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그…… 그냥 말로 설명해 줘도 돼.”
“그렇구나. 알겠어.”
한동안 침묵이 일었다.
힐데가르트는 그가 뻣뻣하게 굳어 있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얘도 참…….’
자기가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있으니, 부끄러웠냐며 놀리기도 어려웠다.
그녀는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실습은 밖에서 하는 게 좋겠어. 온실에서 불 잘못 다뤘다간 진짜 방화범 될걸?”
“밖으로 나갈까?”
“내일부턴 그렇게 하자. 지금 실력으로 봐선 불을 낼 일은 없을 거 같으니까.”
“…….”
키스케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의 조언이 무색하도록, 키스케는 좀처럼 마법에 성공하지 못했다.
“자꾸 그렇게 보고 있으면 부담돼. 다른 곳 좀 봐.”
“자기가 못 해놓고 왜 내 탓을 해?”
“물가에 내놓은 애도 아니잖아.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 테니까 차라도 마시면서 기다리든가.”
“도와줘도 그러네.”
힐데가르트는 옆으로 밀어둔 이동 마법 연구서에 손을 댔다.
“알았어. 책이라도 보고 있으면 되지?”
“그래.”
“중간중간 지켜본다? 말로만 설명해 줘도 잘하는지 두고 볼 거야!”
“그러든가.”
키스케가 무심히 대꾸했다.
피아노를 연주하던 그때처럼 저 빳빳하게 치켜든 목이며 굳은 어깨에서 힘을 풀면 한결 편해질 텐데.
힐데가르트는 하려던 말을 꾹 참고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키스케가 수련에 몰두하고, 힐데가르트도 마법 연구에 집중하며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키스케는 그녀가 감시병처럼 지켜보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생겼다.
키스케가 화염 마법을 수련하면, 힐데가르트는 마법 연구서를 읽었다.
‘나야 잘됐지.’
키스케는 키스케대로, 저는 저대로 유익하게 시간을 쓸 수 있으니 이득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키스케가 만들어 내는 불꽃은 커졌다.
새끼손톱만 했던 불꽃이 주먹만 한 구체가 되었을 즈음, 힐데가르트가 마법식을 고치면서 구겨 버린 종이도 쓰레기통을 꽉 채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바깥에 놓아두었던 테이블이 여름 볕을 피해 그늘 가로 몇 번 자리를 옮겼을 무렵.
“됐다!”
힐데가르트가 벌떡 일어났다.
“뭐?”
“됐어! 됐다구! 이거였구나! 체내 마력을 이용한 방식이라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거였어!”
마법을 연습하던 키스케가 그녀 쪽으로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야?”
“이동 마법 연구 말이야! 막혀 있던 부분이 풀렸어!”
힐데가르트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었다.
“좀 진정해.”
키스케가 그녀를 말렸지만, 힐데가르트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쏟아졌다.
“결국 성공한 거야? 또 마법으로 황궁 온실에 침입하려고?”
“그런 거 아니거든!”
진정한 힐데가르트가 자리에 앉았다.
“좀 쓸 데가 있어서 나한테 필요하게 마법을 개량한 거야.”
“어디에 쓰려고?”
“그건 말 못 하지. 비밀이야.”
“비밀? 왜 새삼?”
“너한테 뭐든 말할 순 없잖아.”
키스케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너, 내 수업 시간에 딴짓했으면서 뭐 때문에 그랬는지는 말 못 하겠다고?”
“왜 갑자기 억지를 부리고 그래?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물어봤으면서.”
“그래서 지금 물어보잖아.”
가까이 다가온 키스케가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가 쭉 지켜보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막상 하나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부아가 치밀었다.
키스케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유치한 감정과 싸우는 동안, 힐데가르트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궁금해도 이번엔 안 돼. 안 알려줄 거야.”
“…….”
“자, 얼른 마저 연습해야지. 아직 마법을 과녁에 제대로 못 맞췄잖아!”
“……내가 어떻게 하면 말할 건데?”
삐진 키스케의 얼굴이 너무 귀여웠기에, 힐데가르트는 무심코 비밀을 말해줄 뻔했다.
“그렇게 궁금해?”
그녀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반문한 것도 잠시.
힐데가르트는 어쩌면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미소 지었다.
“알려줄 수는 있는데,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여름 내로 화염 마법을 완벽하게 익혀봐. 움직이는 물체를 한 번에 맞출 수 있을 만큼. 그러면 알려줄게.”
두 사람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어떻게 할래?”
“……좋아.”
팔짱을 낀 키스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 내기 무르기 없기야.”
“당연하지. 말해두는데 여름 내로 해내는 거다? 기간 내에 못 하면…….”
“아가씨!”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저편에서 로빈이 달려오며 그녀를 연신 불렀다.
“죄, 죄송합니다! 키스케 전하, 시급한 일이라서 방해를…….”
“됐어. 무슨 일이지?”
“왜 그래, 로빈?”
이렇게 경황없이 행동할 하녀가 아닌데.
힐데가르트는 의아하다는 듯 로빈을 보았다.
“큰일이에요, 아가씨! 아카락시아 가문의 묘지가…… 저주받은 거 같아요!”
힐데가르트는 물론, 키스케마저 눈을 크게 떴다.
* * *
힐데가르트는 곧장 가문의 묘지로 달려갔다.
그곳은 죽었다가 깨어난 그녀가 처음 눈을 뜬 무덤가였다.
‘내 가짜 무덤은 그렇다 쳐도, 거긴 레온 오빠랑 숙부님도 묻혀 있는 곳인데!’
평민은 공동묘지를 이용하지만, 귀족은 가문의 묘지를 따로 두는 게 일반적이다.
도착하기 무섭게 힐데가르트는 경악을 터뜨렸다.
‘이게…… 다…… 뭐야?’
가문의 묘지는 울타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가시넝쿨이 말뚝과 나무 울타리에 칭칭 감겨 있었다.
끄트머리가 누렇게 말라붙은 잡풀, 흙먼지가 쌓인 비석, 갈라진 흔적이 남아 있는 바위까지.
“힐데.”
“오빠! 이게 다 뭐야?”
힐데가르트는 두 명의 기사와 함께 서 있던 레디스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부터 이랬어? 왜 이렇게 엉망이 된 거야?”
레디스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나도 모르겠어. 어머니께 꽃도 바칠 겸 들른 건데 내가 왔을 땐 이미 이 상황이었어.”
“작년엔 이러지 않았잖아.”
레디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년에 한 번씩은 와서 관리했던 곳인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혹시 이상한 마법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아니야. 마력의 기운은 없어.”
힐데가르트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건 마법에 걸린 상태라기보단 오히려…….”
마법의 영향으로 마력이 사라진 대지였다.
힐데가르트는 한 발자국씩 묘지로 들어섰다.
묘지는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커다란 석상과 비석에는 부연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까끌한 모래가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신발 밑창에서 미끄러졌다.
‘마치 80년 전 캄파넬 같아.’
제물을 이용한 소생 마법 때문에 캄파넬의 땅은 거칠게 메말랐다.
그녀가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여기가 어떤 곳인데!’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준 숙부와 레온하르트가 잠든 곳이다.
약이 바짝 오른 힐데가르트가 오른손을 치켜들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무수한 바람이 칼날처럼 휘몰아치더니 잡풀과 가시넝쿨을 잘라냈다.
힐데가르트는 그것들을 모조리 태운 다음, 막대한 마력으로 일대에 물을 뿌렸다.
레디스는 깜짝 놀랐다.
몇 사람이 달려들어서 종일 해야 할 일을 여동생이 불과 몇 분 만에 끝내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차가웠다.
“오빠. 사람 좀 불러서 묘지를 다시 돌보는 게 좋겠어.”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보다 괜찮은 거야?”
“괜찮냐니? 마법 말이야? 그거라면…….”
“아니, 그거 말고.”
한숨을 쉬며 다가온 레디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많이 놀랐잖아, 너.”
“…….”
“내가 그 정도도 못 알아보겠냐. 오빠인데.”
레디스의 따뜻한 손이 그녀를 쓰다듬었다.
“하긴. 넌 예전에도 겁이 많았지.”
레디스가 삐져나온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저택에서 사람을 불러오라고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파손된 묘비석이 없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나도 도울게.”
“그럴래? 그럼 부탁할게.”
레디스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힐데가르트는 가장 먼저 레온하르트의 묘비석을 확인했다.
레온하르트의 묘비석은 그녀의 상반신보다 훨씬 더 큰 하얀색이었다.
‘다행이다. 금이 간 곳은 없는 거 같아.’
설마 이런 일로 레온 오빠의 묘를 찾게 될 줄이야.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몰라보게 찌그러졌다.
그녀는 맨손으로 묘비석에 묻어 있는 흙먼지를 털어냈다.
‘레온 오빠…….’
딱딱하게 굳은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어둔 것 같았다.
오빠의 묘가 이렇게 될 때까지 내버려 두다니.
‘미리 찾아와 볼걸.’
그녀는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꾹 참았다.
힐데가르트는 로빈이 비명을 지를 걸 알면서도 겉옷을 벗어서 묘비석을 바득바득 닦았다.
새삼 오빠의 묘비석을 보니, 그가 세상에 없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녀가 사람을 죽였어도 끌어안고 대신 돌을 맞아줄 사람이었다.
그건 힐데가르트도 마찬가지인지라, 오빠가 물려받은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그녀에게 삶의 이유이자 보람이고 기쁨이었다.
그녀는 울적한 마음으로 레온하르트의 묘비석을 뒤로했다.
그리고 숙부와 새언니, 미카엘리스의 묘비석을 지나 자신의 가짜 무덤 앞에 섰을 때.
“……어?”
힐데가르트의 입에서 얼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거……. 이 마법진 모양은…….’
환생 직후, 무덤가에서 눈을 뜬 힐데가르트가 보았던 건, 피로 그려진 마법진이었다.
지금은 핏자국이 사라졌지만 마법진의 흔적이 까맣게 남아 있었다.
정신이 없었을 때는 몰라보았던 흔적이, 지금은 분명히 보인다.
‘플람, 이거 네가 그린 마법진이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여기 이 부분. 끄트머리를 꼭 삐죽 올려서 그리는 건 네 방식이잖아.’
처음 보는 마법진.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의 흔적.
문득 막시밀리언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스승님의 죽음은 그냥 거기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80년이 흘렀으니 당연히 죽었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며 상심한 마음을 달랬는데.
“이건…….”
플람이 그린 마법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