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깔끔한 문장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쭉쭉 다음 문장을 적어나갔다.
상당한 자금이 들긴 했지만, 명령하신 대로 일을 마쳤으며 곧 캄파넬 지방이 손에 들어올 거란 내용이었다.
[그럼 마우제네 님께서도 다시 만날 때까지 몸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침내 마침표가 찍혔다.
레이븐이 마우제네, 정확히는 랑케르트 가문에게서 연락을 받은 건 지금으로부터 1년 전이었다.
그는 한때 랑케르트의 기사였지만, 칼란도의 눈 밖에 나는 바람에 공작가에서 쫓겨날 뻔했다.
마우제네가 그를 거두어서 상계(商計)를 가르쳐 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한물간 퇴물 기사 취급받으며 매일매일 목숨을 걸며 용병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번 일만 잘 풀린다면…….’
레이븐은 반지 하나 없는 텅 빈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그땐 정말로 귀족이 될 수 있다.’
그는 서랍을 열어, 1년 전 마우제네가 그에게 보낸 편지를 다시 읽었다.
편지에는 캄파넬 지방을 랑케르트 가문으로 가지고 오면 작위를 주겠다는 약속이 적혀져 있었다.
마우제네는 편지를 읽은 즉시 태우라고 명령했으나, 레이븐은 따르지 않았다.
‘마우제네 님이라면 약속을 지키겠지.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이건 보험이야.’
편지는 마우제네의 필체로 적혀 있었고, 봉투에는 랑케르트 가문의 도장이 찍혀져 있어서였다.
‘얼마 남지 않았다.’
지주 상단이 무너지는 걸 막기 위서라면, 틀림없이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도 손을 쓸 터다.
그들은 상단을 위해 막대한 돈을 대는 것보다는 캄파넬이라는 쓸모없는 땅을 넘기는 방법을 택하겠지.
유해를 운운하는, 귀족 특유의 면피용 발언은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왔다.
레이븐이 실소를 흘렸다.
돈은 노력하면 벌 수 있지만, 작위는 그렇지 않다.
그는 기사보다도, 상인보다도 귀족이 되고 싶었다. 돈으로는 흔들 수 없는 그 지위가 간절했다.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
그가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우제네가 보낸 편지를 다시 서랍으로 집어넣는 손가락이 기어 다니는 거미 다리처럼 으스스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주 뒤.
상황은 그가 편지로 적어 보낸 것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어느 화창한 봄.
브린힐드 부상단주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아가씨!”
“라이그너 상단주님, 매번 그렇게 문을 세게 열 필욘 없다고…….”
“대박입니다, 아가씨! 아니, 공녀님!”
라이그너 상단주가 황급히 말을 바꿨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또 허브 파우더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스무 상자 나요!”
“그래요? 예상대로네요.”
“이 결과를 예상하셨다고요? 이걸?”
라이그너 상단주는 기쁨의 비명이 나올 것 같은 걸 눌러 참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주문만 해도 작년 매출을 총 합한 것보다 많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힐데가르트는 웃으며 호로록, 소리가 나도록 차를 마셨다.
“이 정도면 밀린 대금을 갚을 수 있을 겁니다!”
“정말요? 비앙카는 괜찮다고 해요?”
“예! 어떻게든 물량을 맞춰보겠다고 합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지금까지 주문받은 수량이 얼마나 되죠?”
“정확히 천백이십 상자입니다!”
오백 상자 정도만 팔리면 좋겠다고 애원했던 게 두 배는 넘게 팔렸다.
“잘됐네요. 하지만 명심하세요, 이번 일에서 가장 중요한 건 활석을 얼마나 신속하게 조달해서 가공하느냐예요.”
“예. 최대한 빨리 활석을 캐도록 인부들에게 명령해 두었습니다.”
“납품일을 지킬 자신 있어요?”
“물론입니다! 이미 예약금도 받았으니 약속은 지켜야지요!”
큰소리로 대답한 라이그너 상단주는 보는 사람의 목이 아파질 정도로 끄덕였다.
“채굴이야말로 저희 상단의 강점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많은 활석을 확보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실력을 썩히는 인부들이 많은 아카락시아다.
보석도 아니고 활석을 캐오라는 말에 의아한 반응을 보였지만, 어쨌거나 일감이 생긴 일은 좋은 징조였다.
게다가 경도가 낮고 비누처럼 부드러운 활석은 채광하기 어렵지 않았다. 채굴 속도는 상당했다.
“그런데 그 광고는 대체 어떻게…….”
“실례합니다, 상단주님.”
대화 도중 문이 열렸다.
“수도 잡화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신문 광고를 보고 연락했다는데…….”
“이, 이리 주게!”
라이그너 상단주가 황급히 봉투를 받았다.
그는 사선으로 편지를 읽어내렸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을 빠르게 집어내는 데 성공했다.
“주, 주, 주, 주문!”
“상단주님, 심호흡이요.”
“삼, 삼, 삼백 상자!”
“복식호흡, 복식호흡 하세요.”
라이그너 상단주는 벼락 맞은 나무처럼 몸을 떨며 직원에게 외쳤다.
“우드! 인부를 더 고용하게! 이대론 모자라!”
“예? 지금보다 더요? 임시직이라지만 벌써 오십 명이나 새로 고용했는데?”
“더 필요하네. 백 명으로 늘려!”
우드는 잠시 당황했지만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해도 기분 좋은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저렇게도 좋을까.’
힐데가르트는 상단주가 편지를 하늘 높이 치켜들며 울먹이는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아무래도 이 속도라면 물량을 맞추기 어려울 것 같네요.”
“후우, 후.”
라이그너 상단주는 뒤늦은 복식호흡으로 모자란 숨을 채웠다.
얼마 후 그가 현실로 돌아왔다.
“도대체 무슨 수를 쓰신 겁니까?”
“수 쓰긴요. 비앙카가 발명한 파우더가 그만큼 좋았던 거죠.”
“그 말을 그대로 믿을 만큼 제가 경험이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라이그너 상단주는 그녀를 하나뿐인 구세주 보듯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허브 파우더가 이렇게까지 잘 팔릴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를 표시하기엔 너무 일러요. 이제부터 시작인걸요?”
벌컥!
문이 열리더니 사람 하나가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상단주님! 이번엔 몬테를로의 약재상에서 사람이 찾아왔는데……!”
“뭐라고? 약재상?!”
“예. 왜 요전에 모임을 거절했던 슈페르트 약재상입니다. 파우더를 독점으로 판매하고 싶다는데요?!”
슈페르트 약재상이라면 최남단 몬테를로 영지에서 가장 큰 유통망을 가진 업자다.
라이그너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은 채 힐데가르트를 보았다.
“죄, 죄송합니다, 공녀님.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죄송하긴요. 일이 바쁘면 잘된 거죠. 저도 마침 비앙카에게 가보려 했어요.”
힐데가르트는 소파에서 폴짝 뛰며 일어났다.
“참. 그리고 자꾸 허브 파우더라 부르는데, 그거 아니에요. 그러면 애써 이름을 붙인 이유가 사라지잖아요?”
“죄송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그만.”
“설마 이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라이그너가 씩 웃었다.
“‘베이비 파우더’. 저에겐 잊지 못할 이름이 되었습니다.”
* * *
맨 처음 베이비 파우더의 효능을 알아본 사람은 바로 노바였다.
피부에 진정 효과가 있다기에 파우더를 준 게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뒤 깨끗해진, 그가 힐데가르트를 찾아왔다.
‘공녀님, 실례지만 이건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응? 아는 사람에게 받은 건데, 왜? 몸에 안 맞아?’
‘아뇨! 그 반대입니다. 너무 좋아서 여쭤보는 겁니다.’
활석과 허브를 곱게 빻아서 수십 번의 연구 끝에 만들었다는 파우더는 특유의 매끈매끈하고 보드라운 촉감이 일품이었다.
‘괜찮으시면 제가 살 수 있을까요?’
‘……노바. 그거 계속 필요할 거 같아?’
‘물론입니다. 곧 여름이잖아요! 기사나 인부들은 피부에 발진이 날 텐데, 그땐 이만한 게 없을 겁니다.’
파우더에는 아기 피부처럼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것뿐만 아니라, 수포나 발진이 났을 때 그걸 가라앉히는 효과도 있었다.
힐데가르트가 허브 파우더의 상품성을 꿰뚫어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시중에는 이미 허브 파우더로 불리는 상품이 많았다.
‘활석 파우더’라고 해보았자 사람들이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래서 힐데가르트는 보들보들한 피부 촉감에서 이름을 따와, 상품명을 ‘베이비 파우더’로 바꿨다.
결과는 말할 것도 없는 대박.
힐데가르트의 선구안은 빛을 발했다.
‘상단과 따로 계약을 맡길 잘했어.’
아카락시아 가문에서 투자금을 더 댄 것과는 별개로, 힐데가르트도 상단과 계약을 맺었다.
그녀가 책임지고 베이비 파우더를 제국 전역에 홍보하는 대신, 판매 수익의 일부를 나누어 받는 계약이었다.
‘이 정도라면 이동 게이트 사업에 쓸 투자금도 금방 모이겠는걸?’
노바의 말마따나 곧 여름이었다.
베이비 파우더의 효능을 깨닫자, 제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었다.
“공녀님!”
“안녕, 비앙카. 눈 밑이 새까맣네?”
“헉, 많이 심한가요? 어제 잠을 좀 못 자서…….”
비앙카가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그녀의 안색이 까맣고 푸르뎅뎅했다.
“안토니오 부상단주가 날 보면 엄청나게 원망하겠다 싶을 정도야.”
“그럴 리 없어요.”
비앙카가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그대로 상단을 그만두셨을 거예요. 그런데 원망이라뇨.”
“그 정도로 심해서 하는 소리야. 잠도 좀 자면서 해야지.”
“잠은 죽어서 자면 돼요!”
“……그런 말 누가 알려줬어?”
“저희 오빠가요.”
“안 돼. 그런 말 하지 마. 애들은 잠을 잘 자야 쑥쑥 큰다고. 그리고 커피도 마시지 마!”
힐데가르트는 비앙카의 어깨 너머로 커피잔이 네 개나 놓여 있는 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이러다간 네가 쓰러질 거야.”
“하지만…….”
“네가 쓰러지면 다 소용없는 일이야. 베이비 파우더를 만드는 조합법은 너만 알고 있잖아?”
“그, 그렇죠.”
현재 상단의 직원 중 베이비 파우더를 만드는 방법을 아는 건 비앙카뿐이다.
조합법은 일부러 다른 사람에게도 알려주지 말라고 했으니, 베가 상단에서 첩자가 들어온다 해도 얻어갈 수 있는 건 없었다.
“조금 더 신경 쓸게요. 쓰러지지 않게.”
“좋아. 혹시 이상한 사람은 없었지?”
“네! 어차피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상단에서만 지내고 있는걸요.”
비앙카가 끄덕였다.
“그보다 공녀님, 어떻게 하신 거예요?”
“응?”
“신문에 내신 광고 말이에요. 깜짝 놀랐어요, 황태손 전하와 아는 사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