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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74)화 (74/166)

72화

방 안은 어둑했다.

무겁게 쏟아지는 장대비 소리에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눅눅한 공기와 낮은 천장.

“여긴…….”

“저택이야.”

상단에서 그렇게 쓰러지자마자 저택으로 돌아온 모양이다.

키스케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쓸었다.

“왜 울어?”

힐데가르트는 뒤늦게 자신이 자면서 울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손을 쳐내는 대신 차분히 대답했다.

“슬픈 꿈을 꿨어.”

“오빠가 나오는 꿈이 슬픈 꿈이야?”

“응.”

“…….”

단칼에 돌아온 대답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키스케는 더 캐묻지 않았다.

지금의 힐데가르트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그대로 깨지고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다.

그는 깨달았다.

힐데가르트는 크고 오래된 거울 같은 사람이었다.

환한 곳에서는 커다란 빛을 받으며 찬란했지만, 어두운 곳에서는 낡고 선득했다.

“울지 마.”

키스케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매 끝을 훑었다.

“네가 우는 걸 보면 마음이 안 좋아.”

“…….”

“정 울고 싶으면, 아주 큰 소리로 울어. 누구든 들을 수 있게. 너는 혼자서 울 거 같으니까.”

“…….”

힐데가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그녀가 물었다.

“내가 쓰러진 뒤에는 어떻게 됐어?”

“바로 저택으로 돌아왔어. 피로가 겹친 거 같다던데.”

“……상단주랑 비앙카도 놀랐겠네.”

잠도 며칠이나 설쳤고, 마력도 빠듯하게 썼으니 체력적으로 완전히 뻗어버린 모양이다.

키스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희미한 안도가 실려 있었다.

“고마워, 키스케.”

“뭐가?”

“그냥…… 여러 가지로 말이야.”

미하일이었다면 걱정이 지나쳐서 오히려 그녀가 안심시켜 줘야 했을 테고, 레디스였다면 왜 울었냐며 꼬치꼬치 물었겠지.

이 순간에는 다름 아닌 키스케가 곁에 있다는 게 큰 위안이었다.

‘네가 가장 외롭고 힘들 때, 하던 걸 전부 내던지고 너를 향해 달려오는 사람. 자신보다 네 마음을 우선하는 사람.’

쓰러지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을 기억한다.

그녀를 부르며 달려오는 키스케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힐데가르트는 쓴웃음과 함께 손을 뻗었다.

그녀의 검지가 키스케의 코끝을 톡 쳤다.

“빚 하나 졌네. 언젠간 꼭 갚을게.”

“……마음대로 해.”

“화염 마법 잘하더라. 정확하던데?”

“그 정도는 기본이지.”

힐데가르트가 손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짐마차에서 떨어졌던 건 뭐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못 봤는데.”

“호박.”

“……와, 하마터면 식자재에 깔려 죽을 뻔했잖아?”

키스케는 조금이지만 생기가 돌아온 그녀의 목소리가 기꺼웠다. 그는 유리로 만든 것 같은 상대를 향해 물었다.

“그걸 기억하는 거면, 나랑 내기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지?”

내기? 무슨 내기를 했더라?

힐데가르트는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떠올렸다.

‘아. 그랬지.’

그러고 보니 약속했었다.

키스케가 여름 내에 화염 마법을 완벽히 익히면, 왜 이동 마법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려주기로.

“기억해. 그런데 이동 마법을 어디에 쓰는지가 그렇게 궁금했어?”

“비밀은 너무 숨기려 들면 더 신경 쓰여.”

“으음, 알겠어. 약속했던 거니 알려줄게.”

힐데가르트는 키스케를 향해 반쯤 돌아누웠다.

“그 대신 아무한테나 이야기하지 마.”

“처음부터 말할 생각 없었어. 그래서? 왜 연구했던 거야?”

커다란 베개에 머리를 기댄 힐데가르트가 누운 채로 하나씩 설명했다.

“내년에 게이트를 세울 생각이거든. 미하일 오빠의 작위 승계식에 맞춰서.”

“게이트?”

“응. 나는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순간 이동 마법 게이트를 만들 거야.”

먼 거리를 순식간에 오가는 이동 마법 게이트.

힐데가르트가 설명하는 내용은 아직 마도학을 완전히 익히지 못한 키스케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으며 생각해 보니, 그녀가 왜 그렇게 필사적으로 연구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이동 마법 게이트가 얼마나 유용한지 알면 다들 깜짝 놀랄 거야.”

“그렇겠네.”

“이제 좀 궁금한 게 풀렸어?”

키스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다면, 네 이름은 백 년 안 돼서 역사서에 실릴걸.”

“역사서?”

힐데가르트는 키득키득 웃었다.

“그런 건 기대도 안 해. 키스케, 너도 어렴풋이 눈치챘잖아. 우리 공작가의 상황이 어떤지.”

“…….”

그는 그녀의 말에 담긴 속뜻을 금방 파악했다.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좋게 말하면 소탈하지만, 직설적으로 말하면 공작가다운 격식이 부족하다.

다른 가문에 비해 월등히 적은 사용인 숫자라든가, 이제 막 재설립된 기사단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나는 마법으로 우리 가문을 다시 세울 거야. 아카락시아는 가장 먼저 흥하고, 가장 나중에 망해야 해. 반드시 그래야 해.”

“…….”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키스케는 묘하게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의 말에서 느껴진 감정은 열망이 아니었다. 그건 고집과 의무에 가까웠다.

“공작가는 지금도 건재하잖아.”

“부족해. 최소한 80년 전 레온하르트 공작이 팔아치운 광산을 사들이고, 다시 옛 시절의 융성함을 되찾아야 해.”

“목숨이라도 걸 기세네.”

“이미 건 각오야.”

“…….”

흡사 전쟁이라도 나가는 사람 같다며 놀리기에는 상황이 좋지 못했다.

“난데없이 황궁 온실에 침입했던 것도 그 실험 때문이었어?”

“음…… 그건 아니지만, 그 일이 좋은 경험이 되긴 했어.”

“취지는 훌륭하지만 오늘처럼 피로가 겹쳐서 쓰러질 정도로 몰아붙일 건 아니라고 본다.”

“아니기는. 그게 내 꿈인걸?”

키스케의 시선이 묘했다.

“……꿈이라고, 그게?”

키스케는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보다 한참은 더 어렸을 무렵, 황태자였던 아버지가 살아 있었을 때.

황태자인 아버지가 여행지에 들렸다는 소식에, 수많은 이가 뛰어나와 황실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광경을 보고 흥분했던 키스케는 무심코 선언하듯 말했다.

‘아버지, 저도 아버지처럼 훌륭한 황태자가 될게요! 황제도요!’

당돌한 말에 아버지는 실컷 웃었다.

황궁에서 손주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막시밀리언도 그대로 큰 웃음을 터뜨렸고, 키스케에게 열심히 하라며 깃펜을 하사했다.

의욕이 잔뜩 넘쳤던 어린 키스케는 매일 쉬지 않고 공부했다.

하지만 어떤 날에는 열심히 하던 와중에도 불안해졌다.

정말 좋은 황제가 될 수 있을까?

내가 해낼 수 있을까?

키스케가 알고 있는 ‘꿈’이란 그런 것이었다.

고집이나 의무가 아닌, 두려움과 설렘이 공존하는 것.

그래서인지, 그녀의 입에서 나온 꿈이라는 단어는 낯설게만 느껴졌다.

키스케가 잠시 입을 다물자, 힐데가르트는 곤란해졌다.

미하일이라면 좋은 꿈이라고 칭찬을 했을 테고, 레디스였다면 핀잔을 주었겠지. 카유크라면 킬킬대며 웃어 버렸을 테다.

하지만 키스케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이어진 그의 말은 그녀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즐겁고 재미있으면 취미고, 무섭고 두려우면 꿈이라고 했어. 최소한 나는 그랬어.”

“…….”

“힐데, 넌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거 같아서 무서워?”

힐데가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그럼, 즐겁고 재미있어?”

“…….”

힐데가르트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냥 빨리…… 해내고 싶은 거뿐이야.”

그래서 이 짐을 다 내려놓고 싶다.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미안함도, 참담한 가문의 상황을 되짚을 때마다 신물이 올라오게 쓰린 감정도.

그녀가 담담히 말했다.

“빨리 끝내고 싶어. 모든 걸.”

“…….”

키스케는 그런 건 꿈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그걸 다 끝나면 그땐 뭘 하고 싶은데?”

“생각해 본 적 없어.”

“한번 생각해 봐.”

“지금?”

힐데가르트는 살짝 당황했다.

키스케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녀는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말했다.

“모든 일이 다 끝나면…… 그땐 편히 잠들고 싶어.”

“…….”

“어쩌면 죽은 듯이, 꿈도 꾸지 않고 영원히…….”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어차피 레온하르트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

그때야말로 꿈도 안 꾸고 푹 잘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키스케는 그녀의 말에 뺨을 맞은 사람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놀라게 한 걸까.’

하지만 한 점 티끌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제 마음을 농담이라며 얼버무리고 싶지 않았기에, 둥글게 몸을 말고 눈을 감았다.

얼마 후, 향로에서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올 무렵.

“…….”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올 즈음, 키스케는 그녀의 어깨까지 얇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거울은 마주하는 사람을 비추어주지만 스스로를 비출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금이 간 부분을 그녀 자신만이 모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 * *

바닥을 짚은 칼란도 랑케르트가 힉힉 숨을 토했다.

“약속했던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군.”

“커헉, 컥…….”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될 줄은 몰랐어.”

남자의 목소리는 감미로웠다.

그렇기에 한 손으로 사람의 목을 조르는 상황에서는 지독하게 이질적이고 위협적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이대로 캄파넬에서 그 물건을 찾지 못한다면 누가 봐도 내 손해인데 말이야.”

“꺼억…… 끄…….”

“말해봐, 칼란도 랑케르트 공.”

상대는 칼란도와 거의 비슷한 체구였다.

그러나 손아귀 힘이 어지간한 장사의 힘도 훌쩍 뛰어넘어, 인간 수준이라고 하기에는 힘들었다.

허리를 훌쩍 넘긴 보라색 머리카락, 불길할 정도로 번뜩이는 빨간 눈에 지루함이 번졌다.

“말해보라니깐?”

그가 칼란도의 목을 다시 한번 움켜쥐며 들어 올린 것도 잠시.

남자는 뒤늦게 상대가 죽을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걸 깨달았다는 듯, 칼란도를 내동댕이쳤다.

“쿨럭, 컥, 크헉……!”

구사일생한 칼란도의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가 다시 돌아오기 무섭게, 그가 상대에게 애원하듯 소리쳤다.

“아,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

“제가 당신을 거스를 리 없지 않습니까. 땅만 되찾는다면, 그때는!”

공포에 질린 칼란도의 입가에 비굴한 웃음이 번졌다.

“공작령의 모든 죄수를 동원해서라도 땅을 파내고, 찾으시는 걸 바칠 겁니다. 맹세합니다!”

남자는 쿵, 쿵 소리가 나도록 이마를 바닥에 찍는 칼란도를 내려보았다.

칼란도는 상대의 끔찍한 핏빛 눈을 들여다볼 용기가 없었기에 바짝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상대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놀랍게도 방금까지 악마처럼 붉은 안광을 부라리던 사람의 눈동자가 노랗게 변해 있었다.

칼란도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안심할 시간이 있나?”

“프, 플람…….”

“당신이나 나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사내는 부쩍 피곤하다는 얼굴로 이마를 쓸어올렸다.

“슬슬 짐승으로 변해서 이 몸의 주도권을 붙들고 있는 것도 한계다.”

“이보게.”

“마성신은 당신을 찢어 죽이고 싶어서 안달 나 있어. 난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잘 지경이야.”

칼란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러니 잘해봐. 이번 사냥 대회가 마지막 기회란 걸 잊지 말고.”

그 말과 함께, 플람의 모습이 순식간에 노란 눈의 검은 고양이로 변했다.

* * *

며칠 뒤, 기운을 차린 힐데가르트와 아카락시아 공작가 앞으로 초대장이 도착했다.

가을 사냥 대회 초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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