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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82)화 (82/166)

80화

얘 혹시 땅에 떨어진 거 잘못 주워 먹었나?

힐데가르트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질문 앞에서 눈만 끔뻑였다.

“아니…… 저기, 일단 진정해 봐.”

그녀가 짐승에게 ‘앉아’를 가르치듯 차분하게 키스케를 타일렀다.

“있잖아, 사람을 좋아하는 게 어떻게 취향만 따져볼 문제겠어.”

“이상형이 없다는 거야?”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거 같아.”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으면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봐.”

얘도 참 별난 애구나.

힐데가르트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키스케 너는? 네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데?”

“나? 나는…….”

키스케의 입이 멈췄다.

내 이상형?

다정하고, 똑 부러지고.

웃으면 살짝 보조개가 생기고.

얼어붙은 호수처럼 빛나는 은빛 머리카락.

종알종알 잔소리할 때는 귀엽지만, 곤히 잠들면 유리로 만든 것 같아서 깨질 거 같아 불안하고.

무지개를 볼 때마다 행복하게 웃으면서도, 때때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슬픈 표정을 짓는.

그런 사람 때문에 요즘은 자나 깨나 화염 마법만 연습했는데…….

“생각해 본 적 없어.”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소년이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래?”

힐데가르트가 장난스레 말했다.

“그럼 나보다는 네가 생각해 봐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왜?”

“너도 곧 약혼 상대를 찾아야 할 나이잖아.”

“…….”

“……키스케?”

키스케는 한 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키스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너 얼굴에 할 말 많다고 쓰여 있다.”

“아니라고 하잖아. 남의 마음 짐작하지 말고 편지나 쓰지 그래?”

왜 가만히 있다가도 삐딱해지고 난리람?

힐데가르트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제자를 바라보며 못내 아쉬운 마음을 감췄다.

‘이상형이 있으면 막시밀리언에게 몰래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소파에 앉은 키스케가 입을 다문 채 등받이에 몸을 맡겼다.

힐데가르트는 그를 빤히 보다가 다시 편지지를 마주했다.

‘키스케의 이상형…….’

그녀는 한참 동안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편지가 잘 써지지 않았다.

간신히 뽑혀 나온 인사말로 하얀 여백을 채우고, 한참 뒤 편지를 마무리할 때였다.

“힐데.”

키스케가 그녀의 등을 향해 말을 걸었다.

“……손수건, 혹시 나 말고 레디스에게 줄 생각이야?”

가다듬은 목소리에는 희미한 긴장이 어려 있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그녀가 냉가슴을 앓으며 대답 대신 편지를 접었다.

그 순간.

“혹시…… 아직도 못 정했으면.”

어느새 등 뒤까지 다가온 키스케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듯, 귓가에서 속삭였다.

살짝 고개를 비틀어 올려다본 키스케의 눈동자가 여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제법 길어진 머리카락도, 그의 달아오른 뺨을 완전히 감추어주지는 못했다.

“네 손수건, 나한테 줘.”

“…….”

싫으냐고 물어보려 했던 키스케는 곧 오묘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 정도로 가까이에 다가온 건 처음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여서일까.

어느 쪽이든 그녀는 놀라워하고 있었다. 그가 익히 잘 아는 얼굴을 하고서.

‘이건……. 왜, 냐고 물어보고 싶어 하는 얼굴이구나.’

드디어 그녀의 표정이 읽히기 시작했다.

커다란 거울, 금이 간 틈새 사이에 드러나는 감정.

“손수건 받고 싶은 사람 따로 있다는 거, 농담으로 한 말 아니야.”

키스케는 이오타가 잡았던 힐데가르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나를 택한다면.

“……후회 안 할 거야. 정말로.”

* * *

사냥 대회 첫날. 개회식이 시작됐다.

티모시 남작은 기원제 겸 개회식을 진행하기 위해 직접 단상 위에 올랐다.

그는 기원제를 위해 봉화를 올린 다음, 참여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얼마 후 봉화가 완전히 타올랐다.

사냥 대회는 총 2주간 진행된다.

세 조로 나뉘어 경쟁하며 우승 조와 우승자가 따로 있는 게 특징이었다.

키스케는 일찍부터 카라딘과 단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카라딘 황태손은 팔에 손수건을 묶고 있었다.

반면, 키스케의 팔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다소 휑해 보였다.

괜히 비교되어서 그런지 더 신경이 쓰인다.

‘하여튼 제자라는 녀석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깐.’

힐데가르트는 투덜거렸다.

‘키스케는 설마 이오타가 신경 쓰였나? 내가 또 제자로 들일까 봐?’

아니면 잘생긴 외모끼리 가지는 라이벌 심리, 뭐 그런 건가?

이오타를 봤을 때부터 부쩍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한 키스케였다.

어제 산책할 때는 그럭저럭 기분 좋아 보이더니만.

오늘은 이오타가 옆에 있는 걸 보자마자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얼굴로만 따지면 너도 엄청나게 잘생겼다고 말해줄 걸 그랬나.’

힐데가르트는 키스케가 퍽 잘생긴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오히려 바라보고 있으면 편안해질 정도였다.

특히 온실에서 공부하던 키스케가 몸을 젖히며 나른한 얼굴을 하는 순간.

그때는 한낮에 바라보아도, 하품이 나올 만큼 편안한 광경이라 마음이 편안했다.

원래 온실을 좋아했던 힐데가르트였지만, 최근 들어 더 좋아진 건 키스케 때문이었다.

‘어휴. 어쩔 수 없지. 레디스한테는 미움 좀 받겠지만…….’

힐데가르트가 모종의 다짐을 마쳤을 때였다.

“안녕하세요, 힐데가르트 공녀님!”

누군가가 그녀의 드레스 끄트머리를 살짝 잡았다.

“어…… 안녕하세요.”

얘가 누구였더라?

“이름이…… 그러니까…….”

“유시스 리브라고 해요! 며칠 전에 만났는데, 기억하시죠?”

“네. 유시스 양. 만나서 반가워요.”

맞아. 그런 이름이었지.

힐데가르트는 겨우 상대를 알아보았다.

분홍 솜사탕. 레디스와 산책하다 마주친 세 명의 소녀 중 레디스에게 손수건을 준 이다.

“혹시 레디스 공자님 못 보셨나요?”

“오빠라면 곧 올 거예요.”

“앗, 정말이요? 다행이다……!”

유시스는 그 대답에 크게 안심했는지 가슴을 쓸어내렸다.

힐데가르트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만 웃고 말았다.

“유시스 양, 왜 황태손 전하가 아니라 오빠에게 손수건을 줬어요? 오빠에겐 너무 과한 거 같은데.”

“과하긴요!”

유시스가 바쁘게 고개 저었다.

“레디스 공자님은 정말 친절하세요! 저번에 너무 오랫동안 붙잡았는데도 불편한 티 한 번 안 내셨고, 또…….”

그녀가 우물거리며 말했다.

“멋, 멋있으시고……!”

분홍색 솜사탕 같은 소녀의 뺨이 잘 익은 자두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꼭 손수건을 드리고 싶었어요. 무, 물론 팔에 매주시면 더 기쁘겠지만, 저는 받아주신 것만 해도 기뻤어요.”

힐데가르트는 속으로 웃었다.

하긴. 저 때는 말 타고 다가오는 왕자님만큼이나 한눈에 반한 상대에게 정신을 빼앗기는 나이지.

‘좋을 때다, 좋을 때야.’

혹시 레디스에게 관심이 있느냐며 놀리고 싶어진 것도 잠시.

유시스는 몹시 행복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그녀는 짓궂은 마음을 눌러 참았다.

“앗! 저기 보세요!”

그사이 조 추첨이 시작됐다.

각 조는 화살 깃의 색에 따라 청, 적, 녹색 조로 나뉘었다.

조를 정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참가자들이 색깔을 입힌 유리구슬을 직접 뽑았다.

한 명씩 상자에서 구슬을 뽑을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일었다.

‘축제 분위기네.’

레디스는 파란색 구슬을 뽑았다.

카라딘 황태손은 초록색 구슬을 뽑았기에, 힐데가르트는 마음 놓고 그의 사냥감이 다 도망가버리기를 기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키스케가 빨간색 구슬을 뽑는 순간.

장내에서 와르르 쏟아지듯 반응이 흘러나왔다.

“와, 키스케 전하와 카라딘 전하가 각자 다른 조예요!”

“그보다 저기 저 사람, 검술 대회 우승자 아니야?”

조별 보상이 랑케르트산 고급 모피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주변의 흥분은 최고조에 다다랐다.

기원제를 마무리하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수다는 멈추지 않았다.

사냥 대회 우승자가 누구일지 어느 팀이 유리할지에 관한 이야기 등.

은근하게 제 주장을 밀어붙이는 게 도박이라도 하고 싶은 눈치였다.

“공녀님, 누가 이길 것 같으세요?”

“개인 우승자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거야 당연히…….”

힐데가르트가 입을 열기 무섭게, 키스케는 기원제를 끝나고 단상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당연한 순서로 그의 주변에 사람이 몰렸다.

정확하게는 비슷한 또래의 영애들이.

“전하, 이 손수건을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전하의 안전을 기원하고 싶어요. 제 것도…….”

저 정도로 내밀면 좀 받는 시늉이라도 해라.

‘최소한 미안하다고 고개라도 젓든가.’

하지만 키스케는 맨 처음, 사냥터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냉담한 거절과 함께 걸음을 돌렸다.

노바가 솜씨 좋게 어린 영애들을 물리자, 키스케는 곧장 힐데가르트에게 다가왔다.

“키스케. 손수건 주겠다는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무시하면 안 되지.”

“바란 적 없는 호의는 피곤해.”

“그래도 받는 척 좀 해. 남들이 널 뭐라고 생각하겠어?”

키스케는 코웃음조차 치지 않았다.

‘정말 일말의 미련도 없는 모양이네.’

힐데가르트는 한숨을 쉬며 옷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자. 내 이름이 새겨진 거야.”

“……!”

키스케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손수건과 힐데가르트를 번갈아 보았다.

평범한 살구색 손수건.

밑부분에 수 놓인 이름 말고는 특이할 것 하나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정말 주는 거지?”

“못 믿겠으면 다시 돌려줘. 레디스가 삐질 거란 말이야.”

“싫어. 절대 안 돌려줘.”

그 조그마한 천 쪼가리 하나가 대체 뭐라고.

키스케는 그녀와 만난 이래로 가장 기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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