되나요?”
“물론이죠.”
힐데가르트는 그리 대단한 기대는 하지 말라며 그녀에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다음 날.
클로버 모양의 아티팩트를 차고 있었던 유시스가, 레디스에게 마무리 축제 파트너 권유를 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 * *
“레디스 공자님께서 마무리 축제 때 파트너 제의를 하셨다고요?”
“정말이에요, 유시스?!”
“아, 아니에요!”
유시스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와전된 것 같아요. 파트너라니,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냥?”
“뭐라고 말씀하셨던 건데요?”
“다, 다친 사람을 치료해 주느라 손수건이 더러워졌는데…… 돌려줄 수는 없을 거 같으니 대신 사주시겠다고.”
유시스의 시선이 살그머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축제 날 밤에…….”
“꺅! 그거 마무리 축제 때 에스코트를 해주시겠다는 말이잖아요!”
유시스의 천막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어제 선물 받은 손수건이 망가졌다고 쭈뼛거릴 때부터 알아봤지.’
어떡하면 좋냐고 칭얼거리더니 결국 새로 사주기로 했구나?
“하아아, 부럽네요.”
“그 아티팩트 덕분인가요? 사랑을 찾아주는 아티팩트?”
“사, 사, 사랑이라뇨!”
유시스가 펄쩍 뛰었다.
“우연이에요! 행운을 부르는 아티팩트예요. 힐데가르트 공녀님이 주신 거고요!”
그 순간, 유시스의 천막으로 놀러 온 꼬마 영애들의 눈이 사금처럼 빛났다.
“정말이세요, 공녀님? 정말 저 팬던트가…….”
“네. 제가 드린 거랍니다. 여기 있는 이오타가 만든 거예요.”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잘 차려입은 이오타는 이제 힐데가르트의 은근한 시선도 곧잘 이해하며 끄덕였다.
그가 품에서 아티팩트를 담아둔 상자를 꺼냈다.
“가까이에서 구경해 보실래요?”
힐데가르트가 싱글벙글 웃자, 소녀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가까이 다가왔다.
“와……! 이렇게 섬세한걸…….”
“직접 만드시는 건가요? 실력이 엄청나시네요!”
“제 천막에 맛있는 과자가 있어요. 드시면서 이야기하실래요?”
어느새 슬금슬금 이오타와 유시스 곁으로 붙은 소녀들이 귀엽게 조잘거렸다.
힐데가르트는 짝, 하고 손뼉을 치며 주의를 끈 뒤 말했다.
“이렇게 된 거 가볍게 다과회라도 열까요?”
“네, 네! 좋아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과자를 가지고 올게요!”
그 뒤로는 일사천리나 다름없었다.
‘예상대로 좋아서 난리가 났네.’
순식간에 차려진 다과회에서는 단연 이오타와 유시스가 가장 큰 관심을 받았다.
특히 관심이 폭발한 상대는 이오타였다.
“이오타, 이오타는 정말 동생이 없나요?”
“정말 잘생기셨네요!”
“우리 오빠랑 바꾸고 싶다…….”
나뭇잎만 떨어져도 웃어줄 것 같은 분위기와 흥분은, 이오타가 만든 아티팩트가 식물을 자라게 했을 때 절정에 달했다.
“다른 건요? 다른 건 또 없나요?”
소녀들이 기대에 찬 얼굴로 이오타를 바라보자, 그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건 판매용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이오타는 난데없이 목 끝까지 채운 단추 풀기 시작했다.
그의 매끈한 손끝이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가 옷 속에 감춰둔 아티팩트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은색 펜던트였다.
“그건 뭔가요?”
“저희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겁니다. 물건에 담긴 기억을 볼 수 있죠.”
이오타가 고개를 돌리며 힐데가르트를 보았다.
“공녀님, 혹시 투명한 물을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투명하기만 하면 되지?”
“네.”
힐데가르트는 그 자리에서 찻잔을 비워낸 다음, 허공에서 물을 만들어 담아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마법을 눈앞에서 본 꼬마 영애들의 눈이 솔방울만 해졌다.
“혹시, 아무나 가지고 계신 소지품을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요?”
“이런 거라도 괜찮나요?”
유시스가 주머니에서 망가진 머리핀을 내밀었다.
“충분합니다. 그럼…… 잘 보세요.”
곧 이오타의 손에서 머리핀과 아티팩트가 똑같이 노을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투명한 물 위에 선명하게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 저건 나잖아?”
찻잔 속 물 안에서 유시스의 모습이 드러났다.
유시스가 어디에 머리핀을 찼는지, 어느 보관함에 담겨 있었는지, 그걸 찬 채 누구와 이야기했는지.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마법은 소지품의 행적을 빠른 속도로 보여주고 있었다.
머리핀에 담긴 기억은 하루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수면 위에 떠오른 모습은 유시스가 머리핀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걸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좋아. 순조롭고.’
힐데가르트는 입가의 미소를 조심스레 머리카락으로 가렸다.
기억 추적 마법 자체는 그녀도 할 수 있는 마법이었지만, 저런 식으로 마법 결과를 남의 눈에 보여주는 방식은 신선했다.
“이건 사물에 담긴 스물네 시간 치 기억을 볼 수 있는 아티팩트입니다. 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건데, 내구성이 좋지 못해서 자주 쓰지는 못한답니다.”
“굉장해요!”
흥분한 유시스가 크게 소리쳤다.
“이거, 저희 오빠가 엄청나게 관심을 보일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테리오 리브 영식께선 수도에서 수사관을 지휘하셨죠?”
“네. 오빠에게 보여주면 놀랄 거에요!”
삐이익-!
그때, 오늘의 사냥 대회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슬슬 다과회는 파하도록 할까요?”
“벌써요?”
“너무 아쉬운데!”
테이블을 둘러싼 얼굴 위로 미련이 깃들었다.
“저도 정말 아쉬워요. 재밌었거든요.”
힐데가르트가 꼬마 영애들을 향해 웃었다.
“괜찮으면 다과회를 함께한 기념 삼아 행운의 아티팩트를 하나씩 드릴게요.”
“네에? 정말이세요?”
“저희가 받아도 되는 거예요?”
“그럼요. 꼭 받아주세요.”
“저…… 저도 주세요!”
너 나 할 거 없이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소녀들은 까르르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특히 마지막까지 다과회에 남아 있던 유시스가 주먹을 쥔 채 말했다.
“공녀님, 저 오빠에게 꼭 전할게요! 마석 아티팩트라는 게 있다고요. 수사에 도움이 될 거라고 전할게요!”
“정말요? 잘됐네요. 마침 아티팩트를 더 많이 만들어볼 생각이었거든요.”
“오빠도 흥미를 보일 거예요! 틀림없어요!”
유시스는 흥분에 찬 얼굴로 반드시 오늘 일을 전하겠다고 약속한 뒤, 본인의 천막으로 돌아갔다.
“공녀님. 설마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신 건가요?”
이오타는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이래서 아티팩트를 많이 만들라고 하셨던 거군요?”
“맞아.”
사냥 대회에 모인 꼬마 영애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금수저라는 점이다.
“영업을 하려면 고객부터 정해야지! 내가 손댄 아티팩트인데 이런 기회를 놓치면 되겠어?”
“아…….”
“두고 봐. 곧 행운의 펜던트 입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테니까.”
그녀가 키득키득 웃었다.
“약속했던 대로, 수익은 반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