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키스케의 루비처럼 붉은 눈이 그녀를 빤히 보았다.
“자. 그럼 편히 말씀해 보세요, 황태손 전하.”
“…….”
그는 어지간히 못 믿겠다는 듯 힐데가르트를 살폈다.
곧 협상이 시작됐다.
“……책은 일주일에 한 권씩만 읽을 거야.”
“엑? 일주일에 한 권? 너무 적지 않아?”
“난 너랑 달라. 같은 책을 천천히 다시 읽는 게 더 좋다고.”
“으음. 알겠어. 그다음은?”
키스케가 입을 열자, 힐데가르트가 쥐고 있던 펜이 날아가듯 종이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한 시간 단위로 공부 계획을 잡지 말 것.
수업은 일주일에 총 세 번으로 한정할 것.
“자습할 때는 다리를 꼬고 있어도 내버려 둘 것.”
“그건 안 돼!”
“……좋아. 그럼 그 항목은 빼도 좋아.”
힐데가르트가 벼락같이 거절하자 키스케가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 후로도 조율 항목은 차근차근 늘어났다.
다행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은 없었다.
“이걸로 끝?”
“그래.”
“좋아. 그럼 이젠 내 차례네?”
키스케가 끄덕이자 힐데가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조율 항목을 읊었다.
설명하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말없이 도망치지 않기.
자체 휴강하지 않기.
노바를 대신 출석 시키지도 않기.
책 찢지 않기.
“수업 내용이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기.”
“그런 건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럼 내가 왜 마법사를 하겠어? 독심술사를 하지.”
키스케가 뚱한 얼굴을 하자, 힐데가르트는 한숨을 쉬었다.
“키스케. 말로 표현하지도 않았으면서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건 기적을 바라는 거랑 똑같은 거야.”
그녀의 설익은 포돗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런 기적을 남에게 바라지 마. 너만 실망하게 될 거야.”
“…….”
키스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안에 깃든 동의를 읽은 힐데가르트가 이어서 한 가지 항목을 더 추가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네가 가을에 있을 사냥 대회 전까지 쓸 만한 화염 마법을 배웠으면 좋겠어.”
“숲에 불낼 일 있어?”
“얘가 무서운 소리를 하네.”
가을철에 산불 잡기가 얼마나 힘든데 그런 소리를.
“멀쩡한 숲을 불태울 생각이 제일 먼저 들다니. 방화범의 자질이 있구나, 키스케.”
“화낸다.”
“농담이야.”
그녀가 피식 웃었다.
“내가 임명장을 받은 이상, 사냥 대회 때는 반드시 너를 들먹이는 사람들이 나타날 거야.”
“네 선생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게 될 거란 말이지?”
“그렇지. 물론 저급한 말에 휘말릴 생각은 없지만……. 알지?”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키스케는 금방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 어느 정도의 수준을 원하는 거야?”
“흐음. 그러네. 그것도 지금 정해둘까?”
힐데가르트는 고민과 함께 펜을 돌렸다.
“올해 사냥 대회는 어디서 열려?”
“작년엔 브로반스였으니 올해는 티모시일 거야.”
티모시 지방이라면 한적한 휴양림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크게 위험한 짐승이 출몰하지는 않겠네.’
“그럼 토끼나 오소리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사냥감을 완벽히 맞출 수 있는 수준이면 되겠다.”
“쉽네. 그 정도면.”
“우습게 보지 마. 목숨을 위협받는 날짐승이 얼마나 재빠른지 알아?”
힐데가르트는 웃는 얼굴로 키스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정 못 하겠다 싶을 때는 말해. 장작에 불붙이는 수준으로 낮춰줄게.”
“……야.”
“아무렴 황태손 전하께서 마법을 번번이 빗맞혔다는 말을 듣는 건 좀 그렇잖아? 그런 말 들으면 자존심 상하지.”
“웃기지 마.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토끼나 오소리로 끝날 거 같아?”
“센 척하는 것도 지금뿐이다? 마법 잘못 쓰면 네 말마따나 방화범 되는 거 순식간이에요?”
“…….”
이크. 너무 자존심을 건드렸나?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똑똑히 보았다.
“그럴 일 없으니 걱정 꺼. 수업은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지.”
“좋아. 내일도 온실에서 만나자.”
역시 아직 애라니까.
* * *
힐데가르트가 떠난 뒤, 키스케는 뒤늦게 자신이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존심이 상하니, 센 척하니, 방화범이니 하는 말에 울컥한 게 실수였다.
“……젠장. 결국 내일부터 다시 수업받게 생겼잖아.”
힐데가르트는 소란스럽고 떠들썩했다.
그래서 그녀가 재잘재잘 이야기하면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가 앗 하는 사이에 휘말리기 일쑤였다.
‘어차피 적당히 가르치고 그만두면 되는걸.’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건지.
‘……하긴. 따지고 보면 이상한 사람은 그 녀석이 아니라 나야.’
이상한 일이었다.
‘힘들 때는 힘들다고 해도 돼.’
‘나는 네 스승이잖아. 내가 아니면 누가 네 편이 되겠어?’
그런 말에 마음이 움직이다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단 생각을 했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었는데, 어느새 조금만 더 힘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키스케의 시선이 그녀와 함께 적은 수업 계획서로 향했다.
자그만 글씨로 서로의 조건을 적은 종이.
서명란 끄트머리에는 힐데가르트가 그려 넣은 토끼 한 마리가 당근을 물고 있었다.
보통은 그런 그림 옆에 약속을 잘 지키자든가, 힘내자는 말이 적혀 있을 테지만.
힐데가르트는 역시 비범했다.
토끼 옆에 채찍을 그려 넣었다는 점만 봐도 그랬다.
“누가 이까짓 약속을 안 지킬까 봐서.”
키스케가 피식 웃었다.
그의 손가락이 무심코 토끼가 그려진 종이를 문질렀다.
“…….”
어느새 아카락시아 영지로 내려온 지 한 달이 넘었다.
이곳은 그녀가 말했던 대로다.
공작저는 바람이 잘 들어서 한적하게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기에 좋았다.
슬슬 손톱만 한 봉오리를 보이기 시작하는 연분홍색 장미라든가,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별채라든가.
그 모든 것이 키스케의 마음을 편안케 했다.
심지어 힐데가르트의 떠들썩한 웃음소리도 가만 듣고 있으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상했다.
낯설고, 어색하고, 엉뚱했다.
저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왜 싫지 않을까.
이래서야 꼭…….
무표정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려다보던 키스케가 곧 종이를 구겼다.
‘안 돼.’
힐데가르트는 분명 좋은 사람이었다.
첫 만남이야 다소 엉망이었지만, 할아버지를 낫게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물론 그녀의 가족도 작정하고 남을 해코지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키스케는 더욱 겁이 났다.
키스케는 자신의 직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하게 경계하는 편이었다.
누구든 염산을 뿌리며 마차에 타라고 협박했던 사람이 2황자비가 보낸 시녀임을 알게 되면 그렇게 될 것이다.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믿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미 대가를 크게 치른 키스케였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를 구겼다.
“전하, 이제 별채에 불을 밝힐까 하는데 괜…… 찮으세요?”
별채로 들어선 노바는 소파룸 한가운데에서 멀거니 서 있는 키스케를 발견했다.
그의 시선이 손도 대지 않은 사과 바구니로 향했다.
“너지. 이거 가지고 오게 한 거.”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요?”
“치워. 필요 없으니까.”
“하지만…….”
“이젠 안 먹으니까 치우라고.”
키스케는 구긴 종이를 쓰레기통에 넣은 뒤 자리를 떴다.
‘그래서 난 네가 좋아, 키스케. 널 잘 아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걸?’
자꾸만 그녀의 목소리가, 웃음이 그림자처럼 들러붙고 난리였다.
* * *
수업은 다음 날부터 다시 시작됐다.
약속은 약속이었으므로, 두 사람 모두 서로가 내건 조건을 지켰다.
키스케는 더는 수업 도중 건들거리지 않았다.
특히 책 내용을 이해하면 찢어서 종이비행기로 접는 짓을 관뒀다.
힐데가르트는 그것만으로도 감동의 눈물이 솟아날 것 같았다.
“멀쩡한 책을 왜 찢니, 왜. 나중에 다시 읽을지도 모르는걸…….”
“내버려 두라고. 내 마음이니까.”
키스케는 투덜거렸지만, 책을 고이 덮었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건 힐데가르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키스케에게 숙제로 내줄 수 있는 책은 딱 한 권뿐이었다.
따라서 종전보다 일곱 배는 집중해서 한 권의 책만 골라야만 했다.
속독을 익힌 그녀와 달리, 키스케는 본인 말마따나 곱씹으며 책을 읽는 타입이었다.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
둘은 수업이 시작된 지 보름 만에 기초 마도학을 끝내고 속성 마법 실습에 돌입했다.
키스케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는 하루 대부분을 별채에서 보냈으며 수업을 빼먹지 않았다.
답답할 때는 노바와 단둘이서 검을 맞대며 대련을 했다.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얼마 안 가 힐데가르트는 깨달았다.
‘취미가 일광욕이라고 해도 믿겠네.’
키스케는 지나치게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먹고 자는 별채와 수업을 진행하는 온실만 오가는 게 전부였다.
그는 심지어 공작령이 어떤 곳인지 구경 삼아 마을로 내려가 보지도 않았다.
그건 열네 살의 삶이 아니었다.
힐데가르트는 경험적으로 그 나이대의 소년이 얼마나 다루기 골치 아픈지를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막시밀리언만 해도 열네 살 때는 그녀에게 성검 때문에 시비를 걸어 오지 않았던가?
나이를 먹으며 의젓해졌던 레온하르트도 사정은 비슷했다.
그가 체스 클럽에서 힐데가르트를 헐뜯던 놈팡이와 주먹질을 하며 바닥을 굴렀던 게 열네 살 때였다.
심지어 플람조차도 저 나이 때엔 엘릭서를 만든답시고 솥단지를 태워 먹었건만.
그에 비하면 키스케는 성직자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조금 걱정이 된 힐데가르트가 그를 찔러보았다.
“키스케. 음식은 입에 맞아?”
“뭐?”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필요한 거라든가.”
“없어. 있어도 네가 신경 쓸 거 아니야.”
“흐음.”
열네 살이 어떨 때인가.
세상의 중심은 나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는 나이다.
막시밀리언도 레온하르트도 플람도 그 마의 열네 살을 그냥 넘어가지 못했다.
그에 비하면 키스케는 지나치게 조숙했다.
조숙한 아이란 결국 어른의 입맛에 맞춰서 자랐다는 뜻이다. 손이 덜 가고, 속을 덜 썩이도록.
힐데가르트가 인생을 통틀어 가장 행복했을 때는 레온하르트와 눈싸움을 하며 옷을 다 찢어 먹었을 때였다.
아이는 아이다울 때 가장 행복한 법이다.
키스케는 자꾸만 옛날의 저를 떠올리게 한다.
다가오는 사람을 밀어내는 척하지만 의외로 속을 터놓으면 꾸밈없는 모습이 꼭 그랬다.
만일 레온하르트가 없었더라면, 그 어린 날의 저 또한 이런 모습으로 자라지 않았을까.
‘두고 보렴. 반드시 네가 아닌 카라딘이 황위에 적합하다는 걸 그분께서도 아시게 될 거다.’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건지는 짐작 가는 바가 있다.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와 억지로 가까워지기보다는 당분간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다가왔을 때 그러했듯이.
“왜 그래? 뭐가 잘 안 돼?”
“이거.”
키스케의 시선이 손바닥 안으로 향했다.
그의 손 안에서 새끼손톱만 한 불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마력이 일정하게 주입되질 않아서 그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연습하는 수밖엔 없지. 천천히 해. 지금도 이 정도면 잘하는 거야.”
“언제는 가을까지 해내라며.”
“이 속도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힐데가르트는 키스케와 똑같은 마법을 보여주었다.
당장에라도 꺼질 듯이 위태로웠던 키스케의 마법과는 달리, 그녀의 불꽃은 훨씬 큰 데다 쉴 새 없이 일렁였다.
“마력을 직접 운용해 줄 테니 비교해 봐. 중심부터 마력을 집어넣기보다는 이렇게…….”
힐데가르트가 키스케의 손을 잡은 그 순간이었다.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키스케가 팍, 소리 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