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힐데! 무슨 일이야?!”
그러나 키스케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가 목격한 건 상상하던 모습과 영 딴판이었다.
“흐윽…… 헥……. 공녀님…….”
“좀 더! 더! 더 버텨봐!”
환하게 빛나는 마법진. 엎드려서 마법진에 손을 올린 채 신음하는 앳된 미청년.
달리는 경주마를 응원하는 사람처럼 무작정 환호하는 힐데가르트까지.
‘뭐지?’
키스케는 제법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 서서 눈을 의심했다.
기묘한 광경에 뇌가 판단을 거부했다.
“너라면 할 수 있어! 힘내! 말라붙은 선인장처럼 굴지 마!!”
하지만 굳어 있던 것도 잠깐이었다.
키스케의 정신은 처음 보는 청년이 경계심이 일어날 정도로 잘생겼다는 걸 깨닫자마자 곧바로 제자리를 찾았다.
“힘내, 이오타!”
이오타?
그건 뭐 하는 새끼지?
키스케의 기분이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오타라 불린 상대는 식은땀을 흘리면서까지 마법진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의 뺨에는 땀에 젖은 회색 머리카락이 몇 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선 미남자가 눈을 감으니 헐떡이고 있어도 조각상 같은 고아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키스케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힐데가르트가 그에게 온 신경이 몰려 있는 바람에, 키스케의 존재를 뒤늦게 깨달은 것도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어? 키스케?”
“너 대체 뭘 하는 거야?!”
수상한 신음에 놀라서 달려왔더니만.
“여긴 어쩐 일…….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내가 언제 화를 냈어?!”
“지금도 내고 있잖아. 사람 잡아먹을 눈빛이면서…….”
힐데가르트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녀가 흥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잘 왔어. 이거 봐! 마법진을 발동시킬 인재를 찾은 거 같아!”
“…….”
차마 기뻐하는 사람에게 퉁명스러운 말을 던져 초를 칠 수는 없다지만.
거슬린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싫다.
저렇게 조각처럼 잘생긴 남자가 하얀 목이 다 드러나도록 엎드리고 있다는 게.
그럼으로써 힐데가르트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게, 무엇보다도 거슬렸다.
* * *
테스트가 끝난 뒤.
방 안의 분위기는 묘하게 싸늘해졌다.
이오타는 마법진 테스트가 끝나기 무섭게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실내를 싸하게 만들고 있는 주범은 다름 아닌 키스케였다.
설마 했던 황태손을 직접 보게 되어 전율한 것도 잠시.
이오타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저도 모르게 주눅 든 강아지처럼 시선을 내렸다.
‘분명 인사도 제대로 드렸는데……. 뭔가가 마음에 안 드셨던 걸까?’
이오타는 차마 키스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알만 굴렸다.
“정말 잘했어, 이오타. 만족스러워.”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 전혀 말려들지 않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힐데가르트였다.
그녀는 테스트가 끝난 직후부터 이오타의 손을 덥석 잡고 방방 뛰고 있었다.
“마법식을 발동해 본 소감이 어때? 마력 고갈이 일어나거나 힘들지는 않아?”
“예. 너무 오래 열면 힘들지만…… 잠깐씩 열었다가 닫는 건 쉬울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손 좀 놓아주시면 안 될까요.
한 발자국만 떨어지시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이상해요.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황태손 전하의 눈빛이 무서워요.
느껴지는 시선이 아픕니다. 바늘로 쉴 새 없이 찌르는 거 같습니다.
하지만 침묵 속에 숨겨진 메시지는 전달되지 못했던 걸까.
이오타의 바람과는 반대로, 힐데가르트는 더욱 그에게 바짝 붙었다.
“어때? 엘리사 일족 중에서 마법진을 발동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최, 최소한 스무 명은 될 것 같습니다.”
“스무 명이라……. 인원이 살짝 아쉬운걸.”
“그…… 조금 더 가르치면 쉰 명까지도 가능할 겁니다.”
“정말?”
힐데가르트가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웃었다.
앞에서는 햇살 웃음 공격이, 뒤에서는 얼음 시선 공격이 날아오자 이오타는 곤죽이 되어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그가 허겁지겁 힐데가르트의 손을 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좀전의 그건 무슨 마법진이었나요?”
“그건 비밀이야. 때가 되면 알려줄게.”
힐데가르트는 그렇게 말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좋아. 이 정도라면 거래를 성립하기엔 충분할 거 같아.”
“저, 정말이십니까?”
“그래. 나는 네가 원하는 땅을, 너는 내게 필요한 인력을 제공하는 거야.”
힐데가르트의 눈에 둥근 미소가 걸렸다.
“물론 그중에는 너도 포함되고 말이야.”
순간 키스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어느새 방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 그는 일련의 대화를 한 음절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하지만 명심해. 일단 내 손을 잡으면, 거래를 도로 물릴 수는 없어. 그래도 괜찮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힐데가르트는 쐐기를 박았다.
“날 믿을 수 있겠어?”
“…….”
이오타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단순한 열두 살짜리 영애가 아니다.’
다섯 별 공작가의 일원이자, 비토를 수족으로 부리는 공작가의 일원.
내내 황태손의 눈치를 보고 있던 이오타는, 그녀의 담대함을 새삼 깨달았다.
그가 주먹을 꾹 쥐었다.
“……믿겠습니다.”
이오타의 눈빛 또한 암석처럼 단단해졌다.
“이 자리에 증인으로 계시는 키스케 전하와…… 공녀님의 뒤에 있는 아카락시아 공작가.”
“…….”
“그리고 제 절박함을 외면하지 않으신 공녀님을 믿겠습니다.”
이오타가 그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힐데가르트는 그 손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저렇게 웃으니 순한 강아지 같은 인상이네.’
그녀가 악수를 받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나도 잘 부탁하지.”
미하일에게 편지를 써야 할 시간이었다.
* * *
이오타가 방을 나간 뒤.
힐데가르트는 곧바로 편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하일에게 연락하여, 엘리사 일족이 지낼 땅을 확보해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400명 내외의 일족이 터를 짓고 살아가기에 제일 좋은 곳이 어디인지는, 이미 머릿속 지도로 확인을 끝마친 지 오래였다.
‘어디 보자. 미하일을 설득할 편지는 이걸로 된 것 같고…….’
힐데가르트는 캄파넬에 대한 내용을 덧붙인 뒤, 곧바로 라이그너 상단주에게 보낼 편지도 적어나갔다.
그녀가 펜대 끝을 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겨우내 식량도 미리 확보하는 게 좋겠어. 옷이랑 의약품도 미리 챙겨놓으라고 하고…….’
편지지 앞에서 끙끙거릴 때였다.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잠깐 편지를 쓰다가 생각 좀 했어.”
“…….”
키스케가 그녀를 빤히 보았다.
한편, 이오타가 자리를 떠났음에도 키스케는 여전히 방 안에 눌어붙어 있었다.
나름의 오해는 풀렸다.
엘리사 일족이 어떤 상황인지, 어떤 거래를 했는지는 힐데가르트에게 전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키스케의 얼굴은 비 오는 날처럼 우중충하기만 했다.
자꾸만 그녀와 이오타가, 제가 알아듣지 못할 대화를 나누며 미소를 주고받던 게 떠올랐다.
익숙한 미소가 제 쪽이 아니라 다른 놈에게 향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소파의 팔걸이를 뜯어내고 싶어진다.
그녀가 잘생긴 상대와 이야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저하고만 있어 주었으면 하는 유치한 감정이 새싹처럼 쑥쑥 솟아났다.
“키스케?”
힐데가르트는 빠직, 하고 나무 팔걸이가 뜯어지는 소리에 뒤를 돌았다.
“왜 그래? 속 안 좋아?”
“…….”
“오래 기다려서 삐졌어?”
“그런 게 아니야.”
“아니기는.”
힐데가르트가 다 안다는 목소리로 그를 달랬다.
“조금만 기다려. 이 편지만 마무리하고 산책하자.”
“…….”
우습게도, 키스케는 그녀의 한마디에 복잡하게 얽혔던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다니.
‘내가 왜 이러지?’
몇 년 뒤 데뷔탕트를 치르고 나면, 그녀의 이름은 수많은 사교계 인사들 입에서 오르내리겠지.
그리고 언젠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조차 추억거리도 안 될 만큼 멀어지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게 당연하건만.
“…….”
그 순간.
키스케의 머릿속에는 이오타의 손을 잡으며 웃고 있는 힐데가르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뜬금없는 상상이었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건 무심코 으드득, 이가 갈렸던 점이다.
‘알고 있어. 이게 터무니없는 상상이라는 걸.’
하지만 상상력에는 인간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다.
키스케의 입에서 평소라면 담지 않았을 물음이 나온 건 그 때문이었다.
“힐데.”
“응?”
“넌 이상형이 어떻게 돼?”
“뭐? 갑자기 무슨 이상형 소리야?”
힐데가르트가 빙글빙글 돌리던 펜대를 떨어뜨렸다.
“혹시 조금 전에 나간 그런 남자가 취향이야?”
“난데없이 무슨…….”
“저렇게 비 오는 날 축 처진 강아지처럼 귀 떨구면서 종이 상자 안에서 새로운 주인님만 기다리는 녀석이라면 아무나 주워올 수 있어? 그런 녀석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