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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61)화 (61/166)

60화

소파에 힘없이 주저앉다시피 한 안토니오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 시름에 잠겨 있던 그를 구한 건 일부러 자리를 비워주었던 아내였다.

“여보? 괜찮아요?”

“로지.”

“레이븐 상단주가 왔다 갔군요.”

담배 냄새와 식어버린 차 두 잔.

아내는 상황을 금세 파악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안토니오의 곁에 다가와 앉았다.

“우습지. 평생 몸담은 상단에서 이런 식으로 떠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무려 30년이다.

지주 상단의 일원으로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일원이었고 동시에 아내와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가장이었다.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건지 모르겠어. 면목이 없군…….”

“비앙카도 잘 이야기 해주면 알아들을 거예요. 비토도 그럴 거고요.”

“그렇겠지? 하지만 라이그너……. 그 녀석에겐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계속 앉아만 있으면 안 좋은 생각만 들 거예요. 어서 일어나요.”

로지는 제 남편의 괴로움을 알기에, 그를 다그치기보다는 조용히 토닥였다.

두 사람이 우울한 표정으로 저녁 식사를 준비해 갈 무렵이었다.

로지는 해가 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앙카가 늦네요. 더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와야 할 텐데…….”

“…….”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딸아이의 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저녁 식사 내내 안절부절못하며 창문 밖을 보던 안토니오는 결국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보?”

“잠시 나갔다 오겠소.”

“밖이 저렇게 어두운데요? 기다려봐요. 곧 오겠죠.”

“요 앞까지만 나가보는 거니 괜찮아. 그보다 당신은 어디 나가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아니면 혹시 모르니 옆집에…….”

쾅쾅쾅! 쾅쾅쾅!

그 순간 누군가 정신없이 문을 두드렸다.

로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문가를 보았다.

“누구요!”

안토니오는 재빨리 부지깽이를 집어 들었다.

그는 겁에 질린 로지에게 안쪽으로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그리곤 각오와 함께 문을 열었다.

“아빠!”

“……비앙카?”

그가 걱정하는 상황은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딸인 비앙카와 함께 처음 보는 소녀가 한 명 서 있었다.

“아빠! 제가 누굴 데려왔는지 보세요!”

“안녕하세요, 안토니오?”

하얀 은발이 아름다운 소녀였다.

* * *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아니에요. 문을 급하게 두드렸으니 놀라실 만도 하죠.”

힐데가르트는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공녀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그것도 비앙카와 단둘이…….”

조심스레 두 사람을 살피던 로지가 따뜻한 차 한 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혹시 제 딸이 무언가 잘못을 저질렀나요? 그런 거라면…….”

“아, 그런 게 아니고요. 안토니오…… 부상단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제게 말씀이십니까?”

힐데가르트는 서로를 바라보는 로지와 안토니오를 가만 보며 웃었다.

“비앙카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지주 상단을 그만두고 베가 상단으로 가신다면서요?”

“…….”

안토니오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표정이 사라졌다.

“비앙카. 너는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아빠! 하지만…….”

“괜찮아, 비앙카. 아버지께는 내가 잘 설명해 드릴게.”

“…….”

그 자리에 남아서 대화를 듣고 싶어 하는 비앙카를 말린 건, 다름 아닌 힐데가르트였다.

비앙카는 서운한 얼굴을 하던 것도 잠시, 입술을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볼게요, 부상단주님.”

비앙카가 방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힐데가르트는 용건을 꺼냈다.

“지주 상단을 그만두시는 건 상단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서인가요?”

“……그렇습니다.”

“정말인가요?”

그녀가 캐물었다.

“방금 브린힐드 지주 상단에서 오는 길이에요. 비앙카는 물론, 라이그너 상단주님도 당신이 돈 때문에 상단을 그만둘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라이그너가 절 과대평가한 겁니다.”

“물론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비앙카가 자기 아버지를 모르지는 않을걸요. 인생의 절반을 함께 보낸 친구도 그렇고요.”

“…….”

안토니오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3일 전, 그에게 브린힐드 상단에서 정리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던 레이븐 상단주는 돌연 태도를 바꿨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라서 달려온 라이그너와 비앙카가 나란히 펄펄 뛰었다.

도대체 왜 그만두냐는 물음이 이어졌지만, 안토니오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안토니오. 만일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비장의 수단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때도 상단을 그만둘 건가요?”

“그만두십시오.”

안토니오가 차갑게 말을 잘랐다.

“이미 마음을 굳힌 일입니다. 쉽게 결정한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

“30년 가까이 일한 곳입니다. 저라고 이런 식으로 상단을 그만두고 싶겠습니까?”

“그게 진짜 속마음이로군요?”

“…….”

안토니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이번엔 좀 다르게.”

힐데가르트는 조금 전 안토니오가 손에 들었던 부지깽이를 힐끔 보았다.

“베가 상단의 레이븐이 당신을 협박했나요?”

“…….”

“상단을 그만두지 않으면 가족을 해코지하겠다고?”

“……예. 그렇습니다.”

한숨이 안개처럼 퍼지며, 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오늘 오후에도 경고하고 갔습니다. 상단을 옮기지 않으면 사람을 시켜서 아이들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고.”

“비열한 사람이네요.”

“원래부터 그런 사람입니다.”

처음에는 돈이었다.

돈으로 안토니오를 회유하려 들었던 레이븐은, 그가 꿈쩍도 하지 않자 가족을 빌미로 협박하기 시작했다.

만일 베가 상단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가족이 험한 꼴을 당할 거라며.

말로만 하는 협박이 아니었다.

다음 날부터 아내인 로지와 비앙카가 입을 모아 말했다. 시장에서, 상단에서 돌아오는 길에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다며.

결국 안토니오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베가 상단으로 들어가는 대신, 제 가족의 안전을 약속받았습니다. 이제 원하는 답을 들어서 속이 후련하십니까?”

그가 힐데가르트를 노려보았다.

아카락시아 공작가의 막내딸이라니.

지주 상단이 쓰러져 가는 동안 공작가에서는 한 번도 연락이 오질 않았다.

상담을 청하는 편지에도 후견인에게 연락해 보시라며 완곡한 거절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생각으로 저에게 접근한 건지.

자신은 물론, 비앙카보다도 어린 소녀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원망이 솟았다.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너무 늦었습니다. 전 상단을 위해 아이들의 안전을 담보로 걸 순 없습니다. 제 마음은 이미…….”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네요.”

힐데가르트는 안토니오에게서 가시처럼 삐죽 튀어나온 원망을 느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토니오. 당신이 베가 상단으로 들어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으세요?”

그녀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과연 지주 상단의 파산으로 그칠까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이대로 베가 상단에 들어간다면, 앞으로도 레이븐 상단주는 당신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 가족들을 협박하겠죠.”

“……!”

“가족이 당신의 약점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았으니까요.”

이미 어느 정도 알아챈 거 같긴 하지만.

힐데가르트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잘됐어. 이걸 기회로 삼으면 되니까.’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 보지 못했는지, 안토니오는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자식의 안전을 위협받은 부모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언변이 유창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고민하던 힐데가르트는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사람한테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게 있어요. 그 선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한 번 넘으면 두 번째가 쉬워서고요.”

“…….”

“레이븐 상단주는 선을 넘었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넘을 겁니다.”

안토니오는 감히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힐데가르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가족은 그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이젠 레이븐 상단주가 알게 된 약점이기도 했다.

“괜찮아요. 아직 늦지 않았답니다.”

“……예?”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이 상황을 뒤집을 만한 비장의 수단이 있다고.”

“비장의 수단이라면……?”

그녀는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로지에게도 싱긋 웃었다.

“네. 비앙카 말이에요. 따님을 굉장히 똑똑하게 키우셨던데요?”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품 안에서 오렌지색 주머니를 꺼내놓았다.

그 안에는 노바에게 건네주었던 것과 똑같은 파우더가 담겨 있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셔야 해요. 이 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 * *

어둑어둑해진 밤.

베가 상단으로 돌아온 레이븐은 펜을 들었다.

[말씀하신 대로 진행 중이니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다음 달 중으로 완벽히 마무리해서…….]

그러나 레이븐은 마지막 문장을 다시 살핀 뒤 종이를 구겼다. 그러곤 새로운 종이에 다시금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음 달이면 원하시던 캄파넬 지방을 손에 넣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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