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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공녀님 (53)화 (53/166)

52화

길지만 즐거웠던 수도 여행은 이제 막바지였다.

오브론 대공은 미하일과 카유크를 데리고 외출했고, 레디스는 오랜만에 푹 쉬고 싶다는 말에 저택에서 낮잠을 자도록 내버려 두었다.

힐데가르트는 로빈을 데리고 수도에 있는 번화가로 나왔다.

“아가씨, 어디부터 갈까요?”

“의상실에 예약을 잡아둔 게 몇 시였지?”

“오후 3시예요. 아직 시간이 꽤 남았어요.”

“그럼 보석상으로 가자.”

“보석상이요?”

“응. 살 게 있어서.”

알아볼 것도 있고.

그녀는 유독 허전해 보였던 미하일의 상의 재킷을 떠올렸다. 괜찮은 브로치가 있으면 하나 집어 올 생각이었다.

신세를 진 카유크에게도 작별 인사 겸 하나 사줘도 괜찮겠고.

레디스도 뭘 사주긴 해야겠는데…….

‘시간 참 빠르네. 벌써 영지로 내려갈 때가 다 되다니.’

엊그제 있었던 연회는 힘들었지만 참여한 보람이 있었다.

랑케르트가 상당히 거슬리게 굴었지만, 그것만 빼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이번 수도행은 성공적이다.

미하일은 내년에 작위를 이어갈 소공작으로서 눈도장을 찍었다.

레디스는 말할 것도 없다. ‘혜성같이 나타난 실력파 신예 검사’ 타이틀은 어딜 가서도 유용하게 쓰일 테지.

힐데가르트에게도 제법 유용한 시간이었다.

일리야 공녀의 저주를 풀고, 레디스가 대회에서 우승한 건 물론이다.

오브론 대공과 신뢰 관계를 쌓는 데 성공했으며 막시밀리언과 재회했다.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다 취했어.’

기대 이상의 성과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좋은 제자에 사업 아이디어까지 얻었고 말이야.’

앞으로 무엇이 필요한지도 명확해졌다.

‘망할 랑케르트 가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겠어.’

때로는 불순한 감정이 가장 순수한 동기가 되곤 한다. 힐데가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우선 이동 게이트 사업.’

이 사업은 미하일의 작위 계승식과 함께 공작가의 재건을 알리는 화려한 신호탄이 될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다.

준비해야 하는 건 많다. 이동 마법 연구는 물론, 게이트를 세울 때 필요한 막대한 마석과 그를 관리할 마법사를 생각하면 믿을 만한 사업 파트너가 절실했다.

‘그건 일단 지주 상단과 협력하면 될 것 같은데. 미하일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그리고 키스케.

황태손을 제자로 들였다는 건 황실과 끈끈한 관계를 맺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젠간, 그걸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나올 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해.’

어느 정도 선까지는 막시밀리언이 막아주겠지만 실력을 시험하려 드는 사람이 나오는 걸 막지는 못하리라.

아마 사냥 대회 때 은근한 압박을 넣지 않을까?

‘애초에 내 수제자가 형편없는 실력을 자랑하는 건 곤란하지.’

그녀는 키스케를 위한 수업 계획도를 머릿속에서 그려 나갔다.

넋을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도 시간은 지금처럼 빠르게 흘러갈 것이다.

이동 게이트 사업이 무사히 안착하고, 미하일이 순조롭게 가문을 이어받는다면.

레디스가 원하던 대로 로열 가드가 되어 독립한다면.

아카락시아의 위명이 다시 한번 제국에 널리 퍼진다면.

그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역할을 다한 셈이다.

그러니 그 이후엔.

그때부터의 내 인생은…….

‘……뭘 하지?’

힐데가르트는 멍하니 창문 밖을 보았다.

스쳐 지나가는 창밖 풍경처럼 막연한 상상은 빠르게 사라졌다.

가문 재건.

레온하르트를 위해 위대한 가문을 만드는 일.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가문의 영광에 비하면, 제 인생 따위야 별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가씨, 도착했어요!”

“응.”

힐데가르트는 고개를 젓곤 마차에서 내렸다.

보석상이 모인 상점가는 다른 거리와 달리 한산했다.

그녀는 진열된 상품을 훑어보며 걸음을 내디뎠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무엇을 찾으시나요?”

“브로치를 보고 싶은데 안내해 주겠어?”

“이쪽으로 모시지요.”

점원은 오브론 대공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금방 알아보았기에 그녀에게 다가와 지극정성으로 안내했다.

“이쪽은 저희 가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품입니다.”

“보석은 어떤 게 준비되어 있지?”

“원하시는 품목으로 준비하겠습니다.”

“루비도 있나?”

“물론이지요. 랑케르트산 루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옛날이었다면 당연히 ‘아카락시아산’ 루비라고 불렸을 텐데.

새삼 랑케르트에게 보석 광산을 팔았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왔다.

힐데가르트의 표정을 보고, 점원이 곧바로 말을 바꾸었다.

“오브론산 사파이어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쪽으로 할까요?”

“그래. 차라리 그쪽으로 해줘.”

“알겠습니다.”

“다른 것도 보지.”

힐데가르트는 이것저것 고르기보다는 괜찮은 물건이 있으면 모조리 쓸어 담았다.

그녀가 레디스에게 어울릴 루프 타이까지 골랐을 무렵.

힐데가르트는 고객의 얼굴을 확인하러 나온 지배인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좋은 물건이 많아서 발품을 덜었어.”

“과찬이십니다, 아카락시아 공녀님.”

힐데가르트는 놀란 척을 했다.

“어떻게 알았지?”

“스칼렛 스워드 우승자 가족께서 오브론 대공저에 머무르고 계신다는 걸 모르는 상인이 있겠습니까.”

“눈썰미가 좋네.”

“공녀님처럼 아름다운 은발 또한 몰라본다면 실례겠지요.”

듣기 좋게 포장한 겸손이다.

평범한 상인이라면 모르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곳은 고가품을 취급하는 보석상.

오브론 대공가처럼 큰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특이사항쯤은 파악해둘 곳이다.

지배인은 그녀가 오브론의 마차를 타고 온 시점에서 정체를 유추해 낸 게 틀림없었다.

“내가 은발인 걸로 알아봤나? 전통 있는 가게답게 지배인의 눈썰미도 좋은걸?”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마석으로 만든 액세서리는 없어?”

힐데가르트는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난 특이한 게 좋은데……. 마석으로 만든 브로치를 보고 싶어.”

“죄송하지만 요즘은 마석으로 액세서리를 만들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큰 가게라면 당연히 있을 줄 알았는데.”

“마석은 이제 귀금속으로 취급하지 않으니까요. 마석값이 예전만 못한 것도 있습니다.”

지배인이 차근차근 대답했다.

“마법사들이 자취를 감춘 영향이지요.”

“그래? 그럼 마석값이 많이 내려갔겠네?”

“맞습니다. 더는 수익이 나지 않아 거의 채굴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걸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힐데가르트는 놀라는 척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 막을 순 없었다.

‘이거 잘하면 마석을 대량으로 사들일 수 있겠는걸?’

이동 게이트 사업에는 많은 마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마석 채굴을 관둘 만큼 그 값어치가 떨어졌다니. 헐값에 사들일 기회가 아닌가.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마석 광산을 사들이고 인부를 고용할 만큼의 돈이 필요할 테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힐데가르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일단 주문했던 것들은 전부 랑베르 거리의 오브론 대공저로 보내줘.”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십니까?”

“하나 있긴 한데……. 실은 처분할까 고민 중인 물건이 있어.”

“어떤 물건이지요?”

“우리 대고모께서 남겨주신 물건인데, 잘은 모르지만 레인보우 글로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던데.”

그 순간.

힐데가르트는 지배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는 걸 똑똑히 보았다.

‘이것 보게.’

역시 솔베르 백작 부인이 그 난리를 피울 만한 이유가 있었나 보지?

“굉장히 유명한 물건이군요.”

“그래? 나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잘 모르겠어.”

“그러실 만도 합니다.”

지배인은 사뭇 친절한 얼굴로 명함을 뽑아 들었다.

그러곤 언제든 자신에게 연락할 수 있는 사서함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예전에는 아카락시아산 보석이 무지개보다도 영롱하다며 찾는 분들이 많으셨지요.”

“지배인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진 않는데…….”

“제 스승께서 아카락시아산 보석을 다루는 장인이셨습니다.”

지배인은 더없이 정중한 손길로 명함을 내밀었다.

“게다가 레인보우 글로우라면 그 아카락시아 보석 중 특등품으로 세공한 걸로 유명했지요.”

힐데가르트가 명함을 받아 들었다.

“필요하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꼭 한번 감정해 보고 싶군요. 아마 상당한 금액일 겁니다.”

“지배인의 성의를 기억해 두지.”

“영광입니다.”

이걸로 결정됐다.

레인보우 글로우는 팔지 않는 게 이득이다.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물건이다.

‘게다가 레온 오빠가 날 위해서 만들어준 거잖아.’

역시 안 파는 게 낫겠군.

지배인에게는 미안하지만, 힐데가르트의 마음은 빠르게 정해졌다.

그녀는 수정처럼 맑은 얼굴로 수표책을 뜯어서 값을 치른 뒤 보석상을 나왔다.

* * *

“그으래. 어쩐지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쇼핑을 안 한다 했다.”

레디스는 혀를 차면서도 브로치를 제 가슴에 대보았다.

“브로치에 머리핀에 새 구두에……. 짐칸 터지는 거 아니야?”

“아니거든? 그리고 오빠, 고맙다는 말은?”

“안 해. 바보야.”

하지만 레디스는 누가 봐도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미하일한테 자랑하는 거면 이것도 가져가!”

“싫어!”

힐데가르트는 미하일에게 선물하려고 포장해 온 루프 타이 상자를 들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어휴. 누가 속 편하게 쇼핑이나 하러 다녀온 줄 알아?’

애들이 뭘 알겠니.

이게 다 사전 조사다. 사전 조사!

힐데가르트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린 때였다.

“힐데, 너 마우제네 군수하고 한 판 붙었다며?”

“……넌 연회도 안 왔는데 그걸 어떻게 알았어?”

“다 아는 수가 있지. 난 오브론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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