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좀 전부터 소파에 앉아 있던 카유크는 어느새 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우습게 보이면 곤란하니까 한마디 한 것뿐이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마우제네 랑케르트면 로바르네 황자비 전하의 친언니라고.”
“그게 어쨌는데?”
힐데가르트가 부스럭거리며 종이봉투를 열었다.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어. 아카락시아를 얕보면 가만 안 둘 거야.”
카유크는 그녀의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뜨던 것도 잠시, 곧바로 푸하하 웃으며 소파를 퍽퍽 쳤다.
“가주님 저리 가라네. 가문의 적은 나의 적이다?”
“그런 셈이지. 자, 그만 웃고 이거 받아, 카유크.”
“엉? 이게 뭔데?”
“뭐긴 뭐겠어, 선물이지.”
그의 웃음이 그친 건, 힐데가르트가 포장된 상자를 건넸을 때였다.
카유크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어? 나? 진짜로 나 준다고?”
“그렇다니깐. 얼른 받아.”
“진짜? 진짜로 나 주려고 사 온 거야?”
“얘가 속고만 살았나.”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끄덕인 뒤 상자를 내밀었다.
그러나 카유크는 덥석 받는 대신 수상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가로 날 노예로 부릴 작정이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그냥 대공 각하께 드려야겠다.”
“아아아아! 받을래! 나 줘! 내 거 줘!”
카유크가 후다닥 상자를 낚아챘다.
“너 이거 그냥 선물인 거다?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기다?”
“다른 말은 무슨. 얼른 열어보기나 해.”
“…….”
카유크는 리본을 풀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이건…….”
“어때? 마음에 들어?”
힐데가르트가 그에게 선물한 건 크라바트의 한 종류로, 오브론 대공가의 문장을 새긴 청옥 루프 타이였다.
“네게도 이래저래 신세를 많이 졌으니까. 그동안 고마웠어, 카유크.”
그녀가 웃으며 감사를 전했다.
수도에서 내려가면 더는 카유크를 보지 못하리라.
나중에 재회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제법 시간이 지난 뒤겠지.
“…….”
감동한 걸까?
상자를 열어본 카유크는 말이 없었다.
카유크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입을 연 건 한참 뒤였다.
“……너, 이성에게 타이를 선물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무슨 뜻인데?”
“모르면 됐어.”
“야.”
누구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상대가 쏘아보거나 말거나 카유크는 실없는 웃음과 함께 루프 타이를 목에 걸었다.
“잘 어울려?”
“응. 내 안목이 좋으니까.”
“그런 걸로 치자.”
그가 거울 앞에 서서 루프 타이를 확인해 본 것도 잠시.
“고맙다. 소중히 할게.”
카유크는 힐데가르트를 흘끔 보더니 구겨져 있던 셔츠를 빳빳해지게 폈다.
* * *
카유크가 오브론 대공을 찾아간 건 그날 밤이었다.
“할아버지. 저 카유크입니다.”
소년은 들어가겠다는 말과 거의 동시에 문을 열었다.
집무실에 있던 오브론 대공은 혀를 차며 나무랐다.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출입하다니, 어떻게 배워먹은 게야.”
“에이. 그래도 오피니움에 가서는 이렇게 안 해요.”
“당연히 그래서는 안 될…….”
대공은 하던 말을 멈추고 카유크를 빤히 보았다.
오피니움은 오브론의 건축가가 모여 사는 성채 도시다.
본 저택이 있는 화이칼과는 멀리 떨어진 곳이라, 카유크가 가서 살기에는 유배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반년 전 그곳에서 건축을 배워보라고 했던 건 대공이었지만 카유크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대답을 미뤘다.
그런데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이다.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
“다시 생각해 보라고 하신 건 할아버지잖아요?”
“하지만 네가 순순히 들어먹을 녀석이냐?”
“너무하시네요. 뭐, 변덕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변덕?”
카유크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네.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이 옳다는 걸 알았거든요.”
힐데가르트 공녀를 주시해라. 그녀는 장차 거물이 될 재목이다.
오브론 대공은 그렇게 말했으나 카유크는 힐데가르트를 얕잡아보았다.
엄청난 오판이었다.
검술 대회 기간에 힐데가르트가 물밑에서 이어간 행보는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열두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백방으로 움직이며 일리야와 황제의 저주를 풀고, 황태손의 스승이 되기까지 했다.
카유크는 어린애라 얕잡아보았던 그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할아버지의 말에 동의해요. 아카락시아 공작가는 몰라보게 변할 거예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힐데가르트가 서 있으리라.
비로소 대공과 같은 시야를 가지게 된 카유크의 직감이었다.
“오브론은 아카락시아의 변화를 간과해서는 안 돼요. 믿을 수 있는 우군으로 남아야 한다는 게 제 의견입니다.”
“흐음. 그래서?”
“건축을 공부할게요. 그 대신 앞으로 아카락시아 공작가와 관련된 사업은 저한테 맡겨주세요.”
오브론 대공은 손주를 훑었다.
날 선 콧대며 푸른 눈동자.
기품이 느껴지는 태도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타고난 오브론의 일원 그 자체다.
다만 딱 한 가지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목에 걸린 루프 타이였다.
대공이 웃음을 흘렸다.
“……제법 의젓한 말을 할 줄 알게 되었구나.”
“하핫.”
건축은 오브론에게 가장 큰 힘을 부여하는 지식이다.
멋모르고 각오 없이 덤벼들었다가는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제대로만 배운다면 오브론의 모든 사업에 관여할 능력을 갖추는 게 건축학이었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대공이 엄하게 말했다.
“배우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다. 앞으로 네가 맡을 사업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 책임 또한 네 몫이야.”
“괜히 시험해 보지 마세요, 할아버지.”
카유크는 씩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는 오브론입니다. 각오는 언제나 되어 있어요.”
“…….”
“아직도 저를 모르세요?”
밉지 않은 당돌함을 지닌 건 손주의 장점이었다.
대공은 내심 웃었다.
“좋다. 네 각오가 그렇다면 최고의 지식을 전수해 줄 건축가를 구해주마.”
오브론의 건축가는 제국 어디에 내놓아도 흠잡을 데 없는 인재다.
공학, 과학, 기술, 인문 지식을 익힌 최고의 인재를 카유크 한 사람을 위해 붙이겠다는 소리였다.
그것도 카유크가 아카락시아 가문과 관련된 사업을 맡길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언제 내려갈 생각이냐?”
“힐데를 배웅한 뒤 바로 가야죠? 따로 챙길 짐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고얀 놈. 그럼 마지막 인사가 그따위라는 게야?”
“또 뵐 텐데요 뭘. 참, 이건 힐데가르트가 할아버지에게 전해달라는 선물이에요.”
카유크는 코트에서 주먹만 한 상자를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할아버지.”
“잘 다녀오너라.”
“건강하세요.”
손자는 야속하리만치 담백한 인사만 남기고 랑베르 거리 저택으로 돌아갔다.
“흠…….”
서재에 남은 오브론 대공은 안경을 벗었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그의 손이 선물 상자 쪽으로 향했다.
달그락.
힐데가르트가 보냈다는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사파이어로 된 루프 타이가 들어 있었다.
간단한 쪽지도 함께였다.
[랑베르 저택의 홍차향이 그리워질 것 같네요. 감사했습니다.
-H.]
열두 살 공녀가 보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내용이다. 눈가를 문지르던 대공이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도대체 얼마나 저를 더 놀라게 할 생각인 걸까?
가문이 무너지고, 권리를 빼앗기고,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길을 열어낸 것만으로도 놀랍건만.
“설마 카유크를 저렇게 바꿔놓을 줄이야.”
직접 보았음에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카유크가 제 발로 오피니움까지 가서 건축 기술을 배우고 가문 사업까지 맡아보겠다는 건 상당한 변화다.
그는 앞으로 두 가문의 교류에 자신의 힘을 보태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동안 오브론의 셋째로 태어난 이상 선택권이 없다는 걸 수긍하며 살아온 카유크였다.
영리한 손자는 그 사실을 부정하거나 반발하기보다는 즐기며 사는 쪽을 택했건만.
그런 카유크가 처음으로 오브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인정하며 스스로 변하기로 한 것이다.
대체 힐데가르트의 어떤 점이 카유크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걸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인가…….”
겪을수록 놀라운 소녀가 아닐 수 없다.
“아깝군. 카유크를 일찍 약혼시키지만 않았으면 며느릿감으로 점찍었을 텐데.”
오브론 대공은 루프 타이를 손에 든 채 소리 높여 웃었다.
* * *
같은 시각.
카유크가 저택을 비우자 힐데가르트는 두 오빠를 불렀다.
“오빠. 나 할 말이 있어.”
빠진 짐이 없는지 확인하던 두 사람은 하던 일을 멈췄다.
“진지한 이야기야. 앉아서 들어줄 수 있어?”
“그럼. 물론이지.”
미하일이 먼저 의자에 앉았다.
옆자리에 따라 앉은 레디스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여동생은 요즘 들어 물어보기 전에 눈치를 살피는 일이 늘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데.
“뭐, 메모장이라도 가지고 오면 되냐?”
“그럴 필욘 없고…….”
힐데가르트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놀라지 말고 들어. 실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거든.”
“하고 싶은 일?”
“응. 내가 마법을 익힌 뒤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힐데가르트는 천천히 이동 게이트 사업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