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아. 그게 궁금했구나.
힐데가르트는 피식 웃었다.
“오빠가 신문을 가져다줘서 읽어봤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황태손 전하의 이름이 실려 있어서.”
그렇다. 사실 베이비 파우더가 이렇게까지 단시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건, 키스케의 덕도 있었다.
비앙카가 만든 베이비 파우더는 평범한 허브 파우더보다 훨씬 효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홍보를 하자니, 시간이 몹시 촉박했고, 관심을 끌기에도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이용한 게 바로 신문이었다.
사람들은 황족의 생활을 알고 싶어 한다.
무엇을 먹는지, 입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저택 앞에 있는 기자들만 봐도 알 수 있지만, 키스케에 대한 관심은 상당했다.
그건 써먹을 만한 관심이었다.
힐데가르트는 아카락시아 가문에서 황태손의 교육을 맡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릴 겸 간단한 인터뷰를 신문사에 보냈다.
인터뷰 내용은 간단했다. 황태손 전하께서 아카락시아 공작령 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슬쩍 베이비 파우더를 언급했지. 황태손과 호위 기사가 큰 관심을 보인 물건이라면서.’
하단에는 베이비 파우더 광고를 대문짝만하게 쾅쾅 실었다. 로열 가드인 노바의 추천 문구도 함께였다.
인터뷰와 광고는 금방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참고로 저택 앞에서 죽치는 신문 기자에게는 절대로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얼쩡거리면 기삿감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과 저택 앞에서 기웃거리던 신문 기자들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여러모로 운이 좋았어.”
키스케가 투덜대긴 했지만 이미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체념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운만 좋아서 이렇게 된 건 아니야. 네가 발명한 베이비 파우더는 그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야.”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고작 광고 몇 번에 이만한 양을 주문할 정도로 맹목적으로 열광하지는 않는다.
베이비 파우더가 이만큼 팔리게 된 건, 그만큼 효능이 좋았기 때문이다.
피부가 좋아지는 데다 수포나 발진을 막고 붉은 기를 없애준 효과가 컸기에 약재상에서도 구매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상인의 자긍심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
쓰임새가 애매한 활석으로 이만한 가치를 만들어낸 건 비앙카의 공이다.
“어엿한 상인이구나, 비앙카.”
“…….”
힐데가르트는 비앙카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걸 모른 척해줬다.
“감사해요, 아가씨. 정말…….”
“아이참, 진짜. 울지 말라니깐. 일부러 못 본 척했는데 왜 울고 그래?”
발돋움한 그녀가 비앙카를 토닥였다.
“그리고 기뻐하긴 아직 일러. 진짜는 지금부터 시작이니까.”
* * *
“뭐라고?”
“베가 상단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금화가 와르르 쏟아졌다.
안토니오가 내민 돈은 정확히 400만 케루블이었다.
진짜 금화임을 한눈에 알아본 레이븐의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이만한 돈이 어디서 난 거지? 설마…….”
“상인이 돈을 어디서 구해오겠습니까. 전부 물건을 팔아서 가지고 온 돈입니다.”
대체 무슨 수를 썼단 말인가?
‘400만 케루블을 한 번에 갚는다고? 이럴 리가!’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브린힐드 지주 상단에는 이만한 금액을 한 번에 지급할 여력이 없었는데.
먼젓번 만남 이후 다시 만난 오늘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설마 그 파우더인가 뭔가 하는 게 그렇게 잘 팔렸단 말이야?’
최근 브린힐드 상단은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마지막 발악으로 남아 있는 재고라도 털고 있나 보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인가?
“이…… 미친 늙은이!”
마우제네에게 작위를 약속하는 답장을 받고 줄곧 들떠 있었던 게 실수였다.
며칠 넘게 상단 일을 손에서 놓고 있었던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상단의 정보를 빼돌린 거냐?”
“무슨 헛소립니까. 아직 베가 상단에 들어가지도 않은 내가 무슨 수로 정보를 빼돌린단 말입니까?”
안토니오가 괜한 트집에 코웃음을 쳤다. 그가 레이븐을 노려보았다.
“남은 이자도 이번 주 중으로 전부 갚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가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베가 상단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던 말은 취소요. 나는 계속 브린힐드 상단에 남겠소.”
“네 딸이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는 모양이지?”
“…….”
레이븐은 혀에 독을 바른 사람처럼 신랄하게 욕을 퍼부었다.
랑케르트 기사단에서 나온 이후, 야인 생활을 오랫동안 했던 탓에 근본 없는 욕설이 마구 쏟아졌다.
물론 안토니오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상인으로 오랫동안 살아온 그로선 이 정도 욕설은 주점에서 주정뱅이를 상대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마음대로 떠드십시오. 당신이 뭐라고 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
“이……!”
“그깟 반지 하나 낄 기회 때문에 사람을 협박하는 당신은 상단을 운영할 자격이 없습니다.”
안토니오는 레이븐의 텅 빈 열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당신은 상인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죽어도 모를 겁니다.”
“안토니오!”
“진짜 기회가 어떻게 오는 건지도 말입니다.”
레이븐은 문을 닫고 나간 상대에게 커다랗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남자의 등 뒤로, 둥둥 떠다니던 빛의 구슬이 반딧불처럼 깜빡이다가 사라졌다.
마차에 있던 힐데가르트는 마법으로 엿듣는 것을 그만두었다.
베가 상단 건물에서 나온 안토니오가 마차에 올랐다.
“이걸로 되겠습니까?”
“네. 잘하셨어요.”
지금쯤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을 레이븐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으신데.”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비앙카는 무사하겠지요?”
“그럼요.”
힐데가르트는 안토니오의 불안함을 눈치채고 재빨리 대답했다.
“당분간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 정도로 바쁜 거 아시잖아요? 상단에서 먹고 잘 테니 밖에 돌아다닐 일도 없고, 호위로 사람을 붙여두었으니 문제없어요.”
그녀가 차분히 설득하자, 안토니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공녀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레이븐은 절대, 저대로 물러날 사람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너무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말했잖아요, 제게 다 생각이 있다고.”
지주 상단은 이제 막 활기를 되찾았다.
그 활력을 이어 나가기 위해선, 베가 상단과 레이븐을 빠르게 정리해야 한다.
“당장 오늘 밤부터 시작하죠. 비앙카 역할을 맡을 사람도 구해놨어요.”
“벌써 말입니까?”
안토니오가 눈을 크게 뜬 것도 잠시.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이 떠올랐다.
“아가씨는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신 것 같습니다.”
“네?”
“제 아들딸도 제법 야무지게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가씨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입니다.”
그야 저는 환생을 했으니까요.
힐데가르트는 속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이야기 자주 들어요.”
“이런. 자주 들으시는 겁니까?”
몰라보게 누그러진 눈빛으로 안토니오가 그녀를 보았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실 필요는 없는데 말입니다.”
“…….”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처음이었다. 레온하르트가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을 다시 꺼낸 사람은.
“……안토니오 부상단주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음? 무엇이든요.”
문득 궁금해졌다.
안토니오는 왜 레이븐에게 그렇게 말한 걸까?
“상인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건가요?”
“……음. 글쎄요. 이건 저만의 철학입니다만.”
“상관없어요. 대답이 궁금한걸요.”
힐데가르트가 그를 빤히 보았다.
그러자 안토니오가 끄덕였다.
“상인으로 산다는 건 돈을 통해 세상에 기여한다는 겁니다. 공작가의 명예와 긍지는 비옥한 옥토에서 비롯되지요?”
안토니오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번졌다.
“어떤 상인이든 많은 돈을 벌면 사회에 보탬이 되는 길을 선택하지요. 우리도 세상의 일원이기에 그렇게 해서 명예와 긍지를 가지는 겁니다.”
신분이 낮은 자들은 다른 방식으로 명예와 긍지를 가진다며, 그가 자랑스레 말했다.
“특히 저는 지주 상단의 일원으로서 아카락시아 영지와 함께 살아갈 각오를 했습니다. 그게 벌써 30년 전이군요.”
주홍빛 땅거미가 밤의 베일을 걸칠 무렵.
안토니오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삶의 터전이자 고향이 되는 아카락시아 영지였다.
돈보다도 이곳을 택한 걸 그는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었다.
하지만 베가 상단의 협박 사건을 겪으며 그는 처음으로 후회했다.
차라리 상인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하나뿐인 가족이 위협을 겪지 않았을 거라며.
“미안해요. 더 일찍 지주 상단 일에 신경 쓰지 못해서.”
“아닙니다. 아카락시아 공작가가 힘든 상황인 건 저희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가 머쓱한 얼굴을 했다.
“아가씨가 아니었다면, 상인으로 산다는 게 무엇인지 잊어버릴 뻔했습니다.”
잔잔한 파도처럼 조용한 목소리가 연이어 고마움을 입에 담았다.
“감사합니다. 더 늦지 않게 도와주셔서.”
“……안토니오도 비앙카도 인사가 너무 빠른 거 아니에요?”
힐데가르트는 그와 마찬가지로 마차 밖의 아카락시아 영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인사는 조금 더 아껴두셔도 괜찮아요.”
레이븐 상단주가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면.
랑케르트 가문의 영향권에 있다면, 반드시 반응을 보일 터였다.
“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세요. 이제 상인의 긍지가 없는 베가 상단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 * *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늦은 밤이었다.
‘빌어먹을 안토니오 자식. 감히 나를 우습게 봐?’
서너 명의 사내와 함께 밤거리에 숨어든 레이븐이 턱짓했다.
‘말로만 협박하니 못 알아들은 모양인데, 후회하게 해주지.’
드문드문 이어지는 등불밖에 없는 거리.
상단 일이 늦게 끝났는지, 비앙카는 안토니오와 함께 걷고 있었다.
‘본보기로 삼아주지.’
그가 고용해 둔 건달들과 눈빛을 주고받으며 으슥한 곳까지 비앙카의 뒤를 쫓았다.
‘눈앞에서 딸의 갈비뼈라도 부러뜨려 놓으면 정신을 차리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가 연장을 든 팔을 힘껏 치켜든 그 순간이었다.
“……젠장. 여동생 때문에 별짓을 다 해보네!”
비앙카, 아니, 비앙카인 줄 알았던 사람이 가발을 벗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