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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75)화 (75/166)

73화

Chapter 7. 물밑

길었던 장마가 끝났다.

가을이 문턱을 밟고 찾아올 무렵, 아카락시아의 묘지에는 관리인이 생겼다.

레디스는 이제 안심해도 된다며 그녀를 위로했지만, 힐데가르트는 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직도 더위가 완전히 가시지 않아서일까.

키스케는 가끔 그녀의 한숨이 빗줄기에 녹아내렸던 밤을 떠올렸다.

‘빨리 끝내고 싶어. 모든 걸.’

그렇게 말하던 힐데가르트는 몹시 쓸쓸해 보였다.

그녀는 수업 도중 다른 생각에 빠질 때가 부쩍 늘었다.

물론 겉으로는 다름없었지만…….

“키스케! 이거 봤어?”

이른 아침 일찍, 별채로 찾아온 힐데가르트가 편지를 들이밀었다.

“사냥 대회 우승 상품이 덤펠트 마석 광산이래!”

“……네가 반응할 거 같았어.”

“이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해!”

그녀는 아침부터 기운이 넘쳤다.

키스케는 어서 밥 먹으러 가자며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그녀를 빤히 보았다.

‘……오늘은 웃네. 다행이다.’

그는 무심코 안도했다.

금이 간 거울 같은 사람에게는 비밀이 많았다.

환한 햇살 아래에서는 빛이 새어 나와, 그녀에게 균열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쉽지 않았다.

너는 왜 울었던 걸까.

왜 오빠가 나오는 꿈이 너에겐 슬픈 꿈이라고 한 걸까.

‘네 비밀은 대체 뭐지?’

요즘 들어, 키스케는 부쩍 그녀를 더 알고 싶단 생각에 사로잡혔다.

“…….”

“키스케?”

그래, 인정해.

난 너를 더 알고 싶다.

그 눈을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낱낱이 알고 싶다.

네게 더욱 닿고 싶다. 더 오랫동안 함께 있고 싶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항상 웃기만 했으면 좋겠다.

“키스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걸음을 멈춘 키스케는 눈가를 쓸었다.

무심코 시선이 닿은 힐데가르트의 입술에 온 신경이 머물렀다.

예쁜 얼굴이며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만으로도 키스케는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었다.

‘요즘 왜 이렇게 힐데가르트가 신경 쓰이는 거지?’

키스케는 하루건너 한 번씩, 힐데가르트가 괜찮은지 의식하고 있었다.

눈으로는 계속 그녀를 좇고 만다.

“키스케, 머리 아파?”

“그런 거 아니야. 잠깐 졸려서.”

키스케는 대충 얼버무리며 고개를 저었다.

“못 말려. 아침 먹고 운동하며 잠 좀 깨우는 게 좋겠다.”

힐데가르트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자연스러운 접촉마저 불에 덴 것처럼 반응하고만 키스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키스케는 그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아서 단단히 거머쥐었다.

* * *

아침 식사는 소란스러웠다.

“미하일 형이 사냥 대회 안 간다는 쪽에 은화 한 닢.”

“가는 쪽에 은화 세 닢.”

“미안. 안 갈 거야.”

미하일의 대답에 희비가 엇갈렸다.

레디스는 환호를 했고, 돈을 날린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식탁을 쳤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던 키스케도 그 대답이 의외였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공작은 영지에 남을 생각인가?”

“이번에는 그렇게 하려고요.”

“다른 귀족들도 많이 오니 인맥을 넓히기 좋을 텐데?”

“저보다는 레디스가 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해야 하는 일도 있으니 전 남을 생각입니다.”

미하일은 예의 바르게 대답한 다음,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힐데는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갈 거야! 무조건 가야지!”

“그렇다고 하네요. 동생을 잘 부탁드려요, 전하.”

“아니지! 스승인 내가 키스케를 잘 책임지는 거지!”

“이런 동생입니다만, 정말…….”

미하일이 식은땀을 흘렸다.

맞장구를 치듯 레디스가 끄덕였다.

“전하. 힐데가 너무 건방지면 언제든지 꾸짖으셔도 됩니다. 다 받아주실 필요 없어요.”

“뭐라고?”

격분하는 힐데가르트와 달리, 키스케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제오늘 일이겠냐는 태도였다.

‘이것들이……. 책임은 무슨!’

힐데가르트는 기가 찼다.

키스케가 실수로 숲을 태워 먹기라도 하면 제일 먼저 마법으로 물을 뿌리며 뒷수습을 하는 게 그녀였다.

그녀가 무어라 항변하려 들자, 미하일이 솜씨 좋게 화제를 바꿨다.

“힐데, 대회 때는 레디스랑 전하를 공평하게 응원해 줘야 해.”

“맞아. 날 덤으로 응원하지 말고, 제대로 우승 기원 손수건이라도 챙겨줘.”

“내 손수건 비싼데?”

우승 기원 손수건은 사냥 대회의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전통적으로는 연인끼리 주고받는 징표지만, 서로 호감을 가진 이들 사이에서도 특별한 의미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다.

이 낭만적인 징표는 어느새 인기 투표에 가까워졌고, 은근한 과시 수단이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선 참관객이 참가자 중 마음에 둔 이에게 손수건을 주고, 참가자는 답례를 건네며 서로 감정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발전했다.

우승과 안전을 기원하는 만큼, 단 한 명의 참가자에게만 전하는 게 관례였다.

“레디스, 넌 손수건 하나도 못 받으면 어떡해? 내가 줄까?”

“형, 밥이나 먹어.”

레디스가 미하일을 향해 투덜거렸다.

힐데가르트는 피식 웃었다.

‘손수건이라……. 참 귀엽네. 그런 걸 주고받는다는 게.’

귀족 간의 결합은 정략결혼이 우선이다. 하지만 연애결혼이나 약혼도 드물지는 않다.

격이 맞는 상대에게 호감을 보이며 관계가 깊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런 의미로 손수건을 누가 누구에게 받았느냐는 사냥 대회의 은밀한 즐거움이었다.

‘키스케도 손수건 엄청 많이 받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힐데가르트가 곧 눈을 빛냈다.

“내 손수건은 누구한테 줄까? 난 우승한 사람한테 손수건을 줄 생각이었어.”

“보통 손수건을 먼저 주지 않냐? 우승을 해야 주겠다고?”

“역발상이지, 역발상.”

“그게 무슨 딸기잼으로 딸기 만드는 소리야.”

레디스가 투덜거렸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를 향해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어떠세요, 황태손 전하? 제 손수건값으로는 우승 상품, 명예, 영광 정도만 가져오시면 될 거 같은데.”

“……아침부터 강도를 만나니 잠이 다 깬다고 해두지.”

“에이. 그럼 레디스 오빠는 어때? 내 손수건 받을래? 받아서 마석 광산만 날 줘.”

“나도 잠이 깬다.”

떨떠름한 반응들이 날아왔으나, 힐데가르트는 의지를 굽힐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사냥 대회 우승 상품은 무려 티모시 영지의 마석 광산이었다.

그녀로서는 몹시 탐나는 우승 상품이었다.

“그런데 사냥 대회는 마법을 익힌 사람이 더 유리하지 않아?”

“그렇지? 보통은 활이나 석궁으로 참여하지만 마법이 훨씬 더 유리하지. 안전하기도 하고.”

“그럼 이번 대회에선 키스케 전하께서 우승하시는 거 아닐까?”

힐데가르트는 키스케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모르지. 키스케는 어차피 사냥 대회 같은 거 귀찮아하니까, 실력만 보여주고 느긋하게 쉬지 않을까?”

“…….”

“……그렇지, 키스케?”

“…….”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힐데가르트의 고개가 키스케 쪽으로 돌아갔다.

“주방장에게 오늘도 맛있었다고 전해줘.”

“엑?”

그녀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예상치 못한 라이벌의 등장이었다.

“농담이지? 진짜야? 우승을 노리고 있었어?”

“당연히 우승할 생각인데. 적당히 하려고 대회에 참가하는 사람이 어딨어?”

키스케는 코웃음 쳤다.

호숫가 근처로 다가간 그가 빈 물통에 물을 담았다.

“난 사냥 좋아해. 내가 언제 적당히 하겠다고 말한 적 있나?”

“잠깐. 이건 내 계획에 없었어!”

“티모시의 마석 광산이 그렇게 탐나?”

“당연하지!”

힐데가르트가 곧장 대답했다.

아무리 마석 가치가 떨어졌다 해도, 광산이 통째로 사냥 대회 상품으로 나오는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아…….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고양이처럼 구는 제자인 줄만 알았는데.”

“까불지 마.”

물통에 물을 채운 키스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차가운 물방울이 힐데가르트의 뺨에 닿았다. 그녀가 소리 높여 웃었다.

두 사람은 본가 저택에서 제법 떨어진 호수로 향했다.

힐데가르트의 순간 이동 마법 실험을 위해서였다.

그녀가 지면에 그려둔 마법진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셋 세면 던져 줘.”

“알겠어.”

물통을 든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가르트가 숫자를 세자 마법진이 눈부시게 빛났다.

키스케는 재빠르게 마법진 위로 물통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물통은 하얀 빛무리에 감싸며 사라져 버렸다.

‘벌써 몇 번이나 본 광경이지만 역시 신기하군.’

얼마 후, 다시 한번 마법진이 파랗게 빛나자 키스케와 힐데가르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곧 파란 빛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흐아아……!!”

“노바!”

마법진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노바였다.

그는 키스케가 밀어 넣었던 물통을 손에 들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것도 잠시.

노바는 확 바뀐 풍경과 두 사람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공녀님! 이번에도 성공인가요?”

“응! 어때? 몸이 저리거나 아프지는 않아?”

“괜찮아요. 아픈 곳은 하나도 없어요.”

노바가 물통을 마구 흔들자 출렁이는 소리가 났다.

“물통도 멀쩡하고…….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런 걸 개발하신 건가요?”

“원래부터 있었던 마법인데 내가 목적에 맞게 고친 거야. 어때?”

“최고예요! 마법으로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습니다.”

노바는 감격스러운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 마법이라면 수도에 있는 초코 퐁 르마리에도 하루 만에 다녀올 수 있겠네요?”

“그게 뭔데?”

“노바가 좋아하는 초콜릿 디저트 가게.”

키스케가 대신 대답했다.

그는 노바에게서 물통을 빼앗은 다음,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쏟았다.

투명하고 시원한 물줄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용물도 멀쩡하고.”

“이번에도 성공이네!”

힐데가르트가 뿌듯하게 웃자, 노바가 정신없이 손뼉을 쳤다.

“정말 굉장하세요! 이 마법이 정착한다면 제국에 얼마나 큰 변화가 일어날지……!”

“아직은 남들에게 말하지 마. 내년까지 비밀이거든.”

“그럼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노바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믿는 사람도 없을 거라며 연신 놀라움을 표했다.

지주 상단에서 쓰러진 날 이후 키스케는 그녀의 조수가, 노바는 도우미가 되어 힐데가르트의 실험에 동참하게 되었다.

의도했던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좋은 조력자였다.

‘특히 키스케가 이렇게 도움이 될진 몰랐지.’

키스케는 그녀의 실험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요즘 들어 키스케는 실험 노트보다 그녀를 더 빤히 볼 때가 많았다.

애써서 모른 척하고는 있었지만, 가끔은 얼굴이 뚫어질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은근히 내 옆에 와서 잘 붙어 있단 말이지…….’

제자들이란 다 이런 건가.

힐데가르트는 제 손을 꼭 잡았던 플람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지.

그쪽이 여우과라면 이쪽은 고양잇과……. 사자로 변할 가능성도 보인다.

‘완전히 다르지, 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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