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공녀님 (60)화 (60/166)

59화

다음 날.

심란한 기분을 산책으로 가라앉힌 힐데가르트는 온실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하여튼 지주 상단의 파산을 막아야만 해.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도미닉 양조장은 영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크고 오래된 가게다.

베가 상단이 그만한 가게를 사들이는 데는 상당한 금액이 들었을 것이다.

반년 내내 생필품을 염가 판매하고 농장까지 사들인 베가 상단.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견제를 할까?’

단기간에 사람을 빼앗아 가는 걸로도 모자랐다는 건가?

뭣보다 그만한 자금력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힐데가르트가 수도에서 돌아다니고 신문을 꾸준히 읽는 동안, 베가 상단이라는 이름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익을 추구하는 상인치고는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

그리고 신경 쓰이는 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레이븐의 손목에 있던 까마귀 문신이었다.

‘그 문신, 어디선가 봤던 거 같은데…….’

그녀는 메모지 위에 까마귀 문신을 끼적대며 턱을 괴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고민해 봐도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아침부터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해?”

“키스케.”

그때였다. 그녀의 말을 따라 수련하고 있던 키스케가 다가왔다.

그가 투덜거리며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뭐 좀 알아볼 게 있어서. 그보다 온실엔 어쩐 일이야?”

“저택 앞에 기자가 돌아다니잖아. 한마디만 해달라는데, 나 때문에 소란이 일어나는 건 싫단 말이야.”

“그것 때문이구나.”

키스케가 아카락시아 공작령으로 내려왔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진 탓에, 요즘 저택 앞에는 신문 기자들이 죽치고 앉아 있는 일이 늘었다.

주기적으로 노바와 기사들이 쫓아내고는 있다지만 저택 너머로 키스케의 금발이 보일 때면 한마디만 해달라고 아우성쳤다.

“우리는 괜찮아. 네가 불편한 게 문제지.”

그러고 보니 황태손인 키스케가 머무는 데 아직 경비 수준이 느슨한 구석이 있다.

기사들 몇 명이 상주하고 있다지만 그거론 부족한 것 같다.

‘빨리 해결해야겠네.’

힐데가르트는 메모지에 ‘기사단’이라고 휘갈긴 다음 펜을 놓았다.

“참, 키스케. 마력은 순조롭게 모여? 해보니까 어때?”

“몰라. 나쁘진 않네.”

키스케는 며칠째 그녀가 알려준 대로 마력을 모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온실처럼 조용하고 식물이 많은 곳은 마력이 잘 모였는데, 조용히 명상한다는 게 깜빡 잠들어버릴 때도 많았다.

키스케가 그녀를 흘끔 보았다.

“내려오자마자 마법부터 가르쳐 주는 줄 알았는데, 이상한 걸 시키고 말이야.”

“밀가루가 있어야 빵을 만들지! 일단 네 몸속에 밀가루부터 모아 놔야 해. 안 그러면 마력 고갈로 탈진할걸?”

“이상한 비유 하지 마.”

키스케는 툴툴댔다. 그가 힐데가르트가 뒤적였던 도감을 팔랑팔랑 넘겼다.

“광물 도감? 넌 이런 것도 읽는 거야?”

“응. 근데 볼 건 없더라.”

그러던 키스케의 시선이 힐데가르트의 메모장에 닿았다.

“그건 뭐야?”

“이거? 그냥 낙서 겸…….”

“왜 랑케르트 가문의 심벌마크를 그려놨어?”

“…….”

힐데가르트는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

“……맞아, 랑케르트.”

기억났다.

이 문신을 누가 새기고 있었는지.

‘욕보이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아카락시아 가문에게는 의석이 버겁다는 의미입니다.’

마우제네 랑케르트.

공회 결석을 빌미로 아카락시아 가문의 의석 반납을 건의했던 그 사람.

“그래, 랑케르트……!”

힐데가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짝 놀란 키스케가 움찔거리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키스케! 이거 진짜 랑케르트의 문신이 맞지? 내 기억이 잘못된 거 아니지? 그렇지?”

“왜 자기가 말해놓고 나한테 되물어? 그리고 이미 네가 정답을 적어 놨잖아.”

키스케는 힐데가르트가 메모지에 그려둔 심벌마크와 ‘기사단’이라는 단어를 가리켰다.

“본 적 없어? 랑케르트 공작가 출신 기사들이 이런 문신을 새기고 있는데.”

“……!”

힐데가르트는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렸다.

가문 소속 기사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본인의 소속을 증명한다.

일반적인 방식은 검집이나 망토, 허리에 찬 버클에 소속 가문의 문양을 새겨 넣는 경우다.

하지만 예외의 경우가 있는데, 바로 몸에 직접 식별 문신을 새겨 넣는 것이다. 지울 수 없는 충성을 맹세하면서.

“뭣하면 노바한테 물어보든가.”

“아냐……. 아냐! 네 말이 맞아!”

대체 어떤 까닭으로 랑케르트가 이 일에 얽혀 있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해진다.

‘그만한 자금력이 어디서 오나 했는데, 랑케르트 공작가와 얽힌 일이라면 가능하지!’

물론 명확한 증거가 없는 이상, 모든 건 가정에 불과했다.

하지만 힐데가르트의 직감은 그 문신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고마워, 키스케.”

“너 방금, 이 갈지 않았어?”

“무슨 소리야. 고맙다면서 이를 가는 사람이 어딨어. 네가 잘못 들은 거야.”

“두 분, 여기 계셨군요?”

힐데가르트가 시치미를 뗀 것과 노바가 온실로 들어선 건 거의 동시였다.

“슬슬 점심 식사 시간입니다.”

“아, 고마워 노…… 바?”

“너 피부가 왜 그래?”

힐데가르트와 키스케의 눈이 동시에 크게 떠졌다.

노바의 피부가 눈에 보일 정도로 울긋불긋하게 일어나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보기보다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기는, 피부가 다 일어났잖아.”

“아침 식사 때 먹은 파이에 살구잼이 들어가 있었나 봅니다. 피부가 엄청나게 간지러워요.”

“살구잼을 못 먹는구나. 미안해, 내가 좀 더 챙기라고 할걸.”

“아닙니다.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노바가 손을 내저으며 만류했다.

“가끔 꽃가루 때문에 이렇게 될 때도 있거든요. 심한 사람은 천식이 생기기도 한다는데, 전 그 정도는 아니라서.”

“그래도……. 어떡하지, 우리 가문엔 따로 주치의가 없는데.”

기사단뿐만 아니라 주치의도 데려오는 게 좋겠다.

그렇게 생각한 힐데가르트는 고민하다가 테이블 위에서 회색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일단 이거라도 써볼래?”

“이게 뭔가요?”

“분말 연고 비슷한 거야.”

힐데가르트는 비앙카가 만들었다는 허브 파우더를 노바에게 내밀었다.

노바는 주머니를 가만 내려다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까지 챙겨주실 필요 없는데……. 감사합니다.”

“…….”

“…….”

“왜 두 분 다 그런 측은한 눈으로 보시는 건가요. 그렇게 꼴이 이상한가요?”

노바가 소리 나게 웃으며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자, 두 분 모두 어서 식사하러 가시죠. 전하께서도요. 어서 식사하셔야 저도 쉴 수 있답니다.”

“밀지 마. 내 발로 간다고.”

키스케는 뚱한 얼굴로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로부터 두 시간 뒤, 식사를 끝낸 힐데가르트에게 노바가 찾아왔다.

“공녀님, 실례지만 이건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몰라보게 멀쩡해진 피부 상태로.

* * *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안토니오가 분개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그렇게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거참, 종알종알 말이 많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당신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제겐 중요한 일입니다!”

안토니오가 바랐던 끝마무리는 이런 게 아니었다.

30년 넘게 몸담은 상단이다.

그만두게 된 이상, 라이그너에게도 비앙카에게도 직접 그만두게 되었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기다려주면 뭐가 달라지는데?”

“뭐라고요?”

지팡이를 쥔 채 고개를 까딱이던 레이븐의 눈에 언짢은 빛이 스쳤다.

“어차피 늦든 빠르든 베가 상단에서 일하기로 한 건 당신 선택이야. 좀 일찍 말했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하지만…….”

“이봐, 안토니오. 나한테 약속 운운하면 안 되지. 내가 ‘진짜’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침묵이 일었다. 레이븐은 하, 웃음을 터뜨리며 목을 풀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안토니오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이겼습니다. 전부 당신이 원하던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상단의 규모도, 자금력도 베가 상단이 훨씬 우위에 놓여 있다. 대체 여기서 뭘 더 원한단 말인가?

“웃기는 소리. 이봐, 안토니오. 내 밑에서 일하기 전에 똑똑히 알아둬.”

레이븐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더니 그의 어깨를 퍽 찔렀다.

“당신이나 나처럼, 태어나길 평민으로 태어나서 고만고만하게 사는 사람은 다 똑같은 걸 먹으면서 적당히 살다가 죽어.”

새파란 안광이 소름 끼치도록 빛났다. 레이븐의 눈은 날카로웠다.

“날 때부터 때깔이 다른 귀족처럼 살고 싶으면 죽을 만큼 노력해도 모자란단 말이야.”

“그래서 원하는 대로……!”

퍽!

지팡이를 치켜든 레이븐이 사정없이 그의 어깨를 내려쳤다.

“컥……!”

“내 손가락 보여? 응? 이 휑한 열 손가락 보이냔 말이야.”

무릎을 꿇은 안토니오는 어깨를 붙잡은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손가락에 반지 하나 끼고 싶으면, 당신이나 나 같은 고만고만한 인간들은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고.”

“그러고도 상인이오?”

안토니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상인의 자긍심은…… 가치를 만드는…….”

“가치는 얼어 죽을. 그래 봐야 물건 팔아서 남의 돈 몇 푼 만지는 인간들끼리 무슨 자긍심 타령이야?”

심드렁한 눈으로 안토니오를 내려다보던 레이븐의 눈매가 다시 둥글게 휘었다.

“알아들었으면 브린힐드 상단 쪽은 깔끔하게 정리해. 다음 달부터 도미닉 양조장으로 출근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

“계산 잘하는 사람이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믿지. 귀여운 딸이 다치는 것보다는 낫잖아?”

“비앙카에게는 손도 댈 생각 하지 마시오!”

“나도 그러고 싶다고. 그러니까 당신이 빨리 상단을 때려치워.”

레이븐은 담배 파이프를 문 채 히죽거렸다.

“안 그러면 소중한 가족이 무서운 마차 사고를 당할 거야.”

“…….”

“이건 협박이 아니라 예언이니, 넘겨 듣지 않는 게 좋을걸?”

쾅!

안토니오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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