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설마, 아직도 직원을 빼가고 있나요?”
“예. 지금 상단에 남아 있는 직원은 딱 열 명뿐입니다.”
새로 직원을 뽑으려 해도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데다, 베가 상단에서 보낸 첩자일지도 몰라서 쉽지 않았다.
상단주는 울상을 했다.
“당장은 있는 직원이라도 지켜야 하는데, 재정 상황이 좋지 못해서…….”
“상황은 알겠습니다. 철광석을 말씀하신 이유를 알겠네요.”
철광석의 채굴과 납품, 판매는 황실에서 허가를 받은 것이라 베가 상단의 위협이 미칠 여지가 적다.
“재정 상태는 어떻죠? 많이 심각한가요?”
“베가 상단이 나타나기 전에도 좋지 못했지만, 이젠 파산을 걱정해야 할 정도입니다.”
파산.
힐데가르트는 그 단어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
‘큰일이다.’
이건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지주 상단의 파산은 그리 만만히 볼 문제가 아니다.
파산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가주 반지를 빼앗아 갔던 솔베르 백작 부인 때보다 심각했다.
지주 상단은 지역색이 강하다.
아카락시아 영지에서 나는 물건을, 아카락시아 영지민이 판매하고 그 수익금 일부도 아카락시아를 위해 쓴다.
여름철 태풍이나 겨울철 산불 같은 재해를 대비해 수익금 일부를 피해복구비로 떼어 놓기도 한다.
잘만 운영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게 지주 상단이다.
지주 상단의 투자금 일부를 영주가 대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상단이 망한다면?
투자금을 몽땅 날리는 건 기본이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사업을 통해서 키워둔 정보력도 잃게 된다.
상단에서 물건을 받아 판매하던 영지민도 함께 망한다.
구심점이 되어줄 상단이 없으니, 여름철에 큰 태풍이라도 일어났다간 피해 복구에 엄청난 시일이 걸릴 것이다.
생필품조차 사고팔기 힘들어진 영지민의 분노가 영주에게 향하는 건 뻔한 일이다.
‘절대 막아야 해!’
심각한 문제라는 걸 간파한 그녀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상단은 어떤 상황이죠?”
“지금처럼 생필품을 유통하며 버티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아카락시아 영지의 주 수입원은 광산업과 임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철광석 수입 외에는 큰 기대를 하기 힘들다.
철광석도 아주 적은 양만 허가받아 거래할 수 있니, 수익이 나질 않았다.
“무지개의 아카락시아라고 불렸던 것도 이제는 옛말입니다. 보석이나 원석 채굴량이 전무하다 시피 하니까요.”
광산 열 개를 랑케르트에게 넘겼고, 남은 재산도 경매에 넘어가며 뿔뿔이 흩어졌으니.
“산림이 있기는 하지만, 무분별하게 벌목할 수도 없습니다.”
산에서 나무를 닥치는 대로 베어냈다가는 산사태가 일어날 터.
아카락시아는 해마다 일정량의 나무만을 벤다.
영지의 대부분이 거대한 삼림이라 대규모 벌목장을 갖춘 랑케르트와는 그 궤를 달리했다.
즉.
“아카락시아산 보석처럼 경쟁력 높고 수익성도 높은 상품이 없다는 게 문제네요.”
“그, 그렇습니다.”
“흐으으음.”
라이그너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어린 공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제 막 의자에 앉아 10분 남짓 사정을 설명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중 가장 어린 공녀가 제일 먼저 문제의 근본을 파악한 것이다.
‘재리(財利) 감각이 남다른 분이시구나!’
영민한 소녀라며 놀라던 것도 잠시, 그가 주먹을 쥔 채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제가 열여섯 살일 때부터 서른 해 넘게 지켜온 상단입니다. 이대로, 이렇게 무너지는 꼴은 볼 수 없습니다.”
“상단주님, 이러지 마세요.”
미하일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만류했다.
“제가 어려운 부탁을 드리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황실에 연락을 넣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사정은 알겠습니다. 우선 소량이라도 늘릴 수 있을지 연락을 넣어볼게요.”
“아……! 감사합니다. 맙소사, 정말 감사합니다. 소공작님!”
“아니에요. 하지만 이걸로 해결될 문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미하일의 눈이 힐데가르트에게 향한 건 그때였다.
여동생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거 같았다.
때마침 그녀가 말했다.
“라이그너 상단주님, 괜찮으시면 제가 상단에 직접 방문해도 괜찮을까요?”
“직접 말씀이십니까?”
“네. 저희가 직접 가서 돌아보는 게 제일 확실할 것 같아서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미하일에게 물었다.
“오빠, 괜찮지?”
“그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괜찮으실까요, 상단주님?”
“물론이지요.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라이그너 상단주는 오랫동안 끙끙 앓아온 시간이 길었는지, 크게 감격하며 미하일의 손을 잡았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아닙니다. 아직 감사를 받기엔 너무 이른걸요.”
미하일의 말이 맞다. 아직은 너무 이른 감사다.
상단주가 밖에서 기다리겠다며 방을 나가자, 힐데가르트가 말했다.
“오빠. 이 일은 절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야. 알지?”
미하일이 그녀의 말에 동의하듯 끄덕였다.
“일단 상단을 살펴보고, 필요하다면 투자금을 대는 게 좋겠네.”
“괜찮겠어?”
“응. 어떻게든 해봐야지. 그게 소공작인 내가 할 일인걸.”
지주 상단이 망하는 건 아카락시아 공작가에게 커다란 악재나 다름없었다.
미하일은 물론, 힐데가르트 또한 이동 게이트 사업을 시작도 안 했는데 상단이 망하는 걸 두고만 볼 생각은 없었다.
눈빛을 교환한 남매는 곧장 마차에 올랐다.
15분 뒤, 상단으로 향하는 마차가 빠르게 언덕을 내려갔다.
* * *
‘이거 보통 일이 아니네.’
마차에서 내린 힐데가르트는 상단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이 심상찮다는 걸 깨달았다.
‘간판만 봐도 알겠다.’
그녀가 간판을 빤히 올려다보자, 뭘 구경하나 싶어 시선을 옮긴 라이그너 상단주가 헉 소리를 냈다.
그가 부랴부랴 변명했다.
“요, 요즘 직원이 줄어들다 보니 관리가 덜 된 부분이 있습니다.”
과연 관리가 부족한 게 거미줄 쳐진 간판뿐일까.
힐데가르트는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했다.
예상은 보란 듯이 맞아떨어졌다.
지주 상단은 넓은 부지를 자랑했다. 사무실 말고도 연구실과 상품 전시실이 있었고 창고도 지상과 지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인기척이 없으면 자연히 건물에서 한기가 몰아치게 마련인데, 이곳이 딱 그랬다.
‘어째 으스스한 게 한기까지 드는데…….’
비슷한 느낌을 받은 건 미하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의 눈이 잘게 떨렸다.
라이그너 상단주는 딱딱해질 뻔한 분위기를 막기 위해 애써 웃으며 말을 걸었다.
“공녀님께서 방문하겠다며 나서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힐데가 요즘 들어서 사업에 관심이 있어서요. 상단주님과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고 한 적도 있어요.”
“오호? 정말이십니까? 어떤 이야기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게…….”
힐데가르트는 잠시 하려던 말을 관두고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힐데, 괜찮아. 부끄러워할 거 없어.”
“하하하, 그럼 나중에 꼭 말씀해 주시지요!”
그게 아니라고, 이 바보들아!
힐데가르트는 욕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지금 이 상태라면 이동 게이트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는커녕, 상단을 재건하는 데 매달려야 할 정도였다.
이동 게이트 사업 때 필요한 마석 거래는 꿈도 못 꿀 처지였다.
‘으으……. 일이 좀 잘 풀리나 했더니.’
하긴, 상식적으로는 아카락시아 본가가 그 꼴이니 지주 상단이 멀쩡할 리 없다.
공작가가 정상이었다면 지주 상단이 이렇게 내몰리지 않게 중간에서 손을 썼겠지.
“아저씨!”
힐데가르트가 한숨을 쉬고 있을 때였다.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맞은편에서 달려왔다.
“비앙카.”
“앗, 죄송합니다. 손님이 계셨군요?”
소녀가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이자, 적갈색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쪽은?”
“제 대녀인 비앙카입니다.”
“대녀요?”
대녀란 피치 못 할 사정으로 아이가 부모를 잃었을 때, 양육을 책임지기로 맹세한 자식이었다.
“예. 비앙카는 제 친구이자 부상단주를 맡은 안토니오의 딸인데 상단에서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라이그너 상단주는 뿌듯한 얼굴로 이 녀석이 태어나는 날 직접 산파를 마차에 태워 데려왔었다며 자랑했다.
“비앙카. 인사드려라. 이쪽은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오신 분들이다.”
“역시! 저쪽에서 오는데 예쁜 은발이신 분이 오셔서 금방 알아봤어요!”
비앙카는 에이프런 스커트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며 무릎을 굽혔다.
“브린힐드 상단의 비앙카라고 합니다. 상단에서 향수와 화장품을 만들고 있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미하일 아카락시아입니다.”
“힐데가르트 아카락시아라고 해요.”
“비앙카, 얘야. 안토니오는?”
“아버진 저쪽에서 오고 계세요! 곧 회의 시간인데 가보지 않으셔도 괜찮으세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회중시계를 확인한 라이그너 상단주가 미하일에게 눈짓했다.
“소공작님, 괜찮으면 함께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제가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소공작님께서 직접 오셨다는 걸 알면 직원들이 크게 좋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미하일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힐데는 어떻게 할래? 오빠랑 같이 갈까?”
“나는…….”
힐데는 잠시 비앙카를 곁눈질했다.
“아니, 난 괜찮아. 여기서 비앙카랑 상단을 돌아보면서 기다리고 있을래.”
아무래도 회의장 밖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더 많을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