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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58)화 (58/166)

57화

“여기는 제 연구실 겸 향수 공방이에요! 거기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응. 고마워.”

힐데가르트는 비앙카를 따라 공방으로 들어섰다.

비앙카의 비밀 기지라는 공방에는 수많은 향수가 진열되어 있었다.

“화장품이랑 향수가 엄청나게 많네? 오랫동안 연구했나 봐?”

“네. 제 어머니가 극단 배우셨거든요!”

비앙카는 자랑하듯 진열해둔 향수를 꺼내주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서 화장하고 장난치다가 이쪽에 관심을 두게 됐어요.”

향을 맡아본 힐데가르트는 깜짝 놀랐다.

코끝이 싸해지면서 시원한 바다 같은 향이 은은했다.

“실력이 좋잖아? 정말 혼자서 만든 거야?”

“헤헤, 네! 칭찬 감사합니다.”

힐데가르트의 칭찬에 비앙카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중엔 꼭 상단을 통해서 제 향수를 팔아보려고요. 아직은 힘들겠지만.”

“힘들기는. 이 정도면 얼마든지…….”

그렇게 말하던 힐데가르트는 띵하고 울리는 이마를 붙잡은 채 말했다.

“미안, 창문 좀 열어줄 수 있어?”

“앗! 금방 열어드릴게요, 잠시만요!”

비앙카는 창문을 열고 한바탕 환기를 시킨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고마워. 그런데 온종일 여기 있으면 머리 아프지 않아?”

“가끔 그렇긴 해요. 그래도 자주 바람을 쐬면 괜찮아져요.”

“상단 일은 어떻게 배우게 된 거야?”

“상단 일이요? 말하자면 좀 긴데…….”

비앙카는 헤헤 웃으며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평생 상단을 키우는 일에만 집중하던 아버지가 배우였던 어머니에게 반했던 이야기.

그 두 사람이 비앙카를 낳을 때, 라이그너 상단주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던 이야기 등.

“아버지가 상단 일을 핑계로 매일매일 극장에 오셔서 같은 연극을 백 번도 넘게 보셨대요.”

“백 번도 넘게? 대사를 다 외우셨겠다.”

“맞아요. 가끔 라이그너 아저씨가 그 이야기를 꺼내세요. 자기가 안토니오를 극장에 보내지 않았으면 넌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면서.”

그렇게 말한 비앙카의 표정은 금방 어두워졌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 갔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은 끝까지 상단 편에 남아 있기로 했어요. 아버지도 저도 그렇게 할 거예요.”

“……정말 그래도 되겠어?”

“네!”

비앙카의 대답은 단호했다.

“상인의 자긍심은 가치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는걸요. 전 상단 일을 배워가는 게 정말 좋아요!”

“…….”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무지개처럼 빛나는 소녀였다.

힐데가르트는 그녀를 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이곳에 와서 조금 놀랐어. 상단의 상황이 안 좋다고만 들었는데 정말 사람이 떠났다는 게 느껴졌거든.”

간판에 낀 거미줄, 쥐가 파먹은 것처럼 삭아버린 밧줄, 텅 빈 창고.

소름 돋게 조용한 상단 분위기만 봐도 알겠다.

브린힐드 지주 상단은 지금 간신히 명맥만 잇고 있다는 걸.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는데.”

비앙카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머물렀다.

그녀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베가 상단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최소한 공작령에서만큼은 무시당할 일이 없었거든요.”

“그럼 다른 지방에서는 무시당하고 있다는 말이야?”

“그게…… 하하, 아하하. 아무래도 다른 공작령에 비하면, 뭐가 없잖아요?”

비앙카는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하려 했지만, 힐데가르트의 표정은 이미 굳어버린 뒤였다.

“아, 아가씨나 공작가를 탓하려는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어쩔 수 없는 흐름이랄까…….”

“…….”

“죄, 죄송합니다. 제가 말실수를…….”

“아냐. 비앙카 말이 맞아.”

힐데가르트 살아 있었던 80년 전에도 지주 상단은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보석 광산이 많았기에 큰 문제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지주 상단의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졌으리라 예측하지 못한 건 그녀의 실수였다.

막연히 상단을 설득시켜서 이동 게이트 사업을 벌일 생각만 했지.

‘……안 좋은 생각 말자. 이걸 기회로 삼는 거야.’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다.

만일 이 일을 기회 삼아 상단주의 신뢰를 얻는다면, 이동 게이트 사업을 한결 수월하게 풀어나갈 수도 있다.

힐데가르트는 제 뺨을 짝 소리 나게 쳤다. 그러곤 그녀가 발갛게 부어오른 뺨으로 비앙카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 지주 상단이 어려워진 건 우리의 책임도 있어.”

“네? 그런 말씀 마세요. 아가씨 책임이 아닌걸요?”

놀란 비앙카는 마구 고개를 젓더니,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떠난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어떻게든 해봐야죠. 저도 아버지도 열심히 연구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연구? 무슨 연구인데?”

“아, 실은…….”

비앙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서랍장에서 손가락만 한 주머니 몇 개를 가지고 왔다.

오색 주머니 안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돌조각이었다.

“이거요. 활석이라는 거예요.”

“활석?”

“네. 비누석이라고도 불리는 건데 한번 만져보시겠어요?”

비앙카가 건넨 돌조각은 감촉이 매끄럽고 부드러웠다. 테이블에 긁어보자 그대로 자국을 남길 정도로 무른 광물이었다.

“실은 저희 상단에서 채굴을 맡은 캄파넬 지방 채석장에 이 활석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캄파넬?”

힐데가르트의 몸이 잘게 떨렸다.

“네! 혹시 모르세요? 여기서 조금 떨어진, 서쪽의 랑케르트 영지와 맞닿아 있는 지방이에요.”

“아냐. 알고 있어.”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8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곳은 지옥의 땅이라 불렸다.

수많은 광신도가 스스로 마성신의 제물로 죽기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며 모여든 장소.

검은 별 교단의 본거지. 지옥의 캄파넬.

그곳은 힐데가르트가 마성신을 봉인하며 죽은 땅이기도 했다.

‘캄파넬이라.’

힐데가르트는 새삼 그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았다.

그녀의 기억 속 캄파넬은 피와 죽음이 가득한 지역이었건만.

‘거기에 채석장이 생겼구나. 내가 죽은 뒤에 개발된 건가?’

비앙카는 힐데가르트의 동요를 읽지 못했다.

그녀가 다른 주머니를 열어서 우르르 쏟아내자, 분필과 초크가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활석은 원래는 석고 대신 쓰거나 이렇게 분필로 만들어 쓰는 거예요.”

“……이건 뭐야? 설마 직접 만든 거야?”

“네!”

“잘 만들었네.”

힐데가르트는 애써 다른 곳으로 주의를 돌렸다.

“왜 하필 활석을 연구하는 거야?”

“보석이나 값어치 있는 광물은 거의 다 캐냈지만, 아직 이 활석은 많이 매장되어 있거든요.”

“그거 마지막까지 캐낼 가치가 없어서 남겨뒀다는 뜻 아니야?”

“아하하하. 그래도 연구를 잘만 하면, 바로 캐내서 상품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요. 효율 면에서는 제일이에요.”

“그럼 이건 뭐야? 도자기 인형? 얼룩말인가?”

“코끼리인데요…….”

활석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는 말마따나, 비앙카는 활석으로 만든 그릇이나 도자기 인형 등을 내놓았다.

그중에는 곱게 빻아서 가루로 만든 것도 있었다.

“이건 뭐야? 엄청 보들보들하네?”

“피부에 좋다는 허브 가루와 섞은 거예요. 촉감이 좋죠? 피부를 진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어요!”

“이름이 뭔데?”

“이름은 없는데, 괜찮으시면 아가씨가 써보시고 지어주세요.”

그 후로도 비앙카에게서는 끊임없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대부분 그렇게 쓸모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비앙카는 열정적으로 말했지만, 힐데는 복잡한 얼굴로 활석 가루가 든 주머니를 주무를 뿐이었다.

‘캄파넬.’

자꾸만 그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 * *

오후를 달구던 태양이 서쪽으로 가라앉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라이그너와 비앙카가 두 사람을 배웅하며 말했다.

“오늘은 상단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야말로 바쁘셨을 텐데 이렇게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이그너가 마차에 타려는 미하일을 간절히 바라보았다.

“조심히 돌아가시고, 황실에서 답이 오면 꼭 연락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해서…….”

마차 한 대가 큰소리를 내며 멈춰선 건 그때였다.

“어랍쇼? 이게 누구야.”

마차에서 내린 남자는 반갑다는 듯 아는 체를 하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중년인의 노란 눈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라이그너 상단주에 비앙카까지 있네?”

“……레이븐 상단주.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남자는 수도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지팡이를 툭툭 튕겼다.

“베가 상단이 한가한 모양이지?”

“쯧쯧, 라이그너. 자넨 말을 곱게 해야지. 아무리 한가해도 브린힐드 상단만 하겠어?”

키득키득 웃는 남자는 광대처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인사했다.

“용건이 없으면 당장 떠나게.”

“그렇게 딱딱하게 굴면 내가 섭섭해. 손님 대접도 사람을 봐가면서 하나?”

“돌아가게!”

그러나 남자는 주눅 들기는커녕, 미하일과 힐데가르트가 타려던 마차의 문양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오호? 설마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오신 분들인가? 이쪽이 그 소공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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