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순간 이동 마법이 얼마나 유용할지, 마석으로 만든 게이트가 세워지면 제국이 어떻게 변할지.
그걸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명한 뒤, 진지하게 말했다.
“난 이동 게이트 사업으로 우리 공작가가 다시 한번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좋아질걸?”
“…….”
“…….”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허무맹랑한 소리라며 일축했을 말이다.
하지만 그녀가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두 사람의 반응은 살짝 달랐다.
힐데가르트의 의욕은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 탓에 둘은 여동생의 말을 넘기거나 비웃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공작령의 지주 상단을 소개해 줄 수 있을까?”
지주 상단이란 영지를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가문에서 투자금을 대서 만든 상단이다.
그녀가 판단하기에, 가장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상대이기도 했다.
“지주 상단을? 왜?”
“내가 생각한 사업이 어떤지 의견을 구해보고 싶어.”
그녀는 지주 상단을 이용해 이동 게이트 사업을 추진할 작정이었다.
이동 게이트 사업이 성공하면 아카락시아 영지를 거점으로 삼는 상단 또한 크게 이득을 본다.
이야기가 잘 풀린다면 충분히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소개만 해줘도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 응? 미하일 오빠!”
“넌 자기 편할 때만 우리한테 오빠라고 하지?”
툴툴대는 레디스와 달리 미하일의 표정은 애매했다.
“힐데. 혹시 연회 때 말했던 ‘방법’이라는 게 이거였어?”
“응.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
“화났어?”
힐데가르트는 조심스레 미하일을 살폈다.
이동 게이트 사업은 공작가를 위한 일이다.
그러니 무작정 숨기는 건 정답이 아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반대하려나? 그럼 좀 난처해지는데…….’
침묵은 한동안 이어졌다.
미하일의 입술이 떨어진 건 한참 뒤였다.
“……알겠어. 그럼 내려가는 대로 상단주에게 연락해 볼게. 안 그래도 한번 인사를 나눠야 했거든.”
“형?”
놀란 레디스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미하일은 평소와 같이 봄바람처럼 따뜻한 미소를 흘릴 뿐이었다.
힐데가르트의 얼굴이 비 맞은 수국처럼 활짝 피었다. 그녀가 미하일을 와락 껴안았다.
“역시 우리 오빠야!”
“대신 상단주님께 무례하게 굴면 안 돼. 오빠랑 약속해.”
“응! 할게! 약속할게!”
힐데가르트는 냉큼 새끼손가락을 걸더니, 미하일의 팔을 마구 흔들었다.
레디스는 기가 찬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미하일의 눈빛이 침착하다는 걸 깨닫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힐데의 방에서 나오며, 그가 미하일을 찔러보았다.
“형, 괜찮겠어?”
“응?”
“힐데 말이야. 바로 허락해 주면 어떡해.”
“허락 못 할 이유는 또 뭔데.”
미하일은 웃음을 터뜨렸다.
동생의 눈썹이 주눅 든 강아지처럼 처져 있었다.
“형. 걔가 요즘 좀 이상하긴 해도 그래 봐야 열두 살이야. 아직 어리거든?”
“그러니까 더 도와주는 거야.”
미하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우리가 힐데에게 해줘야 할 말은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는 다그침이 아니야. 잘해보라는 격려지.”
“그래도 쟨 아직 너무 어리잖아. 아무리 마법사라 해도 그런 일이 가능하겠어?”
레디스는 힐데의 이동 게이트 사업이 당연히 실패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 누군가가 시도해 봤을 게 뻔하단 생각이었다.
하지만 미하일의 반응은 달랐다.
“실패하더라도 좋은 경험일 거야.”
“하지만…….”
“우리는 힐데의 오빠잖아, 뭔가를 하려고 할 때는 응원해 주자.”
미하일이 그를 차분히 타일렀다.
힐데가르트의 이동 게이트 사업이 정말 성공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성공하든 실패하든 미하일은 똑같은 태도로 그녀를 격려해 줄 생각이었다.
“실패해도 괜찮아. 오히려 어릴 때 실패하는 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마우제네 군수가 형을 그렇게 무시하는데?”
“…….”
“힐데가 실패하면 형이 체면을 잃어. 우린 쟤를 야단쳤어야 해. 연회 때만 해도 그래. 가문 들먹이면 안 됐다고 혼냈어야 한다니까?”
“혼내긴 무슨. 자기도 못 쳤으면서.”
“아, 진짜! 지금 그 이야기가…….”
“체면 좀 잃으면 어때.”
미하일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오빠니까 힐데를 위한 체면이라면 백번이고 버릴 수 있어.”
대륙의 각지를 잇는 이동 게이트.
순간 이동 마법이라는 걸 겪어보지 못한 미하일로서는 여동생의 말이 퍽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엉뚱한 발상이 꼭 그 나이대의 아이가 할 법했다. 이야기하는 내내 반짝이던 눈도 그렇고.
“레디스. 나는 힐데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 애 편이 되어줄 거야.”
“……나도 안 그러겠다는 건 아니거든?”
“그래, 그래. 네가 힐데 걱정 많이 한다는 거 내가 알아줄게.”
“아! 됐거든? 형이 아는 게 무슨 소용인데!”
두 사람이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힐데가르트의 머릿속에는 애초에 실패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그녀가 완전히 뒤바꿔놓을 공작령의 미래는 두 사람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근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수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달빛은 각자가 걸어가야 할 길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저택 앞에 커다란 황실 마차가 멈춰 섰다.
키스케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를 수행하는 노바는 제 주군의 긴장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황실 서고에서 읽었던 책을 어젯밤까지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키스케였다.
그의 긴장이 녹은 건 힐데가르트가 저택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키스케! 왔어?”
힐데가르트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불렀다.
연한 하늘색 프릴 드레스 차림이었다.
무심코 편하게 이름을 부른 그녀는 가방을 든 로빈이 쿡쿡 찌르는 통에 뒤늦게 예법에 맞는 인사를 올렸다.
“키스케 라모프 드롯셀마이어 황태손 전하를 뵙습니다.”
“마중 나와주어서 고맙군, 공녀.”
“고맙기는요.”
“격식 차릴 거 없어. 평소대로 해.”
“역시 너도 이쪽이 편하지?”
힐데가르트가 배시시 웃었다. 키스케의 입가에도 웃음이 스쳤다.
얼마 후 미하일과 레디스도 인사를 건넸다.
“전하를 뵙습니다.”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하.”
“미하일 소공작, 레디스 공자. 갑작스럽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하지.”
“전하께서 공작령에서 마도학을 익히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악수와 함께 주고받는 딱딱한 인사였다.
세 명이 서로를 하루아침에 편하게 대할 리 만무했다.
하지만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기에, 힐데가르트는 판에 박힌 인사를 그러려니 넘겼다.
“이쪽은 내 시종 기사이자 로열 가드인 노바야.”
“전하.”
로열 가드라는 말에 부담을 느낀 노바가 그를 하소연하듯 불렀다.
키스케는 심드렁한 눈으로 대답했다. 뭐 어떠냐는 태도였다.
“공작령으로 내려가서 내 호위와 시종을 함께 맡을 사람이지.”
“……키스케 전하를 수행하는 노바플랑카스타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두 분.”
입을 쩍하고 벌린 레디스가 그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았다.
‘저러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네.’
노바는 로열 가드 말석에 불과하다며 겸손하게 말했으나, 레디스의 귀에는 그 말이 제대로 닿지 않은 게 분명했다.
‘레디스에게는 잘된 일이겠지?’
동경하던 로열 가드가 근처에 있다는 건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리라.
그때 카유크를 비롯한 오브론 대공저의 사용인 몇 명이 나왔다.
“드디어 가냐?”
“카유크.”
힐데가르트는 인사를 나누는 미하일들에게서 한 발짝 떨어졌다.
“우린 이만 가볼게.”
“그래. 잘 가라.”
“가니까 속이 다 시원한 거 아냐?”
“아니. 섭섭해.”
드물게도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그의 눈매가 평소보다 부드럽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솔직하게 답했다.
“나도 그래. 그동안 여러 가지로 편의를 봐줘서 고마웠어, 카유크.”
힐데가르트가 작별의 의미로 손을 내밀자, 카유크는 그녀의 손등 위에 살포시 입술을 눌렀다.
제법 신사다운 티가 나는 모습이었다.
힐데가르트는 그와의 첫 만남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정중히 굴었으면 얼마나 좋니?”
“난 건방진 면이 매력일 때가 있거든.”
“말이라도 못하면.”
하지만 카유크의 말을 차마 부정할 수는 없었다. 대공가의 일원답게 당당한 모습이 그의 매력이었으니까.
“두고 봐. 다시 만났을 때는 지금이랑 많이 다를 테니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다.”
카유크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을 놓았다.
기다림에 지루해진 말이 투레질했다. 노바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공녀님, 작별 인사는 끝나셨나요? 이제 출발해도 괜찮지요?”
“응.”
힐데가르트가 치맛단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에스코트하지.”
“힐데, 마지막이니 내 손 잡아.”
키스케와 카유크가 동시에 손을 내밀었다.
“음?”
“어라?”
둘은 서로를 보며 깜짝 놀랐다. 왜 그걸 네가 하냐는 얼굴이었다.
힐데가르트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얘네가 뭘 하는 거지?
물론 기껏해야 에스코트일 뿐이다.
마차에 오르는 동안 치맛단을 밟고 미끄러지거나 넘어질 일 없게 손을 잡아주려는 것뿐.
그것뿐인데…….
‘……왜 손을 안 내리는데?’
팽팽하게 부딪친 시선이 서로를 탐색하듯 치밀했다.
먼저 입을 연 건 카유크였다.
“……이런. 전하께선 당연히 먼저 마차에 오르실 줄 알았는데요?”
“공녀를 두고 나 혼자서 그럴 수는 없지.”
“괜찮습니다. 힐데는 오브론의 손님인걸요. 제가 끝까지 책임져야죠.”
“좋은 자세지만 그쯤 해둬. 오늘부터는 내 스승이기도 하니까.”
“두 사람 다 고맙지만 됐어. 내 관절 멀쩡해.”
두 사람이 입씨름을 하거나 말거나, 힐데가르트는 코웃음을 쳤다.
꼬맹이 둘 나이를 합해봐야 레온하르트의 나이가 될락 말락 하는데, 요 어린것들이 뭘 하고 있다니?
‘내 앞에서 신사 노릇 하기에는 아직 이르지.’
종종걸음으로 다가간 힐데가르트가 혼자서 마차에 올랐다.
결국, 머쓱해진 키스케와 카유크는 손을 내렸다.
“키스케, 안 탈 거야? 놓고 가도 돼?”
“……아니.”
그녀가 채근하자 결국 키스케도 마차에 올랐다.
한 발짝 떨어져서 그 광경을 보던 카유크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스쳤다.
곧바로 마차로 다가간 카유크가 창문 너머로 그녀를 보았다.
“힐데, 내가 좋은 거 하나 알려줄게.”
“좋은 거? 뭔데?”
“이성에게 함부로 타이 같은 거 선물하지 마.”
카유크의 새파란 루프 타이가 빛났다.
“배우자가 아닌 사람에게 타이를 선물한다는 건 ‘당신을 소유하고 싶습니다’라는 의미거든.”
“……야!”
“순진한 소년의 순정을 가지고 놀면 벌 받는다!”
투르르르! 히이잉!
말이 힘차게 울부짖었다.
“그런 의미로 선물한 게 아니라고!”
소리치는 힐데가르트의 목소리와 카유크의 웃음소리가 한 데 섞였다. 소란스러운 출발이었다.
그렇게 마차는 아카락시아 영지로 향했다.
힐데가르트와 미하일, 레디스, 로빈. 거기에 키스케와 노바까지.
올라올 때는 네 사람이었지만 내려갈 때는 여섯이 된 여행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