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아카락시아 공작저 사용인들은 오랜만에 돌아온 작은 주인들을 활기차게 맞이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네? 황태손 전하시라고요?”
정원사인 네리아는 하마터면 꽃병을 떨어뜨릴 뻔했다.
사용인들은 저택에 귀한 손님이 머물게 되었다는 말에 어쩔 줄 몰랐다.
그렇게 소란이 파문처럼 퍼졌다.
“아, 아가씨! 제 요리가 황태손 전하의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맞을걸? 딱히 까다롭게 가려 먹는 거 없다고 그랬어.”
“아, 아, 아가씨! 황태손 전하께선 고르키파크 장미를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지금이라도 부르트 장미를 구해서 심는 게 어떨까요!”
“싫어. 난 고르키파크 장미가 더 좋으니까 그대로 내버려 둬. 싫으면 직접 말하라고 해.”
“아, 아, 아, 아가씨! 전하의 침구는 역시 최고급으로 준비해야…….”
“누가 빵에 금가루라도 발라 달라고 했어? 그냥 평소처럼 대해.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 된다니까!”
하루가 멀다고 사용인마다 저를 찾아오니 힐데가르트가 화를 낸 건 당연한 일이다.
힐데가르트로서는 왜 저렇게 야단법석을 떨어대나 싶었다.
아이를 키울 때 유난을 떨며 키우면 애까지 유난스럽게 자라는 법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담담하게 대하는 게 어른이 할 일이다.
“딱히 패악질을 부리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유난이야?”
키스케가 이 상황을 모를 리 만무했다.
그는 소란을 애써 못 본 척하려 했다.
하지만 황실 예법을 모르는 주방장이 무릎을 꿇고 식전 빵에 금가루를 발라야 하냐고 물었을 때는 그조차도 당황하고 말았다.
“너무 어렵게 대하지 말아주었으면 좋겠어. 쉬러 온 사람으로 여겨줘.”
“하지만, 아니, 하오나…….”
“난 대접받으려고 내려온 사람이 아니야. 식사든 침구든 힐데가르트와 비슷한 수준으로 챙겨주면 충분해.”
이렇게 온 이목이 키스케에게 쏠린 덕분에 자유로워진 사람은 노바였다.
노바는 특유의 곰살맞은 모습으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는 벌써 사용인 몇 명과 친해진 상태였다.
‘붙임성이 굉장히 좋네.’
여러모로 기사답지 않은 이였다.
힐데가르트는 막시밀리언의 부탁대로 키스케를 별스럽게 대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다.
“힐데, 전하의 잠자리는 따로 마련해 드리는 게 좋겠어. 별채를 치우자.”
“하지만……!”
“네가 전하를 허물없이 대하는 건 좋아. 하지만 다른 사용인들도 생각해야지. 저택은 공동생활이잖아?”
“으음.”
그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힐데가르트가 신음을 흘리자 미하일이 쐐기를 박았다.
“아랫사람들이 생활하기 불편해질 거야.”
일리 있는 말이었다.
누구든 처음 보는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생활하게 되면 신경 쓰이는 법이다.
그런데 상대가 황태손이라니.
사용인에게는 날벼락 겸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시중을 드는 일로 잡다한 소란이 일어날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미안. 내 생각이 짧았어.”
“괜찮아. 그런 걸로 사과할 필요 없어.”
미하일이 쪼그려 앉아 그녀의 말랑한 뺨을 꼬집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전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신경 쓰지 말고 푹 쉬어.”
“응.”
힐데가르트는 날이 갈수록 미하일의 저 웃음에 약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키스케는 저택 동편에 자리 잡은 별채를 혼자 쓰게 되었다.
별채는 레온하르트의 개인 서재가 있었던 곳으로, 옛 주인의 취향에 맞게 특유의 고즈넉하면서도 깔끔한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며칠 뒤 키스케는 힐데가르트와 함께 그곳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질 좋은 목재가 풍기는 오래된 나무 냄새. 세월을 머금은 아늑하고 부드러운 공간.
서재는 그대로 남겨두고 다른 곳은 키스케가 쓰기 편하도록 내부를 손본 티가 났다.
막시밀리언은 딱히 키스케에게 언제까지 공부를 마치라고 하거나, 시간적인 제한을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가문에서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신세를 질 수는 없으니까.
‘적당히 공부하고……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면 되겠지. 오래 머물면 민폐니까.’
길어봤자 1년이지 않을까. 키스케는 그렇게 생각했다.
1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다.
그러니 어쩌면 떠날 때쯤엔 이 근사한 별채에 정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에헴! 이 별채로 말할 것 같으면! 아카락시아 공작가에서 가장 유능하고 현명한 레온하르트 공작 각하께서 쓰시던 곳이야!”
“그래?”
“아가씨! 황태손 전하의 침실에 쓸 향초를 준비해 봤는데……. 헉, 죄송합니다! 전하를 뵙습니다!”
“아무거나 쓰라니까 그러네.”
“향초는 안 쓰니까 괜찮아.”
그렇게 두 사람은 산책 겸 정원과 온실까지 둘러보았다.
새로운 일상. 색다른 환경.
조금 이른 봄날이 시작된 아카락시아 공작령은 느긋하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며칠 뒤.
지주 상단에서 화급을 다투는 편지가 도착하며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 * *
“철광석을 팔게 해주십시오.”
힐데가르트는 하마터면 마시던 차를 흘릴 뻔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청이야?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라이그너 상단주님.”
저택으로 찾아온 손님은 응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고개를 숙이며 애원했다.
“황실에 요청하여 철광석의 채굴량을 조금만 더 늘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들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브린힐드 지주 상단의 총책임자, 라이그너였다.
그는 공작령으로 내려온 미하일이 편지를 쓰기도 전에 먼저 연락을 취해왔다.
“우선 진정하세요. 너무 흥분하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제 마음이 너무 급해서 그만……. 후우.”
라이그너 상단주는 한숨을 쉬며 삐져나온 밀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미하일은 예의상 차를 권했지만, 그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상단에 무슨 일이 있나요?”
“사정이 있어서 직원들 월급을 한꺼번에 올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장 상단의 재정으로는 어려운 일이라…….”
“철광석을 좀 더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시려고요?”
“예.”
다시 들어봐도 터무니없는 요구다. 힐데가르트가 차를 홀짝였다.
미하일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철광석은 외부에 판매하는 걸 엄하게 제한하는 품목이에요. 채굴을 맡고 있으니 어렵단 걸 제일 잘 알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라이그너 상단주는 앵무새처럼 같은 부탁을 반복했다.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가만히 듣고 있으니 심상치 않은 이유가 튀어나왔다.
“이대로라면 직원을 전부 빼앗길 판입니다. 상단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말입니다. 이젠 돈으로라도 직원을 붙잡지 않으면…….”
“직원을 빼앗겨요? 어디에요?”
힐데가르트의 물음에 상단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반년 전 나타난 베가 상단입니다.”
베가 상단?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드려야 할지…….”
라이그너 상단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반년 전 일입니다. 오랫동안 일한 직원 하나가 갑자기 상단을 그만두더군요.”
그만둔 직원을 다시 보게 된 건 일주일 뒤였다.
직원은 시장에 자그마한 천막 세 개를 세워 놓고 장사 중이었다. 브린힐드가 아닌 베가 상단의 아래에서.
그때까지만 라이그너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오랫동안 일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을 그만두고 나가버렸지요.”
그만두는 사람이 생길수록 시장에 세운 천막 숫자도 늘어만 갔다.
“그때 알았습니다. 베가 상단이 저희 쪽 직원을 돈으로 회유했다는 걸.”
“스카우트를 해간 거군요.”
“예. 하지만 거기서 그쳤다면 이렇게 공작가까지 찾아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인력을 빼간 베가 상단은 점차 도를 넘기 시작했다.
빼낸 직원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모든 물건을 브린힐드 상단보다 싸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새로 연 포목점 앞에서 비단 실크를 반값에 팔았고, 그만둔 직원의 인맥을 이용해 거래처를 빼돌렸다.
“그러다 늦가을에 일이 터진 겁니다.”
브린힐드 상단은 매년 가을마다 막대한 양의 호밀을 사들인다. 가축의 사료로 만들어서 판매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베가 상단이 호밀을 판매하던 농장을 사들이더니, 납품일 직전에 이전 농장주와 맺은 거래가 무효라며 취소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부탁하고 설득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급하게 대체할 곡물을 찾아봐도 이미 베가 상단에서 먼저 사들인 뒤였고요.”
가축이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던 축사 주인들은 오랫동안 이어온 지주 상단과의 거래를 끊고 베가 상단에서 물건을 받았다.
거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며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요구한 건 물론이었다.
결국 엄청난 피해가 났다.
“세상에…….”
상인에게도 상도덕이라는 게 있다.
베가 상단은 명백하게 선을 넘었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베가 상단이 왜 이렇게까지 구냐는 점입니다.”
베가 상단은 마치 이익을 내는 것보다 지주 상단을 무너뜨리는 게 목적인 것처럼 굴었다.
아무리 경쟁 상대라 해도 제 살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출혈 경쟁을 하지 않는다.
잠깐이야 기선제압을 하려 들 수 있지만, 이미 반년 가까이 이어진 압박이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상단이 빼간 인력만 해도 스무 명 가까이 됩니다.”
“스무 명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