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77)화 (77/166)

75화

‘잠깐만.’

그걸 왜 나를 보면서 이야기하는 건데.

아니겠지?

에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지…….

그러나 키스케는 냉담하리만치 빠르게 다른 이들에게서 시선을 거두곤 그녀에게 다가왔다.

“힐데. 사냥 대회 기간에는 각자 다른 공관 저택을 써야 할 거 같아.”

키스케가 그녀에게 열쇠를 들어 보였다.

어느새 두 사람의 대화를 훔쳐 듣는 이가 많았는지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저 아이는 누구죠? 전하 옆에 있는 저 아이…….”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데요?”

“전 알 것 같아요. 왜 요전에 신문에서 떠들썩했잖아요.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아, 검술 대회 우승자?”

“그 동생이요. 힐데가르트 공녀.”

새삼 느끼는 거지만…….

‘들려도 모르는 척하기 어렵네.’

힐데가르트는 얼굴이 간지러워지는 걸 느끼며 말했다.

“키스케. 너무 매몰차게 거절한 거 아니야?”

“뭘?”

“손수건 말이야. 받는 시늉이라도 하는 건 어때?”

“싫어.”

키스케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받으면 자기 좋을 대로 기대하잖아. 그럴 바엔 처음부터 안 받는 게 나아.”

누구 제자인지 참 맞는 말만 하는구나.

여기서 누구에게 받고 싶은 거냐며 물어볼 만큼 힐데가르트의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으니…….

‘……여기서 레디스에게 주기로 했다고 말하면 분위기가 싸해지겠지?’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어떡한다?

“힐데, 사냥 대회 전까지는 자유롭게 이 근처를 놀러 다녀도 된다는데 넌 어떡할 거야?”

“어떡하긴. 딱히 돌아다닐 마음 없는데…….”

“틀어박히려고?”

“쉰다고 표현해 줄래? 같이 놀 사람도 없는데 뭘.”

“……없긴 왜 없어? 내가 있잖아.”

키스케는 넌지시 호수 쪽을 바라보았다.

“……모처럼 다른 영지에 왔으니 나랑 주변 구경이라도 하는 게 어때?”

키스케가 일생일대의 제안을 하듯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말하던 때였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양쪽으로 갈라섰다.

그 속에서 한 소년이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형님.”

“……카라딘?”

다가온 소년은 키스케와 똑같은 금발과 붉은 눈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황족, 맞지?’

하지만 같은 황족이라도 키스케와는 생김새며 인상이 크게 달랐다.

키스케가 단정하고 이지적인 이미지라면, 상대는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이마를 완전히 덮은 탓에 귀여운 이미지였다.

그러나 소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자, 사뭇 인상이 달라졌다.

“오랜만에 뵈어요.”

“……그래.”

“봄부터 뵈지 못했으니, 반년 만인가요?”

둥글게 휜 눈매가 빳빳해지자, 나른한 얼굴 위로 서늘한 표정이 스쳤다.

형형한 붉은 눈.

코앞까지 다가온 소년 덕분에, 이제 주변에서 모이는 시선은 간지럽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그간 잘 지내신 것 같네요.”

“너도 그런 것 같군.”

“혹시나 했는데 사냥 대회에서 다시 뵙네요.”

키스케의 대답은 무심했으나 카라딘은 살갑게 말을 붙였다.

“그간 편지 한 장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저도 이것저것 바빴거든요.”

“…….”

“그치만 형님도 나빠요. 저에게 소식 한 줄은 전해주실 수 있었잖아요.”

힐데가르트는 분명하게 목격했다.

‘이 녀석, 입은 웃어도 눈이 웃고 있지를 않네.’

카라딘의 눈은 키스케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농담이에요. 형님도 아주 바쁘셨을 테니까, 제 생각은 못 하셨겠죠.”

싱글벙글 웃는 얼굴.

다정하게 투정을 부리는 말투.

하지만 그것들이 눈빛과 목소리 속에 담긴 묘한 삐딱함까지 전부 감출 수는 없었다.

힐데가르트가 그를 가만 살피자, 카라딘은 다시금 천사 같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그가 활짝 웃으며 사르르 눈매를 접었다.

“그보다 이쪽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새로 사귄 친구분이신가요?”

“……그래.”

“와, 저한테도 소개해 주실 거죠?”

키스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힐데. 이쪽은 로바르네 황자비 전하의 아들이자 내 사촌인 카라딘이야.”

로바르네 황자비.

모를 수 없는 이름에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힐데가르트입니다.”

“카라딘 로젠발트 드롯셀마이어라고 해요, 공녀.”

소년은 제법 능숙하게 웃는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얼굴에 씌운 가면은 쉽게 떨어져 나갔다.

“만나서 반가워요.”

카라딘은 힐데가르트의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곧바로 손수건을 꺼내 자신의 입과 손을 닦았다.

‘뭐야, 이 녀석. 내가 불결하다 그거야?’

최악의 첫인상이었다. 힐데가르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카라딘. 네가 온 건 숙모님 때문이야?”

“네, 맞아요. 어머님이 근처에 계시니까요.”

티모시 영지는 랑케르트 공작령 가까이에 있었다.

“어머님이 사냥 대회 마무리 축제 때 들를 예정이라 하셔서, 저도 오랜만에 얼굴을 뵈러 왔어요.”

카라딘이 천사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사냥 대회에도 참가할 생각이고요.”

“……그래.”

“형님도 어머니를 오랜만에 뵈시는 거죠? 반가우시겠어요.”

퍽이나 그렇겠다.

키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힐데가르트는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뺨 때리는 숙모를 누가 보고 싶겠어? 이 녀석,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니겠지?’

힐데가르트가 알고 있는 한, 로바르네 황자비는 현재 랑케르트 공작가에서 여행이라는 명목의 근신 중이었다.

유폐가 아닌 근신이니 사냥 대회에 얼굴 정도야 내비칠 만도 하지만…….

‘느낌이 좋지 않네.’

힐데가르트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카라딘은 웃는 낯으로 시시한 잡담을 건넸다.

“이번 사냥 대회는 정말 재미있을 것 같네요. 모처럼 형님과 실력도 겨뤄볼 수 있을 것 같고.”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는 눈이 이렇게 많으니 어느 쪽이 한 수 위인지 다들 알겠죠?”

“우승할 자신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그럼요. 정말 열심히 연습했거든요.”

“……네가 활 연습을 했다고?”

“네. 쏘고 또 쏘면서 형님만큼, 아니, 형님보다 잘하려고 애썼어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꼭 이길 거예요.”

카라딘은 여전히 화사한 미소를 뿌렸지만, 어딘지 모르게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그럼 가볼게요. 또 만나요, 형님.”

카라딘은 싱글벙글 웃었고, 언제든 자신의 공관으로 놀러 오라고 말하며 사라졌다.

두 사람은 멀어지는 카라딘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때 레디스가 때맞춰 그녀를 불렀다.

“힐데, 짐 다 옮겼다!”

“알겠어! 지금 갈게!”

힐데가르트는 큰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키스케. 난 먼저 가볼게.”

키스케는 카라딘이 사라진 방향에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데려다줄까?”

“아냐. 너도 피곤하지? 얼른 가서 쉬어.”

“난 견딜 만해. 내 신경은 쓸 거 없으니 가서 푹 쉬어.”

“응. 내일 다시 보자.”

키스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레디스를 향해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그녀가 레디스와 함께 배정받은 작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노바는 그제야 조용히 말했다.

“전하. 저희도 들어가도록 하지요. 주무실 곳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그래.”

그가 머무는 공관은 힐데가르트의 숙소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결국 손수건을 주겠다는 말도, 같이 구경 다니자는 말도 대답을 못 들었어.’

키스케는 실망스러웠으나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자꾸만 걸음이 멈췄다.

걷다가도 한 번씩은 뒤를 돌아 그녀가 사라진 쪽을 보게 되었다.

“…….”

아무래도 소란스러운 사냥 대회가 될 것만 같았다.

* * *

이튿날.

간밤에는 낮았던 기온이 낮에는 부쩍 따스해졌다.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으나, 힐데가르트는 다리를 꼰 채 짜증을 삼키고 있었다.

푹 쉬려 했던 힐데가르트의 계획이 엉망이 된 건, 바로 레디스 때문이었다.

“걘 대체 왜 그런 거로 화를 내는 거야?”

힐데가르트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오늘 아침, 그녀는 기분이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레디스 곁으로 다가갔다.

“어휴, 우리 오빠. 오늘도 잘생기고 멋있고 인기가 폭발할 것 같네.”

“왜 그러냐 너? 무슨 말을 하려고 이래?”

“에이. 내가 뭘.”

“사고 쳤냐?”

“그건 아니고, 우리 오빠는 나 말고도 손수건 남들이 많이 주겠다 싶어서. 그렇지?”

“……야.”

레디스는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곤 미간을 구겼다.

“너 설마 이제 와서 다른 사람한테 손수건을 주려고 그러냐?”

“헤헤…….”

힐데가르트가 부정하지 않고 웃기만 하자, 레디스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누구 주려고 그러는데?”

“아니 그냥, 키스케가…… 많이 기대하길래…….”

“아, 그러세요?”

왜 슬픈 예감은 빗나가지 않을까.

돌이켜 보면 콕 집어 ‘키스케’에게 주려 한다는 걸 밝힌 게 잘못이었을지도 모른다.

레디스가 더욱 삐딱한 태도로 나왔기 때문이다.

“보통은 우리 오빠가 손수건 한 장도 못 받을까 봐 걱정해 주는 게 먼저 아니냐? 그리고 내가 먼저였거든?”

“아니, 그게, 키스케 전하가 콕 집어서 내 걸 받고 싶다고 하길래…….”

“전하가 그런 말을 하셨다고?”

레디스의 눈에서 경계심이 삐져 나왔다.

그녀가 황급히 손을 저었다.

“내가 키스케 전하의 스승이잖아. 응? 나라도 챙겨줘야지!”

뒤늦게 설명하려 했으나 이미 레디스의 기분은 수습 불가 상태였다.

“야! 넌 마석 광산이 그렇게 필요하다면서 노래를 부르던 건 언제고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내가 언제 노래를 불렀다고 그래?”

“맨날 불렀잖아! 밥 먹을 때마다 종알거린 사람이 누군데!”

“왜 그래? 고작 손수건 하나 가지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고작? 너한텐 고작 손수건이야?”

레디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힐데가르트는 뒤늦게 손수건에 담긴 의미가 우승과 ‘안전’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꼭 손수건일 필요는 없잖아. 차라리 방어구를 선물해 줄 테니까…….”

“이게 그런 문제냐? 왜 내가 다른 사람 때문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야 하는 건데!”

“오빠가 애야? 애냐고!”

“애는 너거든! 그러니까 이렇게 억지 부리는 거잖아!”

기어코 힐데가르트도 짜증을 내고 말았다.

“유치하게 왜 이런 걸 가지고 그래?”

“그래! 나 유치하다!”

레디스가 홧김에 해선 안 될 말을 한 건 그때였다.

“실망이다, 힐데가르트, 손수건 하나 선물해서 키스케 전하랑 잘해보려는 멍청한 애들이랑 네 수준이 똑같은 줄은 몰랐다?!”

“말 다 했어?!”

“그래,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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